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의미 찾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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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의 의미 찾기 Ⅱ
  • 김국태
  • 승인 2013.10.0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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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인천교육 미래찾기(28)
  • 인천시민들은 인천교육의 변화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변화로 가는 길을 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변화의 지향성에 대한 공론이 부족한 탓입니다. 변화하려면 공유할만한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미래도시를 꿈꾸는 인천에서 인천in’은 교육을 화두로 끌어안고 변화의 방향에 대해 먼저 고민하려 합니다. 그 시작으로「인천교육연구소」와 함께 인천교육에 대한 고민이 담긴 칼럼을 연재합니다. 매주 수요일에 교육현장에 발 딛고 선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더욱 낮은 자세로 귀를 기울이고 가감 없이 시민들께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인천교육의 공론장이 생긴다면 미래의 인천교육은 시민들의 열망을 담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in’과 「인천교육연구소」가 함께하는 '인천교육의 미래찾기'에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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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의 의미 찾기 Ⅱ

                                                                                                                               김국태(인천교육연구소, 부평초)


김샘은 지난 한학기의 수업을 떠올려 본다. 어떤 기억과 이미지를 떠 올릴 수 있었다. 수업시간에 느껴지는 아이들의 따분함, 지루함, 반복, 문제풀이 등 그보다 더한 기억도 있다. 아이들과의 수업대화도 지시, 질문, 칭찬과 통제의 말 뿐이었다. 수업을 준비하면서 했던 행위들은 어떤가? 수업목표, 활동안내, 모형의 선택, 학습의 계획만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1학기동안 했던 세 번의 공개 수업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시각적 자료를 위한 파워포인트를 제작하고, 효율적·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아이들의 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스킬의 고민이었다. 여전히 가르침은 기술적인 교수법에 집착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가르침은 방법적 기교를 정교화하고, 기술적 수단을 첨단화 하며 수업강의연출의 기술로 간주했었다.


그런데 회상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가르친다는 것이 미리 계획된 교육과정을 바로 전달하거나 정리되어 적혀 있는 교과서나 지도서의 정보는 전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가르치는 일의 생생함이 사라졌다. 더 많은 고통과 갈등, 지적 활동의 기쁨, 불분명성과 모호함 등과 같은 인간적인 판단과 에너지, 그리고 열정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교사의 가르침을 기술로 보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의 삶과 함께하고, 교감하는 면에서 멀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지금의 어려운 입시 위주의 교육현실에서 아이들의 잠재력을 일깨워주고, 아이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은 무척이나 힘들기 때문이다. 김샘은 뭔가 확실하고 구체적이며 믿을 만한 것에 기대고 싶어진다. 뭔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 즉 학습 계획안이라든가 교실을 확고하고 엄격하게 학습을 통제하는 방식 같은 것으로 후퇴하게 된다. 자신이 완전히 지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김샘도 다른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교직을 택했다. 오랜 세월 김샘이 만났던 교사들은 거의 대부분 어느 정도는 이런 희망을 품고 교직에 들어선다. 그러나 가르치는 삶 속에서 그것을 충분히 실현하는 교사는 몇 되지 않는다. 그저 김샘처럼 구조화된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존재로 남겨진다. 결국 통제와 효율성이 중시되는 절차 중심의 공간에 안주하게 된다. 이런 현실에서 김샘은 관료주의적 톱니바퀴의 부속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의 가르침에 대한 담론을 뛰어 넘는 나름의 담론을 정리하여 자신의 학교 경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싶다.


