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정의로의 변화- 학교가 변해야 한다(2)
상태바
회복적 정의로의 변화- 학교가 변해야 한다(2)
  • 이수석
  • 승인 2014.02.05 0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동기획 - 인천교육미래찾기(40)

22.jpg

응보적 정의에서 회복적 정의로


상황1 학생과 교사, 그리고 응보적 정의

교사1 : “민신홍! 정말 예쁘구나. 그런데 치마가 왜 이러냐? 얼래, 너 화장도 했네…. 화장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니? 밥은 먹었냐?”

학생1 : “선생님, …저 예쁘지 않아요? 지각하지 않았잖아요? ……솔직히 일찍 오면 선생님들에게 붙잡혀서 이렇게 야단맞잖아요. 저도 차라리 …지각할까요?”

교사2 : “교혁아~. 교혁이는 점점 더 멋있어지는데? …네 바지는 왜 그 모양이냐? 터지겠다! 이놈아, 제대로 앉기냐 하냐? 야, 이교혁! …머리가 왜 이렇게 기냐? …그리고 박종진! 너 이리와 봐! 손가락 줘봐! ……이 새끼! 너 또 담배 피우고 왔구나.”

학생2 : “왜요? 제 머리는 규정대로에요. 다른 선생님들은 그냥 넘어가는데, 선생님만 뭐라 그러시는 거예요. …선생님은 학교 다닐 때, 저처럼 해 보지 않으셨어요? …하긴 공부를 잘하셨으니 이럴 새도 없었겠네요.”

학생3 : “담배 안 피웠어요. …손가락에서 나는 냄새는 담배 냄새 아니에요. …담배 피는 거 못 보셨잖아요.”

교사1 : “너희들 모두 이리 오세요. 은진이는 저 쪽 현관 앞을 청소하고, 창수하고 교혁이는 저쪽 쓰레기 버리는 곳을 정리정돈하고 가세요. 그리고 종진이는 학생부실로 와!”

학생들 : “에이, 재수 없어. …이게 뭐냐? 차라리 낼부터는 지각하자. 학교 오면서부터 스트레스 받네. 게임방 들렸다가 수업시작하고 오자.”


상황2 학생과 교사, 그리고 회복적 정의

교사들 : “애들아 안녕!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어제보다 조금만 더 행복해지세요.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학생들 :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선생님도요.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교사1 : “신홍이 안녕!~ 오늘은 예쁘게 화장도 했구나? ……신홍이의 다리는 참으로 날씬하구나. …그런데 치마폭이 너무 좁은 거 같은데, …불편하지는 않니? …지각하지 않아서 좋구나. 너의 미모를 지키려면 아침밥도 꼭 먹어야 한데. …사랑합니다. 자, 하이파이브!”

학생1 : “…안녕하세요. 아, 네에. …사랑합니다. 네에, 하이파이브!”

교사2 : “교혁아~. 교혁이는 점점 더 멋있어지는데? …사랑합니다. 자, 하이파이브! …우와, 박종진! 지각하지 않았네? 종진이는 머리가 조금만 더 짧으면 훨씬 잘 어울리겠어요. …담배 , …습관 되기 전에 끊으세요. …사랑합니다. 자, 하이파이브!”

학생2 : “아, 네에. …사랑합니다. 네에, 하이파이브!”

학생3 : “……선생님! 저랑 같이 끊으시겠어요?^^ 선생님도 끊으면 저도 끊을 게요?^^ …사랑합니다. 네에, 하이파이브!”


패러다임의 변화는 교사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람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행동 말고는 생각한 다음 행동한다. 그리고 행동들이 쌓이고 쌓이면 그 사람의 습관이 된다. 습관이 변하면 그 사람의 인생마저도 바뀐다. 결국 사람의 생각이 바뀌는 것은 그 사람 자체의 인생뿐만이 아니라 그 사회와 문화마저도 바꾼다.

패러다임(paradigm)은 한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의식이나 사상일반을 말한다. 과거에는 ‘선생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가 교사에 대한 패러다임이었다.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생활태도를 교정해주는, 안내자고 지도자며 교정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교사도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교육전문가로밖에 안 보고 있다. 아니 지식전달자로서는 학원의 강사보다도 못한 대접을 때론 받기도 한다. 교사는 이제 하나의 안정된 직장인으로만 보고 있다. 교사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곳에서는 ‘선생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패러다임과 공존하기도 한다.


이제는 학생과 학교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꿔야 한다

대가족 제도가 해체되고 이제는 핵가족 제도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가족제도의 붕괴(?)로 아이들은 자신의 갈등상황에 대해서 대화할 상대를 잃어버렸다. 개별화된 친구들은 그저 인터넷으로 SNS 화면을 통해서 만날 뿐이다. 예전처럼 몸을 부딪치며 아옹다옹 싸우면서 미운 정마저 들었던 스킨십도 사라졌다. 친구들은 그저 PC방에서 함께 게임을 하거나, SNS를 통해서 같은 게임을 하는 게임 파트너일 뿐이다.

