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 회비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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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 회비 유감
  • 최재성
  • 승인 2013.03.25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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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최재성 / 인천녹색소비자연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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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네 통장님께서 4년 만에 우리 집 벨을 누르셨다. 적십자 회비를 걷으러 오셨단다. 연말 연초에 잊을만하면 아파트 우편함에 꽂혀 있는 지로용지를 내내 무시했더니 직접 오신 모양이다. 그래서 정중하게 “저는 이미 다른 봉사단체에 회비를 내고 있고, 적십자 회비를 내고 안내고는 제가 결정할 문제이니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통장님은 “우리 통 실적이 저조하고 특히 아저씨는 납부실적이 전혀 없는데, 밥 굶고 사는 사람도 아니면서 돈 8천원을 안내는 이유가 뭡니까? 알아서 하겠다는 건 결국 내지 않겠다는 거잖아요?”라고 따져 물으신다. 이웃 간에 얼굴 붉히고 싶지 않고 나름 선한 뜻으로 돌아다니시는 통장님을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지만 ‘정말 내고 싶지 않아서’ 안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에 이기적인 사람, 삐딱한 사람, 치졸하고 속 좁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내가 대한적십자사의 모금에 응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나는 대한적십자사의 회원이 아니다. 가입한 사실이 없다. 그런데 왜 내게 ‘회비 납부’를 그렇게 줄기차게 강요하는가? 백보를 양보하여 회원 모집과 모금을 위한 활동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나의 기본권인 ‘간섭 받지 않을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다. 국가든 사회집단이든 또 다른 개인이든, 개인에 대한 간섭은 최소화해야 하며 그것은 공익이나 선한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든 안내든, 수재의연금을 내든 안내든, 적십자 회비를 내든 안내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좋은 일을 소개하며 동참을 권유하는 일도 상대방의 부담을 최소화해야 한다. 회원가입도 안한 사람에게 연거푸 지로용지를 보내고, 그래도 안내면 사람을 보내 집요하게 강요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다.
 
둘째, 자율로 결정할 일을 의무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짓이다. 지로용지 이곳저곳에서 강요나 강제가 아닌 ‘자율’을 강조하고 있지만, 재산세 납부액을 기준으로 금액을 책정하고, 세금마냥 납부기한이 있으며, 수도·전기·가스요금 고지서와 유사한 ‘지로용지’를 사용하여 집집마다 발송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율보다는 의무로 느끼게 된다. 여기에 통장들이 집집마다 방문까지 하면 몇 사람이나 자율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셋째, 수많은 봉사·구호단체 중 대한적십자사에만 특혜가 주어지는 것은 불공평하다. 오래전에는 대한적십자사가 거의 유일한 구호단체였고 지금도 대표적인 단체이지만 이제는 유사한 일을 하는 단체가 많아졌다. 또한 봉사·구호가 중요한 일이지만 노동·환경·인권·교육·소비자 등 사회적으로 중요한 다른 일들도 많다. 그런데 국가의 도움을 받아 지로용지를 보내고 통장 등을 동원하여 회원모집과 모금을 하는 단체는 내가 아는 한 대한적십자사가 유일하다. 공익을 위한 수많은 단체 중에서 대한적십자사가 가장 우월하다는 생각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때문에 대한적십자사의 모금에만 주어지는 특권에 반대한다.
 
넷째, 민간법인인 대한적십자사의 모금 활동에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자원이 과도하게 동원되는 것은 부당하다. 이는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으로 관의 본래 기능을 왜곡하는 일이며 대한적십자사의 독립적이고 효율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회원들이 자율적으로 선출해야하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정권의 낙하산 자리로, 대한적십자사가 관변조직으로 인식되고 조직이 관료화 된 것은 적십자사가 관과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섯째, 나는 대한적십자사의 효율과 도덕성에 대한 신뢰가 그리 높지 않다. 국민 성금이나 혈액 관리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비리가 발생하고 있고,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참신한 시도를 전혀 만날 수 없다. 이렇게 불투명하고 굼뜬 조직에 애정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개인정보의 활용 문제이다. 나는 대한적십자사 회원에 가입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개인정보인 이름과 집 주소의 사용을 동의한 적도 없다. 적십자사의 설명에 의하면 대한적십자사조직법 제8조를 근거로 정부로부터 주민등록법 시행령 제45조에 의하여 승인을 받아 세대주의 성명과 주소를 제공받아 사용하고 있다지만, 개인정보의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는 개인정보 활용의 남용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뻔한 말이지만 적십자 활동은 좋은 일이다. 이제 그 좋은 일을 합리적으로 했으면 좋겠다. 좋은 일이니 국민들에게 강요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좋은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능하고 나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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