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정 국기를 문란시키고 있는가?
상태바
누가 진정 국기를 문란시키고 있는가?
  • 박인규
  • 승인 2013.08.09 06: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론] 박인규 /'시민과대안연구소' 소장
444.jpg
 
비열한 정치공작과 민주인사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유신체제하의 중앙정보부와 5,6공화국 시절의 국가안전기획부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데, 이른바 국가정보원의 불법 정치개입 사건이 그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에 독재정권 유지에 일익을 담당했던 음습한 이미지를 걷어내고 국가안보와 국민이익에 복무하고자 이름까지 바꾼 국가정보원이 과거의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했던 정보기관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정보는 국력’이 아니라 다시금 ‘정보는 권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누구보다 정보기관의 전횡과 악행에 피해를 받아온 야당은 본능적으로 일찌감치 이 사건을 국기문란 행위로 보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 왔으며, 전국적으로 손에 손에 촛불을 든 국민들의 분노가 높아가고 있고, 각계각층 인사들의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퍼져 가고 있다. 국가정보원의 불법 정치개입 의혹을 파헤치기 위한 국회 국정조사 특위가 특위위원 문제에 대한 여야간의 이견으로 구성부터 난항을 겪더니 이제는 증인문제로 발목이 잡혀 허송세월하다가 국정원 개입의 핵심 관련자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등에 대한 증인 채택 합의와 국정조사기간 연장으로 이제 겨우 진상규명을 위한 첫 발을 떼게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통성이 결여되거나 약한 정권은 합법적인 폭력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시켜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한 정권하에서 국민의 주권은 사라지고 국민은 통치와 공작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부당한 정권은 국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고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소수의 감시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수용자를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인 판옵티콘을 제안하였고, 미셀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사회의 특징을 한 보이지 않는 권력자가 대중을 감시하는 체제로 설명하면서 감시의 원리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규율 사회의 기본원리로 탈바꿈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저 찬란한 6월항쟁을 통해서 쟁취한 민주주의와 국민의 신성한 권리가 불행하게도 권력자에 의해 유린되는 과거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국민들은 국정원이 대선 때 벌인 댓글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정치권은 물론 국민에 대한 정보를 일상적이고 광범위하게 수집해 왔고 이를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더욱이 국정원이 벌인 대선개입은 그 자체가 불법일 뿐만 아니라, 정부여당의 나팔수가 되어 국가기밀 문서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멋대로 기밀 해제하여 공개하는 수준이라면 그야말로 국기문란(國紀紊亂)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여야는 물론이고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서 경쟁적으로 국기문란을 언급하고 있다. 그 말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가 유지되고 발전하는 데 필요한 법도와 질서가 지켜지지 않고 뒤죽박죽되어 어지럽다“는 것이다. 야당은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국기문란으로 보고 있고, 박근혜대통령은 최근 국정원 정치개입에 대한 야당의 입장 표명 요구는 외면한 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실종사건과 관련해 "중요한 사초가 증발한 전대미문의 일은 국기를 흔들고 역사를 지우는 일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며 역시 국기문란을 말하고 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국기문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누가 국기를 문란시키고 있는 것일까? 애초부터 두 사건은 전혀 별개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의 사건처럼 얽혀 있다. 아니 얽히게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올바를 것이다. 한마디로 추악한 치부를 감추려는 정권과 그 비호 아래 조직을 지키려는 국정원의 열망이 사건의 본질이다. 최근 국가정보원이 노래를 부르고 정부여당이 춤을 추고 있는 NLL논란은 국정원의 정치개입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임을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이러한 행위야말로 국기문란을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국정원 대선 불법개입, 경찰의 축소·은폐 및 허위수사 보고,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불법 유출 및 대선 활용 그리고 국정원에 의한 정상회담 회의록 불법공개 등이 구체적인 국기문란 행위이다. 그러니 이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실종사건은 검찰 또는 특검에 수사를 맡겨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논란의 출발점인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은 여야간의 정쟁이 아니라 점차 거세게 타오르는 촛불과 그 속에 담긴 민심을 반영하여 한 점 의혹도 없이 진상이 밝혀져서 무너져 내란 국가 기강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국정원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출발점이 될 것이며 국민들 역시 정보기관의 감시가 아닌 보호아래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