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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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가지세요"
  • 소유진
  • 승인 2010.05.0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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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

나를 거쳐 고통의 도시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길 잃은 무리 속에 들어가노라.

정의는 높으신 내 창조주를 움직여,

성스러운 힘과 최고의 지혜,

최초의 사랑이 나를 만드셨노라.

내 앞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들뿐,

나는 영원히 지속되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제3곡 첫 머리 지옥의 문 위에 쓰인 글로, 소위 지옥문 글귀라고 합니다.

그 이전 신곡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인생길의 한 중간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런 길을 헤매다가 베르길리우스를 만나 지옥부터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길을 노래하는 단테의 신곡 중 제가 처음 소개한 지옥문 부분이 많은 사람들의 문학적 영감과 철학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지옥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을 간단하게 적어봅니다.

첫째, 지옥은 현실세계에서 벗어난 지하라든가 하는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가 사는 지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첫 구절에서 그 부분이 나오지요.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다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합니다. 그러니 지옥은 현실세계와 동일한 평면에 있다는 것이지요..

우선 이것을 명심한 다음에, 이 지옥문을 통과하면 나오는 것은 '고통의 도시'와 '영원한 고통'과 '길 잃은 무리'(멸망과 버림받은 무리를 의미합니다)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세 가지가 지옥의 모습입니다.

원문을 우리말로 해석하기에 고통으로 역자가 번역하였지만 일본어 번역본에는 '슬픔과 고뇌의 세상'  '영원한 고통과 고뇌' '버림받은 무리, 멸망해 가는 무리'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옥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 한가지 '희망'을 버리라고 합니다. 이 지옥문의 마지막 싯귀가 바로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로 되어 있거든요..

결국 지옥이란 일체의 바람, 희망이 없는 곳이라는 해석이 됩니다.

단테는 지옥이란 희망이 전혀 없는 절망의 장소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옥은 우리가 사는 같은 평면에 존재하지요..

따라서, 둘째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절망은 아니더라도 희망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지옥에 가까이 다가서는 셈입니다. 만약 완전히 절망한다면 살아 있어도 지옥에 이르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정말로 절망한다면 그것이 바로 생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지하로 떨어지지 않아도 관계없고, 단테의 말대로라면, 모든 희망을 남겨 두고 들어가는 곳이 바로 지옥이지요..

따라서, '희망을 가지'는 것은 단순히 심리학적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라는 술어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술어와 같으며, '희망'은 인간 존재의 존재론적 증거이며 존재론적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옥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바로 단테는 '희망'이 없는 곳 , 바로 그곳이 지옥이고 그런 지옥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희망'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얼마 전부터 신곡과 그에 따른 해설서와 강의를 듣는 중에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 공부한 내용과 제 나름의 생각을 엮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절망하지 마세요.. 절망하는 순간 당신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희망'을 가지세요. '희망'을 버리는 순간 당신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원문출처 및 참고도서:

단테 신곡 /열림원

단테신곡강의/안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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