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세계최고의 성곽축조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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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세계최고의 성곽축조 기술
  • 이창희
  • 승인 2012.11.05 12: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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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풍물]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세계최고의 성곽축조기술 산성”으로 불리우고 있다. 최근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하였다.
 
《남한지》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가 총융사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성가퀴는 1,700첩이고, 4문과 8암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다만 성의 둘레가 6,297보, 성가퀴는 1,897보라고 하는 등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설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인조 때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73간 반, 하궐 154간이었다. 재덕당은 1688년(숙종 l4)에 세웠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전을 세웠다. 그리고 사직단을 옮길 우실도 세웠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관아로는 좌승당·일장각·수어청·제승헌 등이, 군사기관으로는 비장청·교련관청·기패관청 등을 비롯한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마랑·뇌옥,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묘, 서낭당·여단 등이 들어서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으로서의 불도의 힘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도 승려 각성이 도총섭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옥정사 외에 개원·한흥·국청·장경·천주·동림·동단의 7사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영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 하나만 남아 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 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틔어 있다. 성문은 홍예문 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 문루를 올려 세웠는데, 매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수어사 이시백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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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근 2012-11-06 22:03:38
대단한 문화 유산이네요 잘보존해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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