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간의 대립? 유치한 얘기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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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의 대립? 유치한 얘기일뿐
  • 하석용
  • 승인 2013.01.0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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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하석용 / 공존회의 대표 · 경제학 박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화 “매트릭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진실? 그것은 인간의 뇌가 그렇다고 인식하는 전기적인 반응일 뿐이다” 하도 오래된 기억이라 인용한 대사가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내용만은 기억이 선명하다. 이 대사가 오랜 세월을 넘어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언어들이 당시 내게는 너무나 도발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세상에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진실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의 세계에서 진실에 관한 논란과 수사(修辭), 가르침은 밤하늘의 별보다도 많다.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과 같이 형이상학적인 경우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 오감(五感)의 부정확성에 관한 문제나 물질을 구성하는 미세소립자를 구명하는 문제, 심지어 우주 생성의 근본을 추정하는 자연과학과 수학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진실을 찾아 방황하는 범위와 그 긴 역사는 이러한 편협한 지면에서 차마 다룰 바가 아니다.
 
절속(絶俗)의 선방에서 몸과 마음을 태우며 득도의 길에 침잠하는 스님만이 아니라 인간 누구라도 한 평생을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쉽게 달아나지 못한다.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지.... 소위 참이라는 기준을 얻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사소한 문제 하나인들 바르게 풀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앞에서처럼 인류가 소위 절대불변의 진실에 이르는 길이 결코 그렇게 단순하고 용이해 보이지는 않는다. 만유인력을 비롯한 역학(力學)체계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간이 그토록 엄밀하게 쌓아올렸다고 믿던 어떠한 지식 체계라 해도 세월의 진행과 함께 모두 참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그래서 인간은 인과율(因果律)의 법칙은 과연 참인지, 사물을 형성하고 움직이는 것은 우연과 필연 중 어느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고, 0과 ∞, 절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지금도 분투하고 있지만, 아직 인간에게 그러한 이해가 가능한 능력이 있는 것인지 조차 분명하지가 않다.
 
당연하게도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살아갈 방도를 찾아 자신의 생존을 자력으로 부지하며, 심지어 새로운 가치에 기대어 스스로 새로운 삶의 방법을 구축하고 그를 실현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숙고와 훈련과 시행착오를 필요로 한다. 오죽하면 공자 같은 이 조차 열다섯부터 일흔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발달단계를 그토록 세밀하게 구분하였을 것인가(論語, 2/4,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한 인간이 이와 같이 평생에 걸쳐 능력을 기르고 절차탁마하며 완성되어 간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숙명적인 일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태어나면서부터 제 손으로 제 먹을거리 입을 거리를 조달하고 책 한 줄 읽지 아니하고 천지간의 이치를 통섭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를 관통하는 일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 세계최고의 천재 칭호를 들었던 인사들에게도 절정기 이후의 학문적인 정진이 무의미한 것일 수 없고 절세의 소년 장사가 청장년기의 육체적인 힘을 잃는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낭만적인 문사들이 제아무리 청춘예찬을 달콤하게 지어 바친다고 해서 인생이 청춘에서 완성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제 아무리 고집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한 인간의 삶은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의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가 되고 그중 어느 한 토막만으로는 결코 그 실체를 설명할 수 없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다.
 
2030이니 5060이니 하는 유령 같은 언어들이 시중을 휘젓고 있다. 그 유치하고 상업적인 작위적 속내에서 악취가 풍긴다. 세상에 패를 가르다 못해 한 인생의 살아가는 기간을 토막을 내서 세대 간의 갈등으로 싸움판의 불을 붙이다니... 어느 누가 청춘을 살지 않은 “꼰대”가 있고 꼰대가 되지 않을 청춘이 있다는 말인가. 하나의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앞뒤로 토막을 내서 스스로 욕질하고 삿대질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절대로 지금의 2030처럼은 살지 않은 5060이 있고 절대로 지금의 5060처럼은 살지 않을 2030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제아무리 인생관과 종사하는 이데올로기가 다르다 하더라도 한쪽은 다른 한쪽이 무기력할 때 먹이고 길러준 부형(父兄)이고, 한쪽은 한쪽이 아직도 기르고 성장을 도와야할 후손이 아닌가. 이를 대립적인 집단으로 나눌 바에야 무슨 사회공동체를 이야기할 것이며 무슨 논리적인 근거 위에서 사회의 보편적인 복지를 논할 것인가.
 
하나의 유기체적인 사회 속에서 장년 노년의 자산은 결국 소년 청년의 미래의 자산이 되는 것이며 소년 청년의 역동성은 장년 노년이 삶의 보람을 확인하는 원천이다. 그 관계를 잇는 것은 번민일 수는 있어도 갈등일 수는 없고 갈등이어서도 안 된다.
 
태생적으로 정보의 장사꾼인 저널리즘의 얍삽함과, 표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정치적인 조작 속에서 이 사회의 철학과 상식은 속절없이 시나브로 시들어간다. 힘의 양적인 평등주의에 의탁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의 제도적인 약점이 강조될수록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정치인과 저널리즘이라는 장사치들의 선동 속에서 갈등과 대립의 소재로만 변모하게 마련이다. 그 속에서 공동체적인 삶의 가치는 파괴되고 우리 모두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고 피폐할 뿐이다.
 
이런 때 오직 기다리는 것은, 민주주의의 약점을 덮고 장점을 부풀리며, “절대”에 대한 환상을 접고 모두가 이해 가능한 “상대”의 울타리 속에서, 깊고 무거운 철학과 상식으로 우리 모두를 설득하고 합의의 길로 인도하는.... 그러한 이타의 정신이고 구원의 리더십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먼저, 이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내가 아는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것은 없다”라는 겸손을 회복하고 사회적인 합의의 가능성을 창출함으로써 그러한 리더십이 자리 잡을 자리를 먼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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