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섬 '교동도'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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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섬 '교동도'를 다녀와서
  • 송정로 기자
  • 승인 2013.04.10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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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섬연구모임' 교동도답사보고회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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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발족한 '인천섬연구모임'(공동대표 최원식 최중기 김원) 은 4월9일 오후 부평아트하우스 제1강의실에서 ‘교동도답사보고회’를 열었다. 발족후 지난 1월 8일, 9일 교동도 답사를 다녀온 후 개최한 첫 보고회다.
 
회원과 시민 등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보고회는 2시간 가량 답사사진 보기와 답사보고, 정책제안,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됐다.
 
답사 보고는 ‘한반도의 역사를 품은 작지만 큰 섬! 교동도’(박경화·작가), ‘박두성, 세상의 빛이 된 사람’(구본선·교동교회 목사), ‘교동의 관방체제와 유적’(배성수·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교동도의 해안 및 도서생태문화’(최중기·인하대학교 교수), 교동면 식물모니터링(송홍선·), 교동도(강화) 조류현황(김대환·인천야생조류연구회장) 등에 대해 진행됐다.
 
‘인천섬연구모임’ 올 두번 째 답사를 다음달 4일과 5일 옹진군 덕적면 백아도에서 실시할 계획이다.
 
'인천섬연구모임'(http://cafe.naver.com/incheonsum) 은 지난해 9월 11일 섬 관련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인천 연안 섬들에 대한 체계적 조사, 연구를 통해 섬 정체성 확립과 섬 문화의 보존과 발전을 목적으로 창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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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도 답사기 >
한반도의 역사를 품은 작지만 큰 섬, 교동도!
 