기술이 아닌 관계로 보기


지금까지 가르침이 지니고 있는 문제는 수업을 방법적 기교와 기술적 수단을 활용하는 기술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사실 가르침은 교사의 철학과 혼, 평소의 가르침을 통해 학습자와 함께 지향하고 싶은 가치와 신념이 녹아있는 학생과의 만남의 방식이자 학생과의 교감하는 활동이라고 지식생태학자 유명만 교수는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훌륭한 가르침은 하나의 테크닉으로 격하되지 않는다. 훌륭한 가르침은 교사의 정체성과 성실성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지적한다. 기술로서의 가르침을 고민했던 김샘에게 여전히 가르침은 교사 혼자만의 독주나 모노 드라마일 수 밖에 없다. 학습자와 함께 추는 협연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학습자가 전제되지 않은 가르침과 다양한 기법적 프로그램은 어쩌면 일인 연기일 뿐이다. 잘 가르치기 위한 방법, 기법, 기술의 개발이라는 한 가지 독립변수를 고민할 뿐이다. 가르침의 장면에 관여할 수 있는 수많은 학습자들과의 역동적인 관계를 고려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르침의 핵심에는 교사의 일방적인 기술적 노력보다는 학습자들과 커뮤니케이션 함으로써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이제 가르침은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기술적 노력보다는 학습자와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려는 관계론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업(業)을 생각해 보자. 한자의 업이라는 단어는 초(艸), 양(羊), 인(人)이라는 세 가지로 구성된다. 즉, 가르치는 사람(人)이 학습자(羊)에게 삶의 목적지나 방향이 되는 풀밭(艸)으로 데리고 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어쩌면 풀밭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함께 도달하고 싶은 목적지자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을 통해서 함께 공감하는 상상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교사에게 업의 본질은 이제 단순히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 소통의 공감지대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가르치는 일은 배우는 사람과 소통하는 과정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공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등산을 하면서 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산 아래부터 산 중턱을 거쳐 오르는 여정이 있어야 한다. 긴 여정을 통과해야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김샘의 가르침은 산 정상에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올라가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손짓을 하면서 이리로 오라고 일방적으로 방향을 제시하는 과정이었다. 진정한 가르침은 산 정상에 오르기까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손을 맞잡고 서로가 서로를 밀고 끌어당기면서 함께 산 정상에 오르는 여정에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때로는 힘듬의 고통을 함께 공유하는 관계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여정일 것이다.


배움으로 가르치기


교사에게 가르침은 또한 배움의 과정이다. 자신이 이제까지 체험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학생들과 나누면서 더욱 정교하고 독창적인 지식체계를 구축하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가르침은 배움이기에 배움을 통해 가르침은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다. 배움이 없는 가르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들뢰즈는 가르침을 학생과 ‘함께’하는 교사 자신의 ‘배움’ 행위로 정의한다. 그에게 가르침의 행위는 “나처럼 해봐”보다는 “나와 함께 해보자”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창조 행위인 배움은 특정한 형태의 배움과 가르침의 관계를 전제하는데 이 관계에서는 배움이 가르침의 의미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배움의 가치와 역할이 가르침의 그것보다 더 우선하고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교사들에게 ‘공부를 스스로 재미있어 하나요?’ 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면 과연 몇 퍼센트나 손을 들어줄까? 평균적으로 10%를 넘어서질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생각하는 교사 스스로 학습을 재미없어 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아니면 꼭 교사 스스로 배움을 즐거워해야 하는가? 교사가 공부를 재미있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가르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한다.


이 질문들에 대하여 수업비평론을 강조하는 이혁규 교수는 프랑스의 교육학자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소개하며 가르침의 새로운 출구를 모색한다. <무지한 스승>에서 소개된 조제프 자코프는 1800년대 초에 정치적인 상황으로 프랑스에서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런데 자코프 자신은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르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기묘한 교수학습 상황에서 자코프는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만으로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훌륭하게 말하게 하는 실험에 성공한다.


이 실험에 기반하여 교육학자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 대하여 논한다. 무지한 스승이란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지만 어떤 앎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앎의 원인이 되는 스승을 말한다. 즉, 무지한 스승은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지도 못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적절한 교수방법도 알지 못함에도 학습자에게 훌륭한 학습이 일어나도록 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이런 무지한 스승은 지금의 우리 학교 현실에서 너무 익숙한 계몽적 교사와 너무와 판이하게 다르다. 그렇다면 무지한 스승은 도대체 어떻게 학생들에게 성공적인 학습이 일어나도록 만들었을까? 그가 가르친 것은 구체적인 학습 내용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누구나 스스로 배울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환기시키고, 배우는 것이 가치 있다고 학습자의 의지를 각성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학교 교육에서 교육과정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목숨을 거는 역할은 어쩌면 휴먼로이드 로봇이 인간의 능력을 곧 뛰어 넘을지 모른다. 이런 시대에 인간 교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유일한 가르침은 바로 배우는 삶이 가치 있고 추구할 만한 것이며, 그런 삶을 살도록 학생들의 의지를 각성시키는 것이 아닐까? 학생들에게 앞으로 잘 살기 위해 지금의 삶은 의미없게 희생되어도 좋다는 논리는 버리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지금 배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이제 교탁과 책상을 경계로 학생들에게 억지 배움을 강요하는 기술의 가르침보다는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능력을 믿고 배움의 의지를 작동시키기 관계와 소통의 가르침을 택할 필요가 있다.


김샘은 마지막으로 자문해 본다. “나는 교과를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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