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꽃게가 얼마나 많던지 뿔에 다리가 걸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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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꽃게가 얼마나 많던지 뿔에 다리가 걸려서…."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10.08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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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섬마을조사단> (5) 덕적도 소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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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녹색연합’과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인천in>이 함께 꾸리고 있는 <인천섬마을조사단>이 10월 5일, 6일 1박2일로 덕적면에 있는 덕적도와 소야도를  다녀왔다.
 
인천에는 약 170여개의 섬이 있다. <인천섬마을조사단>은 2013년 한해동안 다섯 차례 인천에 있는 섬을 둘러보는 계획을 세웠고, 이번 섬 방문으로 한해 일정을 모두 마쳤다. 그동안 이들은 교동도, 백령도, 서검도 미법도, 승봉도를 다녀왔다. 이번 섬조사에서는 두 팀으로 나뉘어 소야도와 덕적도에 대한 자료를 미리 공유한 다음, 섬에 가서는 시간이 닿는 대로 섬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주민을 만나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덕적’은 ‘깊고 큰 바다에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큰물섬’이라고 전해지며, 여의도의 4.5배쯤 되는 큰 섬이다. 이것이 한자화해 ‘덕물도(德勿島)’로 되었다가 다시 덕적도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덕적도를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있으며, 군도의 주요 도서 사이에는 소형 어선으로 내왕이 가능하다.

덕적면은 인천시의 서남쪽 약 8.2km 지점에 있으며, 덕적도 소야도를 비롯한 유인도 8개, 무인도 34개 등 모두 4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농업으로는 주로 쌀을 생산하고, 이밖에 보리 고구마 마늘을 생산한다. 근해는 황해의 중요 어장의 하나로서 조기 새우 갈치 우럭 꽃게 등이 어획되며, 연안에서는 바지라기와 백합이 채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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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에 있는 서포리 해변 아침 풍경.
 
 
군도의 중앙에 있는 덕적도는 서포리해수욕장이 유명하며, 이밖에 기암절벽의 암석해안이 새로운 관광명소로서 인기를 얻고 있다. 서포리해수욕장은 1957년에 개장됐고, 1977년에 서해안의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약 2km에 걸쳐 펼쳐진 완만한 모래밭 뒤로 노송들이 우거져 있으며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덕적군도의 기후는 해양의 영향이 크지 않아, 기온의 연교차가 비교적 큰 대륙성기후의 특징이 나타난다. 특히, 겨울철에는 북서계절풍이 강하고 눈이 많이 내리며, 같은 위도의 동해안에 비하면 연평균기온이 2~3도 정도 낮은 편이다.

덕적도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다가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번갈아 점령함에 따라 소속이 바뀌었다. 1486(조선 성종 17) 인천도호부에 이속되었으며, 1914년 부천군에 편입돼 면사무소를 개설하였다.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됐다가,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삼국시대부터 황해 해상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수군을 두어 지키게 했고, 말을 기르는 국영 목장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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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에서 나무배를 만들던 강명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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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작은 인천'으로 불리던 덕적도에는 당시 번성하던 흔적이 곳곳에 있다. 사진은 당시 '공동목욕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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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골목을 둘러보는 <인천섬마을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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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병원이었던 건물과, 덕적성당을 둘러보고 있다. 덕적초중등학교에 근무하는 정인숙씨가 섬을 안내하고 있다.

 
덕적도에는 서포리해수욕장, 밧지름해수욕장, 능동자갈마당, 비조봉 등 볼거리가 많다. 덕적도 구포에서 성황당고개를 넘어가면 나타나는 북리어항은 아직도 당시 민어파시의 풍경을 보여주는 주택, 창고, 목욕탕, 휴게실, 공장 등의 건물이 아직 남아 있다. 특히 지금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마을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극장의 존재(애관극장, 1960년대까지 존재)는 당시 북리의 파시가 어떤 규모였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2013년 4월, 인천시는 덕적도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건설하기 위해 본격적인 에코아일랜드 조성사업을 추진해 나간다고 밝힌 상태다. 이는 2012년말 GCF사무국을 유치한 이후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에 걸맞는 인천시의 역할론이 강조되고 있어, 신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덕적도를 지속가능한 미래의 섬 에코아일랜드로 조성하려는 시의 계획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일환으로 2012년에는 태양마을 지역에 태양광주택을 보급하였고, 친환경 이동 수단이 전기자전거 10대를 공급해 운영하고 있다.

소야도는 덕적도 동남쪽 0.6km 지점에 있으며,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46km 떨어져 있다. 섬의 모양은 대체로 북서~남동 방향으로 긴 섬이며, 북부의 산지(높이 106m)와 남부의 산지(높이 143m)가 연결돼 이루어져 있다. 섬 주변에는 간석지가 넓게 발달하며, 북동해안의 간석지 끝에는 암초열이 형성돼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보리 콩 감자 고구마 고추 마늘 참깨 등을 생산하며, 120가구 26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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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도 마을에 있는 골목길.

