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을 위한 통증은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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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을 위한 통증은 달콤하다
  • 김기용
  • 승인 2013.07.0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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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인천교육 미래찾기(17)
인천시민들은 인천교육의 변화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변화로 가는 길을 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변화의 지향성에 대한 공론이 부족한 탓입니다. 변화하려면 공유할만한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미래도시를 꿈꾸는 인천에서 인천in’은 교육을 화두로 끌어안고 변화의 방향에 대해 먼저 고민하려 합니다. 그 시작으로「인천교육연구소」와 함께 인천교육에 대한 고민이 담긴 칼럼을 연재합니다. 매주 수요일에 교육현장에 발 딛고 선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더욱 낮은 자세로 귀를 기울이고 가감 없이 시민들께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인천교육의 공론장이 생긴다면 미래의 인천교육은 시민들의 열망을 담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in’과 「인천교육연구소」가 함께하는 '인천교육의 미래찾기'에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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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을 위한 통증은 달콤하다
 
 
김기용(인천교육연구소기획실장, 석남초교)
 
혹시 래포(rapport)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대인관계에서 특히 중요하다는 이 단어의 의미는 ‘서로 믿고 존경하는 감정의 교류에서 이루어지는 조화로운 인간관계’ 라고 합니다. 일상어로 쉽게 풀어쓰면 친근하고 협동적인 관계라는 말이지요. 교직에 발을 들여 놓기 전후(前後)로 많이 들었던 이 말을 나는 올해 특히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의 낮 시간 대부분을 함께 생활하는 우리 반 아이들 때문이었지요.
 
꽃피는 춘삼월이라지만 바람은 아직 동장군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 저와 아이들은 만났습니다. 그리고 서로 길들여지는 연습을 시작했지요. 아이들도 그동안 해마다 해왔던 일이었을 테고 저도 오랜 세월 해마다 치른 일이지만 이번처럼 고단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별나게 활달한 아이들과 지나치게 한적함을 찾는 교사.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척관계의 두 성향이 만나 처음 두어 달 동안 하루하루를 서로 겨루듯이 지낸 것 같습니다. 어른인 제가 이런 생각이 드니 아이들은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짐작이 가요. 아마 스트레스가 대단하였겠지요.
 
그렇게 저도 아이들도 마음 한 구석 시름시름 앓아가던 어느 날 이었습니다. 그날은 아이들 하교 후 개인사물함과 책상 속을 돌아보며 정리를 하던 중이었어요. 더러 자기 물건을 간수하지 못하고 책상 속과 사물함을 폐휴지통으로 만들어버리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역시나 그날도 집에 전달되지 않은 채 구겨져 박혀있는 가정통신문, 예전에 과제로 내준 활동지, 본인 것도 아닌 다 찢어진 교과서, 깨진 손거울 등 폐품과 쓰레기가 상당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하다 3분단 네 번째 줄에서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과 그 속에 반듯하게 놓여있는 물건들 속에서 조그만 공책을 한 권 발견했습니다. 아…. 그때, 그 공책을 왜 열어봤을까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만하면 가슴이 써늘해져 옵니다. 열어본 재윤이의 공책, 그 속에는 스트레스에 지쳐 갈 데 모르는 열 세 살의 주위에 대한 절망과 원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중에는
‘죽어버려, 니 같은 년, 필요없어...... 민수, 은진, 선혜, 민정, 윤지, 서희, 씨발, 내가 이년들 때문에 이따위
로 된거야!’
같은 친구들을 향한 원색적인 욕설이 있고,
‘나 진짜로 죽어버릴까? 칼로 손목 그어 죽기?, 목 매어 죽기?, 떨어져서 죽기? 맞아 뒤져죽기?’
같은 스스로를 향한 절망의 표현,
‘선생님, 학생들 마음대로 하게 기냥 내비두세요. 그냥 놀게 재미나게 내버려두세요. …뭐 이걸 딱히 유
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드럽게 못생긴 선생님 때문에 우리 모두 힘들었습니다.. 6학년 정말로 짜증난다. 지루하고 승질나고… 그리고 우리반쌤 죽기전에 내가 잘리게 할꺼임 각오하삼!’
처럼 교사를 향한 여과 없는 깊은 원망도 있었습니다.
 
‘녀석, 낙서라지만 참, 시원시원하게 했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잠시 눈이 뜨거워지고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렇습니다.
 
‘큰일이네…. 이러다 애들도 나도 병들고 말지. 아이들의 억눌린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정감 있는 관계로 회복할 방법은 없을까?’ 요모조모 궁리를 해봐도 떠오르는 생각은 별다르지 않은 것 이었습니다. ‘그냥 놀자, 놀아보자.’ 는 것이었죠. 그리고 나중에 이 방법은 아주 특효였지요.
 
