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선의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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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의 불편한 진실
  • 이영주
  • 승인 2012.10.08 16:3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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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이영주 /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철저한 반성 없이 새로운 내일은 없다

19대 대선이 이제 두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그리고 가장 최근에 출마 의사를 밝힌 안철수 후보로 대선 구도가 좁혀지는 분위기입니다.

여당의 박근혜 후보는 18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고, 제1야당의 문재인 후보는 헌정 이후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고 김대중 대통령을 이은 야당의 후보이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으니, 그 내력만 봐도 극과 극의 대척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대선주자인 안철수 후보는 어느 정당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정치경력 제로의 CEO 출신입니다. 기성정치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앞의 두 후보와 가장 큰 차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세 후보의 색깔은 크게 달라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 후보가 출마기자회견을 한 뒤 보이는 행보를 보면 그다지 큰 차이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이 시대의 화두를 부여잡고 별 다른 차이 없는 이야길 커다란 변화인 양 이야기한다는 점에선 세 후보 모두 엇비슷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출신성분이 전혀 다른 세 후보가 대선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 차별성을 보이지 않는다니,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세 후보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의 구호가 과연 어떤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하게 됩니다.

불편한 진실 1 :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성 없이 경제민주화가 가능하다고?

경제민주화란 용어가 한국사회에 회자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오로지 정치 영역의 가치라 생각해 왔고, 돈 있는 자가 승자인 ‘시장’에서 만인의 평등을 기본으로 한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5년을 거치면서 우리는 그 생각이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IMF 구조조정을 계기로 노동시장은 극도로 유연해졌습니다. 전기, 철도 등 기간산업을 비롯해 교육과 의료 등 그 동안 사유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분야까지 민영화가 추진되었고 지금도 추진 중입니다. 그런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정리해고로 일터에서 쫓겨났고 불안정한 소득으로 아등바등 무한경쟁의 쳇바퀴를 돌고 있습니다. 성인뿐 아니라 어린 아이부터 승자독식의 경쟁이라는 전쟁터에 내몰렸습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승자는 계속해서 승자가 되고 패자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고꾸라졌습니다. 심지어 경쟁에서의 승패는 자식세대에까지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절망과 불안의 기운이 한국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고, 그 어두운 기운 속에서 ‘절망범죄’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입에 담기도 끔찍한 범죄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이 불러온 양극화의 극단적인 결과는 승자독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시장의 윤리에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진 돈 만큼 권리를 가지게 되는 시장의 윤리로는 절대다수(요즘은 99%라고 표현하지요.)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난 15년 동안 뼈저리게 몸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 후보는 국민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맛본 뒤에야 비로소 제기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면서 국민들이 고통을 겪게 했던 지난 15년 동안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철저히 반성하지 않습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심지어 박근혜 후보는 현재 이명박 정부가 줄기차게 추진해온 ‘줄.푸.세 정책’(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를 세우는 정책)이 본질적으로는 경제민주화와 일맥상통한다고 말합니다. 줄푸세가 뭡니까? 바로 15년 동안 정권이 바뀌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일관적으로 추진해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핵심인 ‘규제완화, 감세, 민영화, 작은정부’의 핵심입니다.

문재인 후보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실정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었다고 고백하며 선을 긋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고백에 대한 미심쩍음은 남습니다. 현재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임에도 경제민주화를 위한 그 어떤 법제도 개선에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않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멈춘 곳에서 그가 가다만 길을 가겠다는 문 후보의 의지가 더 강하게 보이는 것은 노파심이 불러온 착시현상이기만 한 것일까요?

안철수 후보는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 수 있도록 현재의 재벌 중심 경제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부 주도, 대기업 위주, 제조업 기반인 현재의 경제구조를 바꾸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꾸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현 경제구조를 바꾸려면 재벌들의 만만찮은 반발에도 변화를 추진할 뚝심이 있어야 할 텐데, 아직까지 안 후보의 행보에서 그 뚝심을 발견하기란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의 주변에 지난 시기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앞장서 추진해온 경제 관료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어 걱정이 앞섭니다.

불편한 진실 2 : 1%에 대한 강력한 규제 없이 99%의 복지와 행복이 가능하다고?