전체적으로 구릉의 기복이 심하고, 남동부와 남서부 해안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넓은 간석지로 둘러싸여 있다. 북동부 해안의 간석지 끝에는 암초열이 형성돼 자연적인 방조제 구실을 하며, 전체적으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섬 주위에는 천연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바다낚시터와 피서지로도 이용되며 뗏부루해수욕장과 전설이 깃들여 있는 장군바위가 유명하다. 연안부두에서 여객선으로 덕적도까지 가서 소야도행 배로 갈아타야 한다.

신라 무열왕 때 당나라 소정방의 대군이 이 섬에 들어와 나당연합군을 편성할 때 소야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소야도 북악산 기슭에는 당나라군사의 전지였다고 전하는 ‘담안’이라는 사적이 남아 있다.

주요관광자원으로는 뗏부루 해수욕장, 죽너골, 작은해변 등이 있다. 특히 죽너골은 영화 <연애소설>의 촬영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뗏부루에서 북쪽으로 1km 걸어가면 있는 해변으로 깨끗한 모래와 소나무숲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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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문을 닫은 덕적초교 소야분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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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둘러보는 <인천섬마을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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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은 소야분교에서 바라본 바다.
 
 
또한 소야도와 덕적도를 잇는 연도교가 건설될 예정이다. 올해 초, 인천시는 덕적도~소야도 간 연도교 기본 및 실시설계를 끝내고 2014년에 착공해 2015년말에 완공할 계획이다. 길이 1.16km의 연도교는 총사업시 290억원(국비 232억원, 지방비 58억원)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인천섬마을조사단’은 덕적도에 도착하면서 두 팀으로 나뉘어 덕적도와 소야도를 살펴 보았다. 덕적도에서 작은배로 갈아탄 팀은 소야도에 도착해, 최창립 노인회장(74)을 만나 섬 이야기를 들어봤다. 소야도에서 태어난 최씨는 오랫동안 배 사업을 한 분이다. 한편 덕적도 팀은 북리와 진리를 비롯해 섬 곳곳을 살펴 보았다. 저녁 때 다시 합류한 조사단은 나무배를 만드는 조선공이었던 강명선씨(72)를 만나 배 만들었던 이야기와, 몇 십년 전 파시로 이름을 날렸던 덕적도 이야기를 들었다.
 
최창립 노인회장은 "뭍사람들이 섬에 놀러오면 쓰레기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무방비상태로 땅에 묻어놓고 가는데, 참 어이가 없다. 다행히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마을사람들이 한 포대씩 쓰레기를 수거한다. 그래서 다리가 생기는 일이 껄쩍지근하다. 사람들이 많이 오면 민박도 좀 되겠지만, 산에는 아무것도 안 남을 수도 있다"며 걱정스러운 점도 있다고 말했다.
 
강명선씨는 "배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들어오면 배에 따라 공사기간이 다르지만 대개 두달 반에서 석달 걸렸다. 일곱명에서 열명 정도가 달라붙어 모두 수작업을 했다. 그때 농사 짓는 사람이 보리밥을 먹으면, 수산업을 하는 사람은 쌀밥을 먹을 정도로 사는 형편이 달랐다. 배를 다섯 척 부리는 사람은 거의 40명 되는 선원을 부렸다. 7,80년대 덕적도는 유권자가 2천명이나 됐었다. 그러니까 목조선이 사양길이 된 지 30~40년 정도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무는 쪼개서 하나하나 붙였다. 손실을 적게 하려고, 최대한 재료를 아끼면서 배를 만들었다. 그 많던 고기가 다 없어진 것은 남획을 해서다. 예전엔 우리가 양자강 하류까지 갔었다. 걔네가 요새 우리 바다까지 오는 것처럼 우리도 그랬다"며 "여기 북리는 '작은 인천'이라 부를 정도로 번성했다. 전국 곳곳에 농업박물관은 많지만 어업박물관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와서 취재하면 조금이라도 뭐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사라진 덕적도의 흔적을 복원하는 일도 꼭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굿도 많이 했다. 섣달그믐날 엄동설한에 제를 올릴 때는 '밥 하는 사람'은 바닷물에 목욕재개하고 준비했다. 그만큼 열과 성의를 다해 제를 올린 것이다. 지금 같아선 가혹행위라고 입건할 일이다.(웃음) 연평도에는 조기파시, 덕적도에는 민어파시가 있었다. 전라도쪽에서 배가 올라오면 500척이나 됐다. 배들이 접안하면 배에서 배로 이쪽 선창에서 저쪽 선창까지 갔다. 꽃게는 먹지 않아 다 내다버렸다. 바닷가에 버려진 꽃게가 얼마나 많은지 뿔에 다리가 걸려 못 나갈 정도였다. 예전에 내다버리던 걸 요샌 다 먹는다, 참.(웃음)"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한없이 흥미롭고 진지하다. 이야기 곳곳에는 이들의 개인사를 넘어 질곡많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애틋함과 서글픔이 묻어난다. 이들이 풀어낸 소중한 이야기는 <인천섬마을조사단>이 내용을 정리하는 대로 <인천in>에 실린다.

‘인천섬마을조사단’은 이번 덕적도와 소야도를 끝으로, 2013년 섬 방문을 모두 마쳤다. 이들은 연안부두에 도착해서 다섯 차례의 섬 방문을 되돌아보고, 평가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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