이후 학교에 사제동행멘토링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대상자를 물색했습니다. 먼저 현식이. 엄마가 필리핀국적의 다문화가정인 현식이는 언제나 말없이 혼자서 책만 봅니다.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틈만 나면 오로지 책만 보지요. 성적도 우수한 편인 데 이상하게도 유독 영어만은 언제나 최하점입니다. 어머니는 제게 영어로 문자를 보내곤 할 정도인 데 말이죠. 이찬웅…. 청소는 물론이고 각종 역할에서 언제나 도주하는 도망의 명수(名手). 이 녀석도 집안에 대해서는 도통 누구에게라도 말을 꺼내려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혜. 언제나 방실방실 밝은 웃음이 있지만 가끔씩 짙은 그늘이 보이는 것이 말 못할 뭔가 잔뜩 쌓아놓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업 없는 토요일 아침, 교문에서 녀석들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늦으막이 어슬렁거리며 보이던 것들이 언제 왔는지 일찌감치 교문에서 기웃거리며 서성이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습니다.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관으로 가서는 당시 인기 있던 김수현이 출연하는 영화를 관람했죠. 영화보고 나오는 데 뒤에서 말수 적고 언제나 책만 보는 현식이가 혼잣말인지 중얼거렸습니다.
 
“마음이 짠~하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마음도 짠~했습니다. 그리고 드는 생각.
‘자식…. 속은 아직 말랑말랑하군.’
 
점심 먹으러 중국집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는 벙어리들이 갑자기 말문이 터진 것 같았습니다. 까르르 깔깔깔 왁자지껄 시끌벅적…. 영화이야기, 친구들 뒷 담화, 나한테 하는 괜한 질문들…. 소란하고 시끄러웠지만 속으론 너무 좋았습니다.
자장면과 짬뽕을 먹으며 선생님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들…. 부모님이 늘 바쁘셔서 살림하고 동생까지 돌보느라 자신이 가장이나 다름없다는 선혜. 조부모와 부모님, 결혼 안한 삼촌에 누나까지 일곱 식구가 산다는 찬웅이는 화장실이 하나라서 불편하겠다고 하니 시간대가 달라서 괜찮다고 제법 어른스런 대답까지 했습니다. 현식이는 엄마에게 영어 좀 배우라고 했더니 외국인 엄마 때문에 영어를 일부러 멀리했다는 아픈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저마다 자기의 아픈 면을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드러내는 데 얼굴들은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속이 후련한 것이 뭔가 뻥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닫힌 문짝이 갑자기 단번에 열리는 느낌이랄까요?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 시원함…. 이렇게 정말 오랜만에 실컷 웃으며 재미있게 놀다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저녁 아직 아이들과의 열기가 식지 않은 채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한 뉴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이 각종 억압기제와 관련하여 세계적으로 최상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기사였지요.
 
< 대한민국 청소년 관련 최상위 항목 >
항목
순위
조사대상 및 출처
비고
청소년들이 받는 학업 스트레스
1위
한국과 미국, 일본, 중국의 고등학생 7천293명 대상 ‘4개국 청소년
건강실태 국제비교조사’ 보고서
ㆍ스트레스 원인:
공부(72.6%)
‘상위 10등 안에 들기’를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부모 비율
1위
2009년 ‘한·중·일 고교생의 학습 환경 및 학업태도에 관한 국제비교조사’
 
대학 진학률
1위
OECD
 
청소년 자살률
1위
OECD
ㆍ자살원인: 성적, 진학(53.4%)
* 한경닷컴w스타뉴스/2012.12.30.
 
기사는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결과가 아니더라도 학업스트레스가 불안, 초조, 수면장애, 두통, 건망 등을 유발하게 되고 심해지면 우울증이나 성장장애까지 유발하기도 한다는 소식, 그래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는 한방치료가 주목받고 있다는 소식, 대한민국 부모들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유명하지만, 아이는 아이답게 뛰어놀고 근심 걱정 없이 자라야 건강한 것이며,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들을 고통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죠.
 
컴퓨터를 끄고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선선한 바람을 온 마음으로 받으며, 얼마 전 아이들과의 힘겨웠던 시간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이들과의 행복했던 한나절도요.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쳤습니다.
 
소통을 위한 통증은 이렇게 달콤하게 변화하나보다…. 아마 아프니까 더 달콤한가보다….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래포 형성의 전제는 아마도 열린 해방감일 것이라는, 그리고 아이들과의 친밀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교육활동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이, 만고의 진리처럼 가슴에 뚝 떨어져 와 닿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내 인생에서 정말 좋은 하루였습니다.
 
 
 
* 주(註)1: 글속에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가명(假名)이다. 재윤이는 개인사정으로 그날의 체험학습에 함께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에는 자기를 꼭 데려가 달라고 수시로 졸라대는 통에 조금 성가신 느낌도 있다. 웬만해야지…. ^^ 어쨌든 지금은 전체에 잘 동화되어 재미있게 지내고 있어 안심도 되고 보기도 좋다.
* 주(註)2: 래포(rapport)란 ‘마음의 유대’란 뜻으로 서로의 마음이 연결된 상태, 즉 서로 마음이 통하는 상태를 뜻한다. 래포가 형성되면 호감ㆍ신뢰심이 생기고 비로소 깊은 마음속의 사연까지 언어화 할 수 있게 된다. 래포를 형성하는 방법으로 미러링(Mirroring)과 백트랙킹(Backtracking)등의 방법이 있는 데, 전자는 내담자의 자세 및 동작을 거울 속에 비친 모습처럼 그대로 따라하는 방법이고, 후자는 내담자가 말한 것 중의 중요한 부분을 맞장구를 치며 반복하여 유대를 강화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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