이 나라와 도시는 '정치연습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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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와 도시는 '정치연습장'이 아니다
  • 하석용
  • 승인 2012.07.3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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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하석용 / 공존회의 대표 · 경제학 박사


우리 어린 시절에는 학교에서 거의 모든 행사를 위해 '예행연습'을 했다. 매스게임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무슨 조그만 시상식 하나를 해도 그랬고, 졸업식 송사와 답사는 하도 여러 번 미리 읽어서 막상 당일에 실감이 나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인생 실전에서는 아무 것도 연습이라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번번이 더욱 삶이 야속했는가 싶다. 
 
그렇다. 인생에는 정말 야박하게도 연습이라는 게 없다. 어떤 시험이라도 한 1년 참고 기다리면 또 다시 설욕의 기회가 돌아오고,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선택과 기회는 모두 같은 것이 아니다. 단 한 박자도 멈추지 않는 시간의 흐름은 모든 것의 의미와 자리를 바꾸어 놓고 반복과 동일함이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삶에는 끊임없이 오류가 쌓이고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이 깊어만 간다.
 
아마도 그래서 무릇 남의 삶을 책임지는 역할을 떠안게 되는 사람들에게는 고금과 동서에 유별한 경계(警戒)가 주어지고 특별한 자격을 요구하게 되는 것일 게다. 단 한 마디 말로 수천 수만의 생명을 여탈(與奪)하고 자칫 지나치는 순간의 판단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그야말로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연습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만큼 그들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고 오류를 통제하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이 부과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당연한 이치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종종 앞뒤 가리지 않고 털어놓는 속내가 백면서생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대통령들부터 시작해서 누구랄 것 없이 이 나라의 많은 공직자들이 그 직에 취임할 때, 앞 사람의 업무를 넘겨받으면서 그 직을 떠날 때 내뱉는 말들이 그야말로 위험천만하기 이를 데가 없다. "미천하고 능력 없는 이 사람이 이 일을 맡아서…" "제가 경험이 부족하고 능력도 부족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잘못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좀 더 잘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것은 어느 전직 대통령이 임기 말에 남긴 "이제 대통령에 대해서 조금 알 것 같고 다시 한 번 더 한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말이다.

자칭 선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문득 배에 올라와 키(舵)를 잡으면서 승객들을 향해 "나는 항해를 해 본 적도 없고 잘할 능력도 없지만…"이라든지 "이 배가 이렇게까지 많이 망가져 있는지 몰랐다"라고 말한다면 그 승객들은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또는 엉망진창으로 어지럽게 항해를 하던 선장이 다음 항해를 앞두고 "지금까지는 솔직히 내가 선장 경험이 없어서 그랬는데 이제부터 다시 시켜주신다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한다면 그 승객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물론 우리의 유별한 겸양 관습을 이해할 수도 있고 그들 또한 인간이니만큼 연습이 없는 인생에 어찌 야속함이 없을 것인가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남의 삶을, 그것도 무더기로 재단하는 위치에서 저지른 과오가 있었다면 그렇게 말하기 좋은 관용 정도로 무마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들의 과오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서로 다른 사정과 기구한 사연이 얽혀 있게 마련이고, 그것들은 대개 회복이 불가능한 아픔을 동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성도 없이 우리는 또 다시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다. 벌써 오래 전부터 열 손가락을 다 동원해도 모자랄 만큼 그 자리가 자기 것이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항상 느려터진 머릿속에 이제 문득 떠오르는 의심이 있다. 이 사람들 모두 한 번의 연습을 하려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결국 대통령 연습을 하려 한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모르고 있는 일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고금의 역사에 사람이 모여 사는 게 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나라는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끝도 없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먹고사는 경제 문제와 직접적으로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국방 문제가 당장 화급하고, 자식들 길러내는 문제조차 아직 이 나라 난제 중 난제다. 극단적으로 이기적이면서도 평등을 지향하는 이 나라 대중들이 이해하기 곤란한 욕구를 질서로 풀어내야만 하고, 패거리주의에 찌들어 구제가 불가능할 것 같은 일그러진 정치판에도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집단이기주의로만 발전하는 공조직을 비롯하여 사회적인 조직들이 공공성을 회복하도록 도와야 하고, 대중들에게 삶의 재미를 욕 안 먹고 풍요롭게 공급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내일의 삶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하고 그 실현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런 일들을 모두 한 번에 제대로 해 낼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단 한 번의 연습도 없이.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이 이런 문제들을 모두 다 한 번에 엎어 버릴 수는 있는 것일까. 그럴 수 있다고 하고 그 다음에 오는 세상은 어떠한 것일까. 그들은 그 다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그들은 이상적인 세상이라는 데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그들 중 누구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지금의 문제에서 정말로 벗어나는 것이고 세상은 훨씬 행복해지는 것일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들 중 누구의 말도 믿지 못한다. 그들의 주장이 어떤 것이든 그들은 그들의 말이 실현되어야 하는 현장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실속 없는 상품의 현란한 포장지와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제 누구와 몇 사람의 의도로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거대하다. 변화는 좀 더 정밀하게 설계되어야 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현실적 방법을 가져야 한다. 공약은 크고 많을수록 허황하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대중의 삶에 진정한 한조각 안녕을 실현시켜 보겠다는 간절한 의지와 고민이 그립다. 변화를 바라더라도 자신은 그러한 변화의 단 한마디 고리가 되겠다는 철학적인 완숙과 절제의 리더십을 보고 싶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찌 되었건 자신이 그 자리에 가기만 하면 된다는, 연습의 의욕에 넘치는 열혈 청·장년밖에는 보이지 않으니…. 연습이나 하려면 나서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차라리 내 눈이 어두운 것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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