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달 5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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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달 5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 이영주
  • 승인 2013.04.29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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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이영주 /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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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4월도 다 갔다. 계절의 여왕이라 칭송되기도 하는 눈부신 계절 5월이 곧 찾아온다는 이야기. 5월은 만물이 피어나는 생명의 계절인 봄이 절정에 달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성년의날, 심지어 부부의날까지 각종 기념일과 숱한 경조사가 숨통을 죄어오는 시절이기도 하다.
 
계절의 여왕이자 사랑과 감사가 넘쳐나는 가족의 달이라는 5월, 우리는 과연 5월을 둘러싼 화려한 수사만큼 아름답고 행복한 5월을 보내고 있는가?
 
당신의 5월은 안녕하십니까?
 
언제부터였을까? 5월은, 특히 여성들에게 ‘공포’와 ‘부담’의 계절이 되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3종세트가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부모님, 스승에 대한 감사로 행복이 가득해야 할 5월, 평소 불행했던 사람도 행복해야만 할 것 같은 5월이건만, 왜 5월은 더 이상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부담과 스트레스의 달이 되었을까?
 
사실 5월이 부담과 공포의 계절이 된 것은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각각의 기념일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어린이들을 사랑하자는 게,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자는 게, 스승에게 감사하자는 게 무슨 잘못이겠는가? 기념일의 의미만 따져본다면 5월은 말 그대로 사랑과 감사의 달, 그래서 기쁘게 맞이하는 게 당연한 달일 것이다. 어린이날은 어린 자녀들에게, 어버이날은 나이 든 부모님께, 스승의 날은 자녀의 선생님에게 물질적인 보상을 해야 하는 날이라는 통념이 굳어지면서부터 5월은 가뜩이나 가벼운 지갑을 탈탈 털어야 하는 스트레스가 되었다.
 
 
“지금은 양육자들이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날에 불과한 이 날은 원래 그런 시혜적인 날이 아니었다. 어린이란 말이 소파 방정환 선생이 만든 말이라는 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보다 먼저 박달성이라는 천도교인이 쓴 말이고 소파 역시 1920년 8월, 천도교 잡지 <개벽>에서 ‘어린이 노래’라는 시를 발표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린이날의 기원은 천도교에서는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의 날’로 선포한 것이었다. 이후 천교도에서는 어린이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갔다. 그 운동의 하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소파 선생이 잡지 ‘어린이’ 발간이었고 소파를 비롯한 천도교 인사들은 어린이가 운동의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소년회 조직을 지원하고 거리캠페인을 벌였다. 그들은 어린이들이 노동에 내몰리고 권리를 유린당하는 소수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사회 전 영역에서 억압받고 착취 받는 사람들과 어린이를 동등하게 해방 주체로 대우하는 의미로 노동절을 어린이날로 삼았다. 어린이?청소년이 소수자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움직임이다.”
- 한겨레 2011.5.6.
 
5월을 맞는 여성들의 스트레스가 왜 이렇게 클 수밖에 없는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린이날의 유래를 찾아보았다. 이 글을 보니 지금껏 어린이날의 의미를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았다. 어린이날은 자녀에게 닌텐도나 최신 스마트폰, 그도 아니면 문상(문화상품권) 같은 선물을 주는 것이 중요한 날이 아니라 어린이를 사회의 한 주체로 인정하고 선언하는 날이다. 다시 말해, 어른이 어린이에게 일방적으로 시혜를 쏟아 붓는 날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임을 이 사회가 인정하는 날인 것이다.
 
요즘 시대는 사랑과 소유가 구분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자녀를 투자재라 부르고, 그래서 자녀에게 쏟는 금전적 정서적 에너지를 미래에 대한 투자로 인식하는 게 공공연해졌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문상(문화상품권)으로 환원 가능한 교환가치가 되어 버린다. 부모에 대한 감사 역시 마찬가지이고, 자녀에 대한 일종의 청탁으로 전락한 스승의날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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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은 그 기념일의 주인공과는 상관없이, 각종 소비를 부추기는 상품시장의 마케팅전략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 스트레스를 어찌할 것인가. 공포와 부담인 5월을 무시하고 지나칠 것인가. 그렇게 무시할 수 있다면 공포와 부담이 될 리도 없겠지. 남들 하는 만큼은 해줘야 하기 때문에 공포와 부담일 테니. 그렇다면 운명이려니, 하고 냉가슴 끙끙 앓으며 5월을 ‘견뎌낼’ 것인가.
 
이쯤에서 한번쯤 거꾸로 생각해 보자. 자식에 대한 사랑이나 부모와 스승에 대한 감사는 매우 당연한,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 통념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기념일 역시 당연하게 생각하고 별 다른 문제의식 없이 사람들 하는 대로 따라하게 된다. 그렇게 구색을 맞추다 보니 허리가 휜다.
 