경제민주화와 더불어 올해 대선에서 가장 부상하는 핫 이슈는 지난 4월 총선과 마찬가지로 복지입니다. 무상급식이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맹비난했던 여당에서 거리 곳곳에 ‘무상급식’ ‘무상보육’ 현수막을 내걸고 있는 현실은, 복지가 얼마만큼 절박한 요구인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복지는 앞서 이야기한 경제민주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슈입니다.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출발선이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양극화 상황은 가난한 자와 부자가, 영세기업과 대기업이, 결코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할 수 없게 합니다. 결국은 승자는 또 승리하고 패자는 어김없이 패배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그렇게 패배를 거듭하다 보면 더 이상 경기에 참여할 기력조차 남지 않습니다. 15년을 거치며 우리 국민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러한 그로기 상태입니다. 복지는 이전 경기의 패자라도 다시 힘을 내어 일어나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복지는 국가가 못난 국민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국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인 것입니다.

세 후보 모두 ‘복지’를 최고의 화두로 삼고 있는 만큼 이 나라의 미래에 복지가 중요하다면, 이전까지 복지에 대해 가졌던 오해, 즉 나랏돈을 못난 사람들에게 퍼주는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불식시키는 것이 최우선일 것입니다. 그리고 패자가 재기할 수 있는 기회, 삶의 의욕을 가지려면 그만큼 국가재정을 확보해야 하고, 그것은 부유층에 대한 증세를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 후보에게서는 복지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약간의 미심쩍은 차이들이 발견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세수 확보의 문제에 이르면, 과연 복지정책을 추진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박근혜 후보는 ‘100% 국민 행복론’을 내걸었습니다. 듣기엔 참 그럴 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100%라는 수치는 지난 15년 간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한국사회의 현실, 지독하게 불평등한 경제구조를 은근슬쩍 가려버립니다. 복지를 이야기하면서 절망에 빠진 99%가 아니라 100% 국민을 이야기하는 것은, 부를 독식하는 1%의 존재를 은폐해 버립니다. 재벌 대기업 집단과 기득권층의 특혜와 독식을 끊어내지 않는다면 복지는 불가능합니다. 여전히 보편적 복지가 아닌 선별적 복지를 이야기하는 여당 후보의 일관성(?)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는 복지가 국민의 보편적 권리이며, 지금과 같은 세계경기의 장기침체 상황에서 오히려 구매력을 늘려 내수경기를 활성화함으로써 국민경제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지정책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세수 확보에 있어서는 뚜렷한 정책집행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두 후보의 행보에서 일종의 대기업 달래기로 보이는 제스처들이 계속해서 드러날 때마다 그들이 말하는 복지가 선거용 미사여구는 아닐까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철저한 반성을 할 때, 비로소 창조는 가능하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국민의 생존의 요구가 담긴 화두입니다. 한국사회가 지금처럼 계속 이어진다면 더 이상 희망조차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벼랑 끝에 선 국민의 절박한 요구가 단순히 선거용 선심성 공약으로 쓰인다면, 2012년 대선만큼 절망스러운 선거는 없을 것입니다.

대선 후보들이 너도나도 입을 모아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말한다고 2013년부터 그것이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이 구호가 선언이 아니라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왜 2012년 현재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한국사회의 화두가 되었는지, 무엇이 잘못 되었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대선 후보들이 국민과 더불어 철저하게 논쟁해야 합니다. 지금이 잘못 되었다면 그렇게 잘못 되게 만든 정책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바꾸지 않고는 잘못된 현실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말했습니다. 파괴할 수 있을 때 창조할 수 있다고. 지난 시대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 지난 시기가 가져온 시대의 불행을 극복할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012년 대선은 어쩌면 어떤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가보다 지난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훨씬 더 중요한 선거가 될 것입니다.

사족
필자는 여성단체 활동가입니다. 그래서 간간이 이 지면을 통해 성평등 이슈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 대선 후보들의 여성정책을 비교하거나 대선 후보들에게 여성정책을 제안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단지 몇 몇 공약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인식의 문제이고, 지난 시기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문제이듯, 성평등 역시 몇 몇 공약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정치 영역에 국한했던 민주주의를 시장으로 확장한 것이듯, 성평등 역시 공적 영역에 국한했던 민주주의와 정의의 문제를 사적 영역이라 치부되는 가족과 성역할, 섹슈얼리티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이 불러온 재앙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입니다. 극단적인 양극화의 최하위 지점에 여성들이 있습니다. 장애인과 이주민 등 소수자들이 있습니다. 약자에 대한 보호와 공정한 출발선, 다양함에 대한 인정은 단지 경제정책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시대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극복 위에서 성평등한 내일 역시 꿈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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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땅 2012-10-09 10:51:02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정치인에게 기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심우진 2012-10-08 18:27:17
기사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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