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 말하지 못했던 그들의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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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 말하지 못했던 그들의 사연들
  • 정민나
  • 승인 2013.06.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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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정민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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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노인회 부설 노인대학에서 문예창작 강의를 해 오고 있는 나는 평균 나이 칠십이 넘은 분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작품을 받아서 읽는 재미가 색다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말하지 못했던 그들의 사연들, 무의식적으로 쌓아 온 원망, 슬픔, 분노가 판도라의 상자 처럼 백지 위에 놓여진다. 두루뭉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것에 대해 창작 교사로서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하려 하면 어떤 분은 감정에 복 받히는지 먼저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군다.
 
 
상주 낙동강가 형제들과 나란히 부모님 산소를 둘러보네 /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 / 옛날 피난 시절 생각 한다 // 6.25 피난길에 둥둥 떠내려 온 목선을 잡고 / 우리 9남매 태우시고 강을 건너던 아버지 // 물이 새어 나오는 배에서 우리는 고무신 벗어 / 물을 퍼내며 영천까지 흘러갔다 // 지레 밭 모래강을 돌아 / 이제 노을에 서서 흘러간 시간 생각한다 // 깨어진 밑바닥 빠르게 흘러간 것을 바라본다
 - 조명진, <부모님 산소 앞에서>
 
 
 
6.25 때 초등생이었거나 청소년이었던 그 분들은 가난한 그 시절이 어쩌면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 최빈국이었던 우리나라에서 가난과 관련된 이야기는 누구도 빗겨갈 수 없는 일이다. 그 옛날 폐허의 땅이 이제는 다른 나라에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뀌었으니 이제는 여유롭게 당시의 이야기를 꽃피울 만도 하건만 아직도 가슴의 한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꽃피는 문학마을’에서는 모든 것을 풀어내야 한다고 설득한다. 설령 상처로 얼룩진 시간이라도 가슴에 담아 두고두고 부끄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에 새롭게 표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그러면 그것이 꽃처럼 피워날 수도 있다고 그들에게 용기를 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새우젓을 상구선(운반선)에 가득 싣고 서울 마포강으로 팔러 가셨다. 어머니는 고기 잡는 중선배에 선원들의 식구들과 우리를 데리고 덕적도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마포강에 장사 가신 아버지는 한강 다리가 끊어지자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피신을 하는 대열에 끼어 어렵게 마포강을 건너셨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우리가 있는 덕적도로 찾아오셨다.
덕적도 ‘서포리’라는 동네에는 집이 몇 채 안 되기 때문에 우리 식구와 선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이십 여명이 배에서 생활을 했다. 얼마를 살다 보니 쌀이 떨어져서 ‘문갑도’라는 섬으로 곡식을 구하러 갔다. 그 당시 무인도에 가까운 문갑도엔 몇 가구 안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곳에는 보리와 감자가 주식이었다. 보리쌀에 감자 넣은 밥을 어선에서 해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피난 시절에도 항상 돈 보따리가 있었다. 그 때 돈을 싼 보자기는 자주 색깔이었는데 지금 우리 언니 시아버지의 돈 보따리와 똑같은 색깔에 똑같은 천으로 짠 것이어서 구별하기 어려웠다. 화폐 개혁 전이라 부피가 컸던 그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었지만 피난 중이라 마음대로 안 되었다.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남자들과 아버지의 돈 보따리를 빼앗아 산속으로 갔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냥 배에 남겨 놓았다. 우리들은 숨죽이며 애타게 걱정을 하였다. 인민군도 이념에 물든 군인들은 빨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하였지만 어린아이들은 순진하였다.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웬일인지 우리 아버지를 포함해서 남자 선원들을 돌려보냈다. 돈 보따리도 주었는데 우리는 사돈네 것과 바뀌어서 액수가 많은 것을 받게 되었다.
 
― 윤옥순 <피난시절> 부분
 
 
 
 
이야기가 개인의 회상으로 밋밋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들의 일기는 역사의 구체적인 사실까지 들여다보게 한다. 그들은 과거, 밥 먹는 일, 사는 일에 치여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풍성하게 꽃피우지 못한 감이 있다고 했다. 어린 시절과 육이오에 관련된 이야기가 쏟아지자 그제서야 비로소 ‘나만 가난하고 피폐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터놓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밥을 먹고 어떤 일을 하였는가 하는 이야기가 지금에 와서는 디테일하고도 생생한 그 시절의 문화였고 시대 의식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더구나 그것이 한곳에 모여지면 바로 역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새삼 신기한 생각을 갖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 6.25 사변이 터졌다. 그 때는 농촌에서 모내기 시작이 한참이었을 때다. 부모님을 도우려고 모를 내고 있는데 은은하게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대포 소리라는 것을 처음에는 몰랐다. 하루 이틀 지나자 보따리를 등에 지고 사람들이 떼를 지어 내 고향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소위 피난민들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아! 어끄제 들린 소리가 대포 소리였구나.’ 알아챘다. 사람들은 남의 집 초가 밑에 거적을 깔고 잠을 잤다. 아이들을 업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인민군이 따발총을 메고 나타났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들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정치나 이념을 모르는 사람들도 모두 이들의 명령에 순종하고 종사해야 했다. 밤이 되면 동네 청년들을 모아놓고 인민군 지원병을 뽑았다. 나는 밤이면 콩밭에 숨거나 도망을 다녔다. 어떻게든 그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동네 친구들은 거의 붙들려가거나 인민군에 입대하였다. 그 때 넘어간 친구들 중에는 지금까지 행방불명인 친구도 있다. 요직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하였다는 소식도 들렸다.
전쟁이 나고 그 이듬해 눈이 엄청 많이 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17세 이상의 청장년은 모두 남쪽으로 피난을 가라고 시켰다. 그냥 남아 있으면 인민군의 병력으로 흡수할까봐 남하시켰던 것이다. 제 2 국민병으로 나도 하루 종일 몇 십리씩 걸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20여 일간이나 걸어서 갔다. 저녁에 잠을 잘 때는 동네 방에서 한 방에 10~20명씩 잠을 잤다. 너무 불편하여 누워 잘 수 없는 때가 많았다. 그러면 앉아서 눈을 부치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 주영환 <6.25 동난> 부분
 
