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의 시대, 적절한 균형
상태바
접속의 시대, 적절한 균형
  • 정민나
  • 승인 2013.08.22 1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학의 향기] 정민나 / 시인
IMG_20130814_1.png
 
지금은 ‘문화영역이 상업영역에 완전히 흡수된다.’는 흔히들 말하는 접속의 시대이다. 나는 이 접속의 시대를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본다. 인간의 실물 영역이 꿈의 경험으로 만나 균형감을 복원하는 접속.
 
 
 
 
 
사람들은 근방에서 공을 던지고 게를 잡고 물을 튕기고 헤엄을 치고 잠수를 하고 미역줄기를 뜯어올리고 젖은 몸을 반짝이고 따끔따끔 살을 태우고 기우뚱 물에 빠지고 우뚝 서고 후리후리 젖은 머리를 비우고
 
멀리 비양도를 바라본다
 
누가 목욕을 하는지 어깨 아래 안개 커튼을 치는
 
비양도는 부드럽게 걸어갈 수 없는 모래
 
온종일 흘러내리는 안개이지만 뾰족한 바위와 캄캄한 구름 너머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의 한가운데
 
돛단배가 가로지르고 이마 위 구르는 햇살 저지선을 긋는 바다가 비양도를 사이에 두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비양도를 문지르는 손등이 미끌거려도 모래로 땅굴을 파거나 모래 속에 몸을 묻거나 모래집에 누운 채 바라보는
 
비양도는 태양의 파편을 깔아놓고 기다린다 바다와 하늘 사이 중심을 잡고
 
세계관이 근방인 사람과 근방을 탈출하려는 바람과 근방이 전부인 하느님을
 
고무보트로 건져올리고 파라솔을 치고 쌀을 씻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감아올린다
 
 
필자의 시 -<비양도> 부분
 
그래서 접선지, 그 섬으로 떠나는 날은 ‘가방끈도 산뜻한 녹색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모래로 땅굴을 파거나 모래 속에 몸을 묻거나 모래집에 누운 채 바라보는 비양도는 어깨 아래 안개로 커튼을 치는 신비한 곳이다. 쉽게 걸어갈 수 없는 모래, 근접할 수 없는 신의 성채이다. 뾰족한 바위와 캄캄한 구름 너머에 있는 그 곳을 넘어가는 것은 꿈같은 돛단배일 뿐이다. 이 곳과 그 곳 사이에는 저지선을 긋는 바다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태양의 파편을 깔아놓고 눈앞에 보이지만, 가질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그 곳에 가고 싶어 한다. 땅굴을 파거나 파라솔을 치거나 쌀을 씻으면서 그 곳을 바라본다. 그저 꿈 바래기의 소극적 자세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찾아 나서고 건져 올리고 시간의 한 가운데 띄우기도 한다. 사람들은 연약한 개인과 존재의 맥을 짚어 주는 신의 접속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이곳과 대비되는 것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세계관이 근방인 사람들을 건져 올리는 비양도 즉, 열린 사회(사회성)이다.
혹자는 “개인이 하나의 독립된 자아로서 존재하면서도 외부 세계와 합치되는 적극적인 자유의 상태는 없는가”라고 묻고 있다.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하는 시는 창조적 상상력으로 꿈과 현실의 경계를 혼재 혼융하는 경우가 된다. 접속은 사유하는 사람과 행동하는 사람이 만나는 지점.
 
무라카미 하루키의 중편 소설 ‘잠’은 안정된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아내와 엄마라는 존재로 살던 여자가 어느 순간부터 잠을 자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17일간 단 한숨도 잠을 자지 못하는데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른다.
 
우리 몸의 메카니즘은 ‘잠을 통해 어떤 편향된 현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데, 여자는 자신의 쏠림의 경향이 주부의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특별할 것도 없는 자신의 경향을 바로 잡기 위하여‘잠’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여자는 굳이 그 불면증에 쫒기지 않으리라 마음 먹는다. 오히려 깨어 있는 시간을 선택하고 그 시간을 ‘확장의 시간’이라 명명하며 초초해 하지도 않는다.
여자에게 불면증이 올만한 외부적인 요인은 보이지 않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는 그녀의 또 다른 자아일 수 있는 그림자를 생각한다.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자발적으로 사유할 만한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잘 나가는 치과의사와 문제가 없는 가정에서 자동 시스템적인 안일을 누리고 있었다. 책을 읽지 않아도 되었고, 겹겹의 세상과 그 사이사이의 감정이나 느낌을 갖지 않아도 일상은 충족되었다. 안전하게 채워지는 시간 속에서 여자는 단순 반복의 기계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정해진 프레임과 그 안에서 작동되는 안정적인 데이터는 표면적으로 여자를 뒤흔들만한 요인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찾아온 불면증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뒤흔들고 바꿔놓는다. 비록 내면에서부터 시작된 변화였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주변 인물을 대하는 심리적 상태 시계추 같던 생활태도가 변해 버렸다.
우주를 떠도는 미아처럼 변한 여자가 한 밤중 항구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 그녀를 전복시키려고 양 옆에서 그녀를 흔들어대던 그림자는 무엇인가? 하나는 각성하는 내면의 그림자요 하나는 일탈을 경고하는 현실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내 시에서 나는‘비양도’라는 카오스와 미지의 세계를 사유와 묘사의 이미지로 해방 승화시킴으로써 부드러운 비양도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화석화된 이 세계를 확장시키고 그것을 무한한 저편의 세계와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객관적이고 규범적인 일상에 상상적 직관의 언어로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일은 내 스스로 미적 감동을 선물 받는 것과 같이 기쁜 일이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