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장소성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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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장소성에 대한 성찰
  • 정민나
  • 승인 2013.10.1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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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정민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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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장소(place)”라는 사전적 의미는 형상, 물질, 색, 재질을 가진 ‘구체적인 구성물’이다. 그것이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지리적 위치나 공간이라고 볼 때 공간에 의하여 작용을 받고, 공간에 대한 작용을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임을 보여주는 작가가 소설을 쓰는 김중혁이다.
그는 와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1F/B1>, <유리 방패와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등을 통해 공간성에 녹아있는 인간의 관계를 구체화시킨다. 즉 장소성을 통해 인간과 사회적 상징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장소의 특성은 중심, 경계, 방향, 위요(圍繞·둘러쌈)성, 축 등을 들어 말할 수 있는데 김중혁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장소는 구체적으로 공간의 한정과 집중 및 방향성의 조절을 통해 인간의 거주를 탐색한다.
장소 형성의 과정에는 ‘중심’ 이미지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중심’은 모든 방향에 대한 기본적인 위치로서 혼돈의 상태에서 질서의 상태로 옮겨진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중심’ 이미지는 장소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건물 관리자는 자신의 몸에 집중하면 안 되는 거야 건물의 리듬에 자신을 맡겨야지 그래야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거든 건물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진동만으로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낼 수 있어야 해
 
― 김중혁 「1F/B1」 부분
 
작품에서 어떻게든 네오타운의 가치를 떨어뜨려 사람들을 빠져나가게 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비횬개발의 음모에 가담하게 되는 구현성은 한때 네오타운의 중심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중심(구현성)이 흔들리자 네오타운의 번영은 급속도로 쇠락해 진다. 이것은 그의 또 다른 작품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에서 화자의 유일한 스승이자 동료였고 실처럼 연결되어 있던 삼촌이 떠나자 그동안 화자 자신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세계가 텅 비어지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나는 갑자기 미래라는 것이 두려워졌다. 무엇인가가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이 그 때 처음 들었다.” 지도를 그릴 때마다 그 중심에 ‘나’와 ‘나의 집’을 먼저 그렸던 작중 인물의 말을 빌려 우리는 ‘중심’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중심’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자신을 궁극적인 것으로 여겼던 인물들이 어떤 객관적 과정을 매개하는 영매(통로)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작품 곳곳에서 밝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말 할 수 있는 것이 ‘경계’에 대한 사유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층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끼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그저 사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하 1층과 1층 사이, 1층과 2층, 2층과 3층…… 층과 층 사이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슬래시가 없어진다면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을 겪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미미한 존재들이지만 꼭 필요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누군가 저의 직업을 물어 온다면 저는 자랑스럽게 슬래시 매니저(Slash Manager)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 「1F/B1」 부분
 
공간에 어떤 형태가 드러나게 되면 주위 공간에 차이를 주게 된다. 그 때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하면서 그 경계의 단절성은 주변 공간에도 단절성을 확장시킨다. 그와 같은 원리로 영역의 경계가 영역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갈라놓으면 갈등과 대립, 모순 등을 드러내게 한다. 속도와 변화로 요약된 도시를 해체하려는 작가의 전략이 길트기의 나날로 이루어진다고 볼 때 ‘길’은 유랑과 모색, 이주와 갱신이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경계의 공간이다.
<유리 방패>에서 청년 실업자인 ‘나’와 ‘M“의 지하철에서의 퍼포먼스를 통해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어내는 작가의 방식이 이제까지 중심이 되었던 주제에서 벗어나 변두리 형식에 포섭되는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커룸에서 잠을 자다 지상으로 올라온 거리의 예술가에게 다큐멘터리를 찍자는 제의가 오는 것처럼 실패에 중독된 인간들이지만 단 한 번 발상의 전환으로 실패중독자들을 위로해 주는 입장이 되는 그것은 ‘어떤 공간’이 ‘특별한 장소’로 변형되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 한 공간이 특정인에게 속한 영역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주변 공간과 차별화 되어야 하는데 <유리방패>의 주인공 ‘나’와 ‘M’은 가장 구체적인 방법(일상적인 공간인 지하철에서 돌연히 행하는 퍼포먼스)으로 명확하게 자신들의 경계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장소는 그것을 포함하는 더 큰 공간 속에 위치한다. 장소성은 보다 넓은 전후 관계에서 존재함으로 개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장소는 방향을 내포한다. 방향은 특정한 지점으로 이동을 수반하며 진행 방향과 같은 벽을 따라가면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내 손에는 지도가 있었지만 그건 내가 그린 지도였기 때문에 나를 믿고 지도를 믿을수록 길을 찾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나는 길을 찾으면서도 계속 지도를 그렸고 지도는 점점 오리무중, 첩첩산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 지도가 위험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 부분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부분
 
인간이 던져진 존재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길 위에 던져진 존재이다. 이렇게 던져진 상태에서 길 찾기 혹은 길트기로 이어지는 여로가 곧 삶의 행로인 것이다. 길을 열고 길을 채워 나가는 길 위에서의 방황과 번뇌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형성하고 인간 삶의 본질에 값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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