 
 
역사란 일종의 경험의 축적’이라고 했다. 이름 없는 개인들의 사소한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역사가 되고 그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그것이 현재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미래까지 내다보는 지혜를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들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집은 김해읍이라 피난을 가지 않고 마을로 들어오는 군인들을 대접했다. 아버지는 동네 구장직을 맡고 있었다. 저녁이면 군인들이 솜을 넣은 누빈 옷을 입었는데 때가 쩔어 흰 옷인지 노랑 옷인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얼굴과 손은 얼마나 씻지 못 했는지 땟국이 줄줄 흘렀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고 ‘핫바지 부대’라고 불렀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웃음을 잃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지쳐 보이거나 얼굴이 무표정 하였다.
한 부대가 지나가면 또 다른 부대가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많은 사람이 우리 집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이 방문을 열어놓았을 때 지그재그로 누어 정신없이 자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도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 오금주 <핫바지 부대>부분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우리가 만일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들을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어린 아이로 머무를 것”이라고 하였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교훈과 미래의 전망을 갖게 해 준다는 깨달음은 달리 말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양’이라는 데까지 가서 앞산 넘어 포탄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밤이면 번쩍이고 쾅쾅 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그럴 때면 부모님과 동네 분들이 당황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포탄 터지는 소리가 며칠 계속 이어지고 난 뒤 유엔군이 왔다. 그들은 인민군이 후퇴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모님은 우리도 고향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피난민들 행렬 속에 끼어 돌아오는 길은 방금 전 격전이 있었던 싸움터였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지붕이 날아가고 말과 사람들 (인민군)들이 죽어 있고 철모도 뒹굴고 썩어가는 냄새도 올라오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많다 보니 우리 식구들도 헤어졌다가 다시 찾아서 안심을 했던 기억도 남아있다. 마침내 집에 오니 그래도 우리 집은 폭격을 피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를 심어 놓고 간 논은 누렇게 익어 있었고, 인민군들이 우리 땅을 네 땅 내 땅 갈라놓은 것도 생각난다. 두세 달 동안 학교를 가지 못했는데 나는 초등학교 4학년에 들어가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이 성당의 일을 맡아 하셔서 못 먹던 시절에 가루우유를 배급받을 수 있었다. 집에서 그걸 쪄서 먹고 학교에선 우유를 끓여 마시기도 하였다. 조그맣게 생긴 누런 설탕을 배급 받았던 생각도 난다.
그 때 부모님은 부지런하셔서 나는 ‘조회장님 딸’, ‘조약국집 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당시로는 부잣집 형편으로 살아서 거제도에서 올라오는 제 2국민병들 에게 ‘우리국군 주먹밥’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우리 집 사랑채에 그들의 잠자리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학교는 군인들이 가는 길목에 있었다. 군인 가족들이 잠깐 동안이라도 교실에서 공부하다 올라간 적도 있다. 그 때 나는 주판셈을 잘하고 붓글씨를 썼는데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라는 글자를 잘 그렸던 기억이 아련히 남아있다.
― 조명진 <다시 고향으로> 부분
 
 
 
 
자꾸 욕심이 생겨 글이 길어졌다. 육이오를 경험하시고 글까지 쓰신 분들이 고령이시라 묻어놓은 이런 이야기들이 앞으로 영영 잊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나는 윌리암 블레이크의 이런 구절이 떠올랐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시를 소개하면서 글을 맺기로 하겠다.
 
 
 
내 고향은 아주 먼 곳에 있다네 /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 생각나는 것은 커다란 디귿자 (“ㄷ”자 ) / 초가집 툇마루에 앉아 언니들과 소꿉장난 하던 곳 / 넓은 마당 한 켠엔 돼지 우리집 / 까막 흑돼지 두 마리가 자라던 곳 // 쌀뜨물에 쌀겨 풀어 / 곤부레로 휘휘 저어 / 어머니가 돼지 밥 준다고 하면 // 나도 바가지 들고 설치던 / 황해도 내 고향 // 피난 나온 지 65년 /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
― 윤옥순 <무도리> 전문
 
 
▶ 위의 인용한 글들은 모두 대한 노인회 부설 노인대학 수강생들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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