그러나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 본다면, 자식에 대한 사랑이나 부모와 스승에 대한 감사처럼 ‘당연한’ 감정과 행위를 구태여 기념일까지 정해놓고 적어도 이날만큼은 사랑과 감사를 상기하라고 강요 혹은 권유하는 걸 보면, 어쩌면 어린 자녀를 돌보는 것, 나이든 부모를 공경하는 것,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이런 행위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당연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결코, 당연하지 않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은 모두 가족과 연관돼 있는 기념일이다. 스승의날은 학교에서 발생하는 사제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확장된 개념의 가족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전체 수명을 놓고 볼 때,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립해서 살 수 있는 기간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의 자립 역시 오롯이 혼자 살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도움과 협력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이다.) 나머지 절반은 어려서이든 나이 들어서이든 병이 들어서이든, 반드시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이것은 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누구나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또 누군가를 보살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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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애의 절반 이상은 누군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보살핌은 가족이라는 사적영역에 떠맡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생존 자체에 보살핌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보살핌은 사회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회재생산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성장과 사회화과정 안에서 누군가를 보살피거나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관계이다.
 
보살핌이 사회재생산을 위한 필수과정이라면, 보살핌은 단지 부모에게(그것도 유독 어머니에게) 혹은 교사 개인에게만 맡겨질 과정이어서는 안 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재생산이라는 공적인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 차원, 사회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책임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보살핌은 사회재생산의 필수과정
 
그러나 보편적 복지를 빨갱이의 포퓰리즘으로 매도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한국사회에서 보살핌은 오롯이 사적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 어린이들에 대한 돌봄이 부족하면 그것은 무조건 부모 개개인(특히 어머니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노인이 있으면 젊은 시절 노후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노인 개인의 탓이거나 부모 공경을 하지 않는 패륜 자녀 개인의 탓으로 돌려진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날이든 어버이날이든 스승의날이든,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른 물질적 보상으로 사랑과 감사가 계량되는 뒤틀린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최근 내가 활동하는 단체에서 한 동네에 풀뿌리여성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 공간은 여성들이 편안하게 드나들며 배움과 소통의 시간을 갖고, 육아를 나눔으로써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여성들에게 떠맡겨진 돌봄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공적영역에서 재고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도 구상 중이다.
 
이 사업을 주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동료가 며칠 전 페이스북에 이 소식을 올렸더니, 아주 기막힌 댓글이 달렸다. 댓글의 요지는 “여성센터랍시고 만들어놓으면 여자들이 바깥으로 나돌아서 집안이 개판이 된다”는 것이었다.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면 개판이 되는 집안이라면, 그 집안은 이미 개판이다.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살림과 보살핌을 개인 여성(어머니 혹은 아내)에게 떠맡겨놓은 집안이 제대로 굴러갈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댓글을 단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보살핌이 여성 개인의 몫이라는 것이 당연한 상식으로 굳어져 있던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지 댓글 단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란 것이다. 가족 안에서 보살핌을 자신의 아내에게 떠넘기는 ‘당연한’ 행위는 국가 차원에서 보살핌을 개인 가족에게 떠넘기는 것을 당연시하는 논리와 통한다. 보살핌을 사적 영역, 즉 가족 안의 개인 여성의 몫으로만 남겨두는 것은, 사회재생산이라는 매우 중요한 과정을 개인에게, 특히 여성에게 떠넘기는 국가의 직무유기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억압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보살핌의 대상이 되는 어린이와 청소년, 노약자들 역시 사회적으로 방치하는 결과를 낳는다.
 
요즘 마을만들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마을마다 생기는 도서관, 카페, 여성센터와 같은 시설이 집 안에 있던 여성들을 바깥으로 불러내고, 마을이 함께 아이들을 비롯한 약자들을 위한 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하고 있다. 이것은 보살핌이라는 사회재생산의 과정을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책임으로, 사회의 책임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이 내포하고 있는 보살핌의 가치가 ‘당연한’ 개인의 윤리에 머무르지 않게 하는 것, 국가 차원의 제도와 규범이 되게 것, 이것이 마을만들기의 종착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보살핌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가족 바깥으로 나오는 가족의 달 만들기
 
가족은 누군가에게는 생각만 해도 따뜻하고 행복해지는 단어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듣는 것만으로도 상처일 수 있다. 누구나 당연한 상식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가족의 이미지(예쁜 앞치마를 두르고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이는 엄마와 해맑은 얼굴로 밥상을 기다리는 아이들, 퇴근길 선물을 한아름 안고 귀가하는 아빠로 상징되는)는 사실 흔치 않을뿐더러, 설사 그런 이미지를 가끔 연출할 수 있는 가족마저도 그 이미지대로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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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만나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인간사회라면 어디에나 있는 갈등과 협력의 양면성을 지니기 마련이고, 가족 역시 그로부터 비껴날 수 없다. 하기에 언제나 협상과 토론, 함께 하기 위한 각 구성원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당연히’ 유지될 수 있고 ‘자연스럽게’ 행복할 수 있다는 턱없는 믿음이 존재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믿음을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남녀 이성애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 이외의 형태는 모두 비정상 혹은 결손가족으로 보는 시선이나 보살핌을 가족 구성원 중 여성 개인에게 떠넘기는 태도는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로부터 비롯한다. 가족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당연한 것과 자연스러운 것이 결코 없음을 인정하고,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의식적으로 노력할 때 비로소 가족은 사랑과 감사의 정서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보살핌과 돌봄, 사랑과 감사가 개인 가족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 사회 전체로 넓어질 때 부담과 스트레스로 점철된 가족의 달이 아닌, 더불어 행복한 가족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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