박경화 / 작가, 인천섬연구모임 회원
 
“이 섬이 왜 중요한 곳이냐 하면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죠.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만나는 곳이고, 이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할 수 있고,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군사적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지요.”
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렇지! 지금도 비무장지대가 되어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지.’
여행을 출발하기 전, 지도를 살펴보았다. 강화도 옆에 달린 섬이고, 서해의 섬들이 그렇듯 갯벌이 있거나 철새들의 보금자리쯤 되지 않을까? 이렇게 지레짐작했다. 막상 섬에 발 디디며 해설을 듣고 보니 둔탁한 뭔가가 머리를 쳤다.
그 뿐이 아니다. 이곳에는 강에서 흘러드는 퇴적물이 쌓여 땅이 무척 비옥하고, 이 땅에서 나는 쌀은 지역 사람들의 자부심이 되었다. 서해 바다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관문의 역할을 하고, 분단이 되어 지금은 왕래를 할 순 없지만 북쪽 황해도가 건너다보이고, 동쪽으로는 강화도 북부를 지나 한강 하류와 만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이다. 우리가 그 존재가치를 잠시 잊고 살았던 섬, 이곳은 바로 교동도다.
도시 사람들에게 섬 여행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일상과는 다른 풍경을 느끼고 싶을 때 잠시 다녀오는 일상탈출이다. 짭짤하고 알싸한 바닷바람을 만끽하는 정도면 충분히 만족한다. 거기다가 입맛 돋우는 지역 특산음식이라도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지면 환호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그런데 정작 이 땅에 대한 이해, 섬 본래의 모습을 찬찬히 돌아본 적이 있었던가? 갸웃갸웃해진다.
섬에는 파도와 비바람을 견디며 물질을 해온 어부와 결코 녹록치 않은 땅을 일구어온 억척스런 농부들이 있다. 그저 여기가 전국 최고이자 지상낙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의 순박한 역사가 있고, 척박한 환경을 낮은 자세로 견뎌온 독특한 동식물이 있고, 한결같이 불어오는 알싸한 바람도 있다. 이렇게 섬의 다양한 얼굴을 찾아보고 그 가치를 생각하는 ‘인천섬연구모임’이 결성되었다.
2012년 9월에 창립할 무렵 모임의 가칭은 ‘인천도서연구모임’이었다. 이 이름을 들은 몇몇 사람들은 “도서? 책 연구모임인가?” 그랬다. 책이 아니라 바로 인천앞바다에 있는 섬을 연구하는 모임이다. 인천앞바다, 가까운 거리지만 마음의 거리가 멀었던 것일까? 제주도나 울릉도, 남해안의 이름난 섬들은 부지런히 다녔지만 인천앞바다에 있는 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곳에는 무려 155개나 되는 섬이 있고, 사람이 사는 유인도도 41개나 된다. 섬마다 알콩달콩 살아온 이야기가 있고 한반도의 역사가 있고 보전가치가 있는 자연생태계도 품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찬찬히 찾아보려고 한다. 인천섬연구모임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한반도의 역사를 품은 섬 교동도다.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문화재
“문화재같기는 한데 저 집의 대문인가?”
구불구불 골목길을 돌아서자 눈앞에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이 등장했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봐도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뭔가가 허전하고 이상하다. 성이라고 하기엔 나지막하고, 아치형 홍예문 안에는 민가가 들어앉아 있다. 가까이 다가가 안내판을 보니 교동읍성의 남문이란다. 1629년 조선 인조 때 교동읍성을 축성했을 당시에는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석축 위에 유량루라는 멋진 누각이 있었는데, 1921년 폭풍우 때 목조 건물은 무너지고 홍예문만 남은 것이다. 그 뒤 읍성 안쪽 자리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홀로 남아 있는 홍예문은 마치 민가의 대문처럼 보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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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에는 예부터 왜구들이 눌러 살다시피 할 정도로 침입이 잦았다. 그래서 인조 임금 시절에 교동도와 강화도를 강화하기 위해 교동읍성을 쌓고, 읍성 안에는 주요기관들이 들어앉았다. 관아와 객사를 비롯한 내아, 외아 같은 관청건물과 안해루, 상문루 같은 건물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무심한 세월과 함께 이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민가가 들어서고 일부는 텃밭으로 일구어졌다. 이번 답사의 해설을 해 주신 교동교회 구본선 목사님이 골목길을 걷다가 갑자기 2층 양옥집 뒤편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목사님이 어딜 가시나?”
