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교육, 누가 지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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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교육, 누가 지킬 것인가
  • 이정숙
  • 승인 2013.05.28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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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 인천교육 미래찾기⑪
인천시민들은 인천교육의 변화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변화로 가는 길을 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변화의 지향성에 대한 공론이 부족한 탓입니다. 변화하려면 공유할만한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미래도시를 꿈꾸는 인천에서 인천in’은 교육을 화두로 끌어안고 변화의 방향에 대해 먼저 고민하려 합니다. 그 시작으로「인천교육연구소」와 함께 인천교육에 대한 고민이 담긴 칼럼을 연재합니다. 매주 수요일에 교육현장에 발 딛고 선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더욱 낮은 자세로 귀를 기울이고 가감 없이 시민들께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인천교육의 공론장이 생긴다면 미래의 인천교육은 시민들의 열망을 담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in’과 「인천교육연구소」가 함께하는 '인천교육의 미래찾기'에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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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교육, 누가 지킬 것인가.
이 정 숙(인천교육연구소, 인천하정초)
시대가 변한다고 본질이 변하는가.
인간의 본질적인 삶의 방식은 아날로그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대형 컴퓨터가 대중화되어 PC가 보급될 무렵에, ‘점차 문서가 사라지기 때문에 종이의 사용량이 급격히 줄 것’이라는 전망이 심심치 않게 기사화되곤 했었다. 하지만 프린터가 함께 보급되면서 종이 사용량은 더 늘어났으며, 종이의 소비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도 컴퓨터 화면보다는 활자화된 책이나 종이로 문자를 읽고 쓰는 방식을 고집하는 아날로그적 문자사용자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종이의 위력 역시 여전히 막강하다. 물론 이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순식간에 종이를 사라지게 할 어떤 변수가 나올지도 모른다.
인간은 시대가 변하면서 어떤 것을 없애기도 하지만 또 어느 것은 형태의 변환을 가질지언정 다른 것으로 대체되길 거부한 채 그 본질을 계속 유지시킨다. 칼이나 망치가 그 좋은 예이다. 인류의 기원과 함께한 칼이라는 도구는 그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재료는 변화하였지만 그 도구의 속성은 지속된다. 시계 역시 그 기원이 오래된다. 수 백 년 동안 직접 해를 보거나 그림자에 의해 감지하는 방식에서 오늘날 디지털방식의 전자시계에 이르기까지 그 방식이나 형태는 수도 없이 변해 왔지만 수 백 년 동안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로서의 그 본질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수 백 년이 지나도 대체 불가로 발전되면서 여전히 지속 될 것들이 있다.
그런데 그 지속이 발전의 형태를 가진다하더라도 그 속성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에 머물러야 그 의미가 지속되는 것이 있다. 그 중 가장 조심스러운 것이 인간을 키우는 일이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음에도 여전히 먹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고 사랑을 하고 말을 하고 걸어야 하는 등의 장면은 계속 지속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세계에서 또 다른 공간이동을 하고 유전자로 복제인간 클론을 만들어 내는 시대가 와도 여전히 지속될 아날로그적 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 양육의 방식 중 하나인 교육도 그렇다.
1999년에 영화 ‘메트릭스’가 상영되었었다. 가상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안 되는 세계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있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순식간에 헬리콥터 운전 기술과 정보를 뇌에 전송하는 장면이 꿈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정보를 저렇게 쉽게 뇌에 안착할 수 있다면,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뇌 속에 폭증하는 지식을 넣느라 정보를 외우고 익힐 필요가 없지 않은가.