그런데 이들 학생들이 만나서 공감하면서 소통하는 공간이 있다. 그곳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학생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학교다. 가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학교……. 학교에서 아이들은 친구들을 만나고 선배를 만나며, 선생님들을 만난다. 그리고 책을 만나고 수업을 하면서, 친구와 선생님과 이야기를 한다. 청소도 하고 지각하였다고 야단도 맞는다. 친구와 싸우기도 하고 농구 게임과 축구 게임도 하는 곳이 학교다.

학생들은 학교에 온다. 그러나 학교에 등교하는 순간부터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정문지도를 통해서 아이들은 자신의 복장과 두발, 그리고 기타 등등의 자신의 생활을 간섭받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정문 옆에서 친구들에게 문자한다.


학교 정문지도부터 바꿔야 한다

“오늘 정문지도는 ○○○이야. 너 올 때 양치질하고 와. 너 담배 피웠지? 손도 비누칠해서 와야 해. 지금 손가락에서 담배 냄새 나는지를 검사하고 있어. 교혁이는 옷 갈아입고 오라고 해. 바지 줄인 사람은 학생부 선생님들이 벌주고 있어. ……야, 나 이제 들어가야 해. 안 그러면 학급 지각으로 지각비 1,000원 내야해. 다른 반은 지각비 대신 청소시켜!”

“아, 열라. 난 오늘도 지각비 내야겠네. 정문지도 시간 끝나고 들어가자! 그런데 웃기지 않냐? 지각했다고 벌 금내는 거. …수업은 8시 50분에 시작하는데, 지각은 왜 8시 20분부터냐? …아, 모르겠다. …이 따 보자!”

그런데도 거의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온다. 비록 수업 안 듣고 잠만 잔다할지라도 학교에는 온다. 선생님들에게 야단을 맞고 벌을 받아도 학교에는 온다. 아침을 못 먹더라도 지각하지 않게 학교에 온다. 그러나 학생들은 정문지도에서 담배핀 것이 걸리지 않기 위해, 바지 줄이고 화장한 것을 지적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두발검사에서 야단맞고 스트레스 받지 않기 위해……, 때로는 일부러 지각한다. 그 어떤 문제아도, 학교에서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더라고 학교에는 오고 싶어 한다. 오늘은 어떨까라는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학교에 등교한다. 그리고 정문지도에서 좌절하고 학교 교육을 포기할까라는 갈등을 하면서도, 결국 학교에 온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수업시간에 야단을 맞고 벌을 받고 인격적 모독과 각종 폭력을 견디며 오늘도 학교 수업을 듣는다. 이해할 수 없어 질문을 하거나 다른 짓을 하면, 그 학생은 또 다시 폭력을 당하며 폭력을 배우고 폭력을 행사한다. 이것이 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겪고 있는 지금의 학교다.

평범한 다수의 학생들은 수업도 잘 듣고 숙제도 잘해온다. 튀는 학생들 때문에 수업을 못 들어도 다수의 학생들은 묵묵히 학교에 와서 배우고 공부하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생활태도를 배우고 익힌다. 만약, 이 모든 학생들에게 학교가 등교할 때부터 하교할 때까지, 즐겁고 행복한 배움이 일어나는 공간이라면 어떨까? 학교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떨까? 이와 같은 학교는 과연 만들 수 있을까?


오고 싶은 학교, 출근하고 싶은 학교를 만들 수 있을까

이제는 교사가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 줄 차례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자. 늦게 오는 아이들을 야단치기보다는 그들을 조금만 더 기다리자. 앞서기보다는 뒤처져오는 아이들에게도 힘내라고 박수치며 말을 건네자. 톡톡 튀는 아이들의 장점을 칭찬해 주자. 묵묵히 공부하고 생활하는 모범생을 따뜻한 마음으로 기대를 갖고 바라보고 대해주자. 그럼 아이들에게는 학교가 숨 쉴 수 있는 공간, 배움이 일어나는 공간, 오고 싶어 하는 공간으로 변할 것이다. 교사가 바뀌면 아이들도 바뀐다. 교사와 아이들의 생활을 바꾸면 학교의 문화가 바뀐다. 이제 응보적 정의가 아닌 회복적 정의로의 변화를 학교는 시작해야 한다.

학교 정문이 바로 그 출발점이다. 그 시작은 비폭력대화와 교사의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나 전달법(I message)’과 경청하기부터 출발하는 거다. 시작이 반이라고, 그 시작이 잘되면 반은 이루어진 거다. 그리고 학생들의 반응을 기다리자. 내 이야기-교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자. 아이들은 말로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행동으로 하는 비언어적 표현을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자. 교사의 살아온 경험으로 판단하지 말자. 그저 그들을 있는 그대로 애정을 갖고 지켜보자.


게리 체프먼은 5가지 사랑의 언어를 제시했다.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이다. 이미 지혜로운 우리의 선인들은 생활 속에서 이것들을 실천했었다.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때 접했던 수많은 선생님들이 실천했던 일들이었다.

지금 나는 교사다. 학생일 때의 내가 제일 바랐고 원했던 선생님은 내 말을 들어주는 선생님이었다.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만 있는 그런 선생님이 내겐 최고의 선생님이었다. 다행히 나에겐 그런 선생님이 계셨다. 그런데 지금 나는? 학생들에게 어떤 선생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