졸졸 뒤따라가 보니, 눈이 녹아 질척이는 텃밭에 누렇게 마른 풀들만 어지럽다. 아니, 여기는 왜 오셨지? 가만 보니 밭둑에 뭔가가 있다. 바로 안해루를 떠받들었던 석축 2개가 밭두렁에 덜렁 서 있다. 양옥집 뒤편에 숨어 있어서 아는 사람들만 찾을 수 있는 자리에 문화재가 있었다. 본래 석축은 4개가 남아 있었는데, 나머지 2개는 교동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옮겨져서 뜬금없는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다. 문화재 가치를 잘 몰랐던 사람들이 다른 용도로 쓰려고 위치를 옮기고 돌 표면도 깎아서 크기도 작아졌다고 한다. 몰랐으니 그럴 수 밖에…, 그래도 우리 문화재의 현실 앞에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석축이 서 있는 교동부지 옆 텃밭에는 연산군 적거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작은 비석이 남아 있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뒤 이 곳 교동도로 유배를 와서 초옥에서 살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한다. 철종 임금도 자신이 왕족이라는 신분을 모른 채 나무꾼으로 살았던 ‘강화도령’ 시절에 교동도에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관방의 요충지이자, 중요한 중간기착지
교동읍성 안에는 강화나들길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교동도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도보여행을 하기에 딱 좋은 길이다. 안내판을 지나 따뜻한 햇볕을 따라 걸으니 동진포에 이르렀다. 한때 이 포구에는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면서 번성했고, 지금의 교동도 선착장이 생기기 전에는 이곳에서 강화도와 육지로 연결하는 배가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당시에 배를 정박시키고 사람들이 오르내렸던 동진포의 석축은 예전 모습 그대로 잘 남아 있다. 바닷가 마을마다 배가 정박하는 부두를 콘크리트로 반듯하게 만들지만 예전에는 돌을 견고하게 쌓아 만들었다. 부두의 옛 원형을 바로 동진포에서 만날 수 있다. 동진포가 섬 사람들이 이용하던 부두라면 건너다보이는 남산포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던 포구다. 바로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어영의 선창으로 활용했던 나루터이다.
교동도는 관방의 요충지였다. 요즘에는 나라를 지키는 것을 국방이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관방(關防)이라고 했다. 여기서 관(關)이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넘어가야 하는 곳을 뜻한다. 고려시대의 교동도는 중국과 무역을 할 때 중요한 기점이자, 삼남지방에서 쌀을 싣고 개성으로 가던 조운선과 수송선이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중간기착지였다. 왜구들이 판단하기에 교동도는 황해도 연안과 개경 주변을 약탈하기에 딱 좋은 중간기지였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는 왜구들의 선박 213척이 교동에 정박했으며, 우왕 2년(1376년)에는 왜구의 침입을 피해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등 피해가 극심했다. 이런 피해를 줄이고 관방체계를 잘 구축하기 위해 고려 조정에서는 수군을 양성하여 교동과 인근 연안을 방어했고, 조선 태조 때는 육군과 수군을 겸하는 절제사를 파견했고, 이후에도 교동에 주둔하는 수군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의 하나로, 그 시절 남산포에는 경기수군의 배들이 수없이 드나들고 정박했을 것이다. 이 배들을 묶어두었던 계류석은 세월따라 모두 사라지고 이제 단 하나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계류석은 어느 집 담벼락에 버려진 듯 홀로 서 있다. 이곳이 본래 자리인지, 누군가 옮겨온 것인지도 분명치가 않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만 눈여겨 볼 뿐, 귀한 문화재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곳에 쓸쓸히 서 있다.
그 외에도 교동도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알려주는 곳이 있다. 중국 양반과 조선 양반을 함께 모시는 교동향교가 있고, 향교 입구에는 섬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던 다양한 종류의 비석을 한 자리에 모은 비석군도 빠뜨리지 않고 둘러보면 좋겠다.
 