금세기 들어 지식의 폭증과 함께 교육 역시 지식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지식 자체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나의목적에 활용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구성주의는 그렇게 교육에 다가왔다. 그래서 교육은 지식자체를 외우기보다 사용하는 학습자에게 무게 중심을 두고 지식의 절대가치보다 수용자를 비교우위에 두려는 인식의 토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지식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면서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그래도 영 안 바뀌는 교육의 본질이 존재한다. 교육에는 면대면 접촉을 통해 서로 교감하는 국면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있고, 직접 말하고 쓰고 조작하는 활동 속에서 또 타자와의 공간 안에서 함께 교육 될 때 교육이 의미롭게 존재할 수 있는 국면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야 ‘교육’의 의미가 실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실천적 메카니즘이 교육의 보수성을 지켜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학교에 스마트교육의 열풍이 불고 있다. 마치 스마트폰기기가 교육의 질을 담보할 수 있다는 듯이 이 아이템은 연구학교의 검증을 거쳐 점차 보편화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 열풍 후에는 얼마 전 열린교육이란 미명하에 반짝 확산되다 철거된 열린교육의 잔해보다 처참하게 후유증이 남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섬뜩해지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우려가 스마트교육 전반의 문제라거나 본질과 닿아있는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열린교육 역시 그 본질이 현장에 투영된 것이 아니라 껍데기만 파급되어 문제가 되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럼에도 그 시행착오는 여전히 유효하다. 스마트교육 연수를 하는 강사는 아이들에게 문제를 주고 답을 즉답하게 하는 엡을 설명하면서 그 프로그램의 유용성을 설명하는데, 문제는 그 활동 속에 인간과 인간의 교감이나 소통이 얼마나 있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그 프로그램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지, 얼마나 아이들이 몰두했는지, 즐거워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물론 교육의 자장 속에는 효과와, 몰입과 재미가 참으로 좋은 덕목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일시적이고 비지속적이고, 타자에 대한 교감이기보다는 경쟁과 게임과 같은 흥분의 지속이라면 어떠한가.
뇌 과학자들은 스마트폰과 전자기기를 통한 교육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는 뉴스가 종종 보도된다. 우리 뇌는 전자문서보다는 종이를 편하게 느끼며, 아날로그적 문자가 사고의 정교함을 가져오고 뇌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교육 정책자들은 왜 침묵하는가. 혹자는 ‘누가 스마트 폰으로만 교육 하라고 했느냐, 일반적 수업과 병행하란 소리지’ 라고 무책임하게 말할지도 모른다. 하긴 학교가, 교육이, 그렇게 구성원의 의견을 묻고 교사에게 교육이 가진 의미를 합의하면서 진행된 적이 있던가. 교사는 이미 ‘전문가’들이 너무나 멋지게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을 그저 떠먹이는 전달자이거나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는 노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건 부작용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 좀 더 기다려주면 안될까요. 조금은 무디고 조금은 더디더라도 조금씩 변화를 주어야 해요. 직접 면대면 접촉을 통해 소통을 하고 종이로 문자를 읽고 직접 종이에 써보는 아날로그 방식들이 귀하게 여겨지고 지켜지면서 그 안에 미래를 향한 새로움을 조금씩 넣어보는 게 교육적으로도 좋아요. 스마트교육에 대한 가치를 좀 더 찾아봐야 겠어요” 라고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던가. 본질이 투영되기에는 발효시킬 시간이 필요하고 구성원들의 고민이 필요하다.
누군가 소수의 의견에 의해 하루아침에 밀어붙여지는 스마트 교육이 도입되면서 그것이 마치 ‘스마트 폰’ 교육으로 변질되는 국면을 보면, 누군가 이것을 활성화시켜 돈을 벌려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혐의를 거둘 수 없다. ‘잘 하려고 하는 짓’들에는 항상 이권이 개입된다. 애초에 그것이 순수하게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욕망은 ‘그 짓’을 순수한 상태로 놔두지 않는다. 그것을 쿨하게 인정하면 세상 모든 이치가 서로 자신들의 욕망으로 엉켜 있음이, 그리고 엉켜 갈 것임이 보인다. 그것을 최소화하고 조금 덜 엉키도록 단속하는 것이 교양이고 도덕이고 인격이라는 장치들이다. 그런데 교육자들조차 그 욕망에 희생되었던가 아니면 아예 자신들이 지켜내야 할 몫조차 이미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욕망이 충돌하고 이권이 난무하는 교육의 현장에서 교육의 본질이나 아날로그적 방식이니 하는 것들을 말한다는 것이 참으로 남루하게 보인다. 교육을 좌지우지하는 지침과 권위적 지시에 의문을 가질 때 대부분 ‘교육’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교육의 ‘진심’이 모두 다르다. 부정을 저지른 위정자들도 ‘애국심’ 때문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혹시 교육의 ‘진심’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면 어쩌나하는 의구심이 들곤 한다. 정말 그것이 교육을 위한 것이라면 교육의 본질을 좀 더 합의해 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교사는 힘이 없다. 겨우 뇌 과학자들의 ‘뇌를 활성화시키려면 땀을 흘려 뛰게 하라’는 말을 내밀면서 온갖 테크놀로지에 놀아나고 성과를 위해 가치가 날조되고 기기에 일방적으로 훼손되고 있는 아날로그교육을 힘겹게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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