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과 나비 유혹하기 위해 잎 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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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과 나비 유혹하기 위해 잎 변색
  • 정충화
  • 승인 2012.09.2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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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화의 식물과 친구하기] 설악초

 

설악산은 빼어난 절경으로 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산이다. 이 산은 단풍으로 물든 가을 풍경이 무척 아름답지만, 뭐니뭐니해도 설경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름자에서 드러나듯 겨울 풍광이 더없이 아름다운 산이니 말이다. 능선이며 나무며 바윗덩어리가 온통 눈에 덮인 겨울 설악산은 여느 산과 비교할 수 없는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식물 가운데 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잎이 순백으로 채색돼 설경을 연상케 하는 게 있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것 같은 외형적인 특징 때문에 이름자에도 설악(雪嶽)이라는 글자를 안고 있는 설악초(雪嶽草)가 바로 그것이다.

설악초는 대극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이다. 미국에서 들어온 식물로 줄기가 대략 60cm까지 자라며 중앙부에서 여러 개의 가지가 갈라진다. 잎은 연녹색으로 긴 타원형이며 줄기 끝 꽃이 달리는 주위의 잎은 가장자리에서 중앙부로 하얗게 변색된다. 꽃이 달리지 않는 줄기 아랫부분의 잎은 색깔이 바뀌지 않는다.

이는 꽃이 작으므로 매파역할을 하는 벌이나 나비가 쉽게 찾아들도록 유혹하기 위한 특별한 생존전략이다. 하얗게 변색된 잎이 멀리서 보면 꽃 무더기처럼 보이므로 날아온 벌과 나비가 작은 꽃에 앉게 되고 이를 통해 수분을 하는 것이다.

꽃은 6월부터 9월 사이 줄기 끝에서 피며 새하얀 포엽에 둘러싸여 있다. 지역에 따라 늦가을에도 이 꽃을 볼 수 있기도 하다. 번식력이 강한 설악초는 하얗게 변색된 잎이 아름다워 정원, 공원, 도로변 화단 등에 많이 심으며 최근엔 주택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달빛을 받으면 빛난다고 해서 ‘야광초(夜光草)’라고도 부른다 한다.

지난 8월 초순경 출장길에 강원도 양양군 어성전 부근 냇가에서 식물 사진을 촬영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슬개골 골절상을 입었다. 사고 당일 충주로 긴급 후송돼 입원하여 뒷날 접합수술을 받았고 입원 6주차인 지난주 수요일에 깁스를 풀었다. 그리고 지금도 병원 신세를 지며 물리치료를 받는 중이다.

지방 소도시의 작은 병원이라 산책할 공간이 없어 식사 후엔 그저 병원 현관에 나가 잠시 바람이나 쐬다 들어오는 게 운동의 전부이다. 병원 현관 앞은 주차장인데 한쪽 끝 두어 평 남짓한 화단에 서너 가지 식물이 꽃을 피워 그걸 보는 걸 작은 재미로 삼았다.

그곳엔 설악초가 많아 볼 때마다 내 눈을 밝혀 주곤 했다. 태풍이 휩쓸고 간 뒤 바람이 서늘해지자 설악초 잎의 흰 빛이 엷어지고 시들시들해지고 있다. 평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식물인데 오랜 병원 생활에서 그나마 위안을 주던 존재여서 퍽 고맙게 생각하던 터였다.

이제 퇴원일이 며칠 남지 않았지만, 긴 재활훈련이 기다리고 있어 당분간 야외에 나가기는 어렵게 됐다. 식물 좋아하는 사람이 실내에 갇혀 지내는 데다 올해는 야외에 나가 식물을 가까이서 볼 수 없을 것 같아 답답하기 짝이 없다. 이 불운한 나날이 어서 지나기를 기다릴밖에.

글/사진 : 정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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