화개산성, 관미성일까?
교동도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바로 화개산을 둘러싸고 있는 화개산성이다. 화개산성은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화개산(259.5m) 위에 내?외성으로 축조된 산성인데, 총길이 2,168m에 이르는 포곡식 산성이다. 포곡식 산성이란 성 안에 계곡을 포함하고 있는 산성을 말하는데, 계곡이 있어서 물이 풍부하고 활동공간이 넓으며 외부 노출을 막기에도 좋다. 화개산 능선에는 봉수대도 있다.
이번 교동도 답사에는 ‘교동 관방체제의 역사’라는 주제로 도시인문학세미나를 함께 열었다. 인천발전연구원과 인천도시인문학센터, 인천섬연구모임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이번 세미나의 토론쟁점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관미성(關彌城)이 바로 화개산성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관미성에 관한 내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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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년 7월에 광개토대왕이 남으로 백제를 쳐서 10개의 성을 함락하였다. 10월에는 백제의 관미성을 공함하였는데,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길이 끊어진데다 성 외곽에는 바닷물이 둘러쌓여 있는데, 왕이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협공하게 함으로써 20일만에야 함락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파주의 오두산성, 강화도 봉천산, 예성강 하구를 관미성이라고 추정하면서 의견이 분분한데, ‘사면이 깎아 내린 듯 가파르고 길이 끊어진데다 해수로 둘러쌓여 있다’고 기록한 글을 보아 화개산성이 가장 유력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곳이 관미성이 맞다면 화개산성의 역사는 고구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화개산성은 산 능선 일부에만 흔적이 남아 있다. 교동도는 고려시대부터 시작한 간척사업으로 인근의 작은 섬을 연결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60, 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는 논을 경지정리하면서 화개산성의 돌을 옮겨 논바닥에 깔고, 돌을 잘게 부수어 도로를 닦을 때 쓰기도 했다. 일제침략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에는 문화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흉흉한 전쟁이 지나고 폐허가 된 땅에서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판에 문화재를 어찌 생각했을까?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문화재는 우리 곁에 겨우 남아있는 우리의 뿌리이자 정신이다.
교동읍성의 성곽을 연결하고 남문인 유량루, 동문 통삼루, 북문 공북루를 복원하고, 읍성 안에 자리잡았던 관아와 객사, 안해루, 상문루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면 교동도의 얼굴은 어떻게 달라질까? 민가의 낮은 울타리가 되고 논바닥에도 묻혀 있는 산성의 돌을 옮겨와 화개산성을 복원하는 것은 가망없는 상상에 불과할까? 지금은 허무맹랑한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이 상상이 현실이 되면 교동도는 강화도와 경주에 버금가는 역사관광지로 거듭날 것이다. 만약 내가 교동도 주민이라면 교동읍성을 복원하겠다는 강화군수 후보자에게 기꺼이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아니, 복원사업을 주요 공약으로 선정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다.
이 밖에도 교동 여행에 쏠쏠한 재미를 주는 곳은 무척 다양하다. 대개 섬은 물이 부족하지만 교동도의 쌀농사를 걱정없게 만들어준 고구저수지와 난정저수지, 철책선 안에 있는 갈빗살 방조제, 마을 사람들이 풍어제를 지냈던 고읍리의 거대한 물푸레나무, 섬에 있는 나무가 맞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무학리의 은행나무, 한국전쟁 때 찾아든 피난민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장이 섰던 대룡시장,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을 만들어 맹인들의 세종대왕이 된 송암 박두성 선생이 태어난 상용리 터와 선생이 다녔을 옛 교동교회도 교동도의 소중한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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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의 몫
교동도를 들어가려면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10여 분 가량 배를 타야 한다. 그러나 물때가 맞지 않으면 배가 외포리까지 한 시간 가량을 돌아서 가야 한다. 배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교동도는 기다림과 여유를 배우는 곳이다. 그러나 이런 운치를 즐기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교동도와 강화도 사이에는 지금 연육교 공사가 한창이다.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연결하는 연육교(3.52㎞)가 2008년 10월 10일 첫 삽을 떠서 2014년 6월을 목표로 열심히 공사를 하고 있다.
다리가 연결되면 섬은 과연 어떻게 바뀔까? 섬 사람들은 운명의 공동체이다. 땀 흘려 지은 농산물이 남으면 이웃들과 나눠먹는다. 김장하고 남은 배추를 나눠먹고, 들판의 곡식과 야채도 서로 나눠 먹으며 이웃이 다 내 가족이려니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연육교가 놓이고 많은 관광객들이 자가용을 몰고 들어오면 이제 그들에게 적당한 값을 쳐서 판매하게 될 것이다. 대문이나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살았던 섬 생활도, 섬 사람들의 인심도 어떻게 바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변화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배를 타는 재미와 운치를 즐기는 여행자의 눈에도 다리가 연결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섬 사람들에게 연육교 건설은 평생 숙원사업이다. 다리가 완공되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대규모 지역 개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한밤중에 갑자기 아플 때 큰 병원까지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오직 그것뿐이다. 이 소박하고도 절박한 소원을 뭐라 할 수 있을까? 다만 앞으로 찾아들 많은 관광객들이 이 따뜻한 공동체의 삶을 흔들어놓는 훼방꾼이 되지 않기를, 이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용히 지켜봐 주기를 바랄 뿐이다.
 
 
* 박경화
1972년 경북 예천 출생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 『여우와 토종 씨의 행방불명』,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등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parkkyungh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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