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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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양진채
  • 승인 2014.02.0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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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 공간을 거닐다(2) - 한국근대문학관을 거닐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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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에 지인으로부터 만년필을 한 자루 선물 받았다. 푸른 잉크와 함께였다. 잉크색은 짙은 푸르름이 아니라 쑥빛과 푸른빛이 섞인 느낌의 색이었다. 푸르름으로 펄떡 뛰는 느낌이 아니라 고요하게 시간을 품고 가라앉은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펜이 흐르는 대로 무언가를 써보고 싶었다. 밤마다 끝없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천일야화처럼 이 펜을 잡고 무언가 쓰기만 하면 그것이 아름다운 글이 되어 나를 매혹시킬 것 같았다. 자판을 두드려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노트에 푸른 색 글자들로 긴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렇게 쓴 소설은 나의 분신이면서도 내가 모르고 있던 어떤 세계를 불러내 줄 것만 같았다. 이런 감정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검붉은 노을과 함께 바다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해를 볼 때의 느낌 같기도 하고, 저녁 무렵 어느 집에선가 들려오는 어린아이가 두드리는 서툰 피아노 건반소리 같기도 하고, 배추걷이를 끝낸 광활한 밭에 널버려진 시든 배추 잎들을 볼 때의 느낌과도 닮아 있었다. 그런 느낌들이 내게는 꽤 신선하게 느껴져 까닭 없이 설레기까지 했다. 손에 힘을 주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글자와 기호들, 그림들을 그려나갔다. 그러다 나는 문득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최근에 이와 비슷한 감정을 어디에선가 느꼈는데. 어디였더라. 조명, 오래된 책 냄새, 조용한 실내. 카페였나, 갤러리였나. 어디였던가.
  
 
조금 후에 그곳이 책 한 권과 함께 떠올랐다. 그 책은 1936년 창문사에서 발행된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였다. 검은 하드커버 장정에 은박으로 넓게 세로로 두 줄이 난 그 책. 기상도. 시집은 유리관 안에 세워져 있었고, 나는 밖에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결코 짧지 않은 순간이기도 했다. 책과 대면한 그 순간, 뭐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책과 나 사이에 특별한 교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표지는 당시 절친한 친구이며 구인회 동인이었던 시인 이상이 만들었다고 했다. 그 책은 작년 9월에 개관한 한국근대문학관 전시실에 놓여 있었다. 자유공원 아래, 아트플랫폼 옆에 개항기 창고로 쓰였던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문을 연 한국근대문학관.
 
나는 우선 상설 전시장의 구성이 잡지와 같은 형태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얘기에 아! 했다. 문학관이 다른 전시장과 다른 느낌이 들었던 첫 번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잡지의 표지가 있고, 목차가 있고 권두언이 있고, 주요 내용과 특집이 담기는 것처럼 근대문학관도 전시실로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관람하기 전에 일종의 목차가 있었다. 문학관의 주 내용을 알려주는 ‘근대문학의 역사를 조명한다’는 ‘근대계몽기부터 해방직후까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고, 근대장편소설을 집중 조명하고, 특별섹션/한국의 근대희곡을 살펴보겠다는 목차의 내용이 있었다, 특집으로 ‘인천의 근대문학을 읽는다’라는 코너와 핫이슈로 대중문학을 다룬 코너는 2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전시실을 들어가자마자 최남선의 ‘경부텰도노래’ 악보가 눈에 띄었다. 악보를 직접 보고 음악을 재생시켜 들어볼 수도 있었다. 곡 이름은 떠오르지 않지만 익숙한 리듬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1908년 신문관에서 발행한 순한글 창가집 『경부텰도노래』가 있었다. 1908년 발행이라니! 백년도 더 된 책이 누렇게 변한 채 유리관 안에 있었다. 먼지조차 들어갈 수 없는 유리관 안에서 시간도 정지된 느낌이었다.
최남선을 시작으로 1894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신문학이 들어서던 시기를 조명했다. 근대 계몽기로 역사전기물과 신소설이 등장하던 시기였고,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의 열망을 노래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한국 최초의 신소설인 『혈의누』는 입체적 그림과 글이 관람객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 다음 시기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로 자유로운 리듬으로 개인의 정서를 노래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 때였다. 자유시의 형태를 개척한 시기로 대표적으로 김소월의 시를 들 수 있겠다. 산문에서는 자아각성과 근대문명을 외쳤으나 식민지현실과 유리된 작품들이 많았다.
 
이 당시에 우리가 익히 아는 한국 최초의 근대장편소설, 이광수의 『무정』이 나왔다. 당시에 출간되었던 원본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광수의 『무정』은 디지털 작업을 통해 관람객들이 줄거리나 등장인물, 책 변천사 등의 내용을 터치스크린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이 당시에 출간되었던 동인지 『백조』도 창간호부터 직접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시험보기 위해 외웠던 『창조』 『폐허』 『백조』 『문장』과 같은 동인지 이름들이 떠올랐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는, 청년 시인들이 감상적 비애와 좌절을 토로하던 시기로 3.1운동의 실패 등으로 암울했던 때를 시로 보여주고 있었다. 퇴폐적 낭만에서 현실에 대한 눈을 뜬 시로 「사의 예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를 벽면 전체에 옮겨놓았는데, 정서가 대비되는 행과 연을 다른 색으로 나타내서 관람객으로 하여금 두 색의 시 내용을 비교해가며 읽게 하였다. 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한 행 한 행을 곱씹어 읽어보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든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여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시를 읽는 내 눈에 눈물이 맺힌다. 이 시는 노래로도 나왔다. 스무 살, 노래도 잘 부르지 못하면서 주점에서 막걸리에 취해 눈물을 훔치며 이 노래를 부르던 내가 있다. 어린 나를 본다. 울분에 주먹을 쥔 내가 있다. 어떤 자리였는지, 누구와 함께였는지 잊었지만 그때 그 노래를 부르던, 목울대까지 차오르던 격한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근대문학관에서 나는 80년대의 내 초상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 시가 아직도 유효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가슴이 먹먹하다.
1920년대부터 해방 후, 인천의 근대문학과 대중문학의 장은 다음 기회에 펼쳐보기로 한다. 지금은 술이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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