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강화의 저항정신을 이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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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강화의 저항정신을 이은 인물’
  • 이장열 기자
  • 승인 2014.03.23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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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평화인권센터와 민족문제연구소, 조봉암의 강화 답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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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일) 죽산 조봉암의 유년시절을 보낸 강화도에서 그의 흔적을 더듬어 가는 “죽산 조봉암 선생 발자취를 따라 걷는 답사기행”이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와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의 공동 주최로 진행됐다.

 

이날 답사기행에는 130여명이 부평역에서 모여 세 대의 대형버스에 몸을 실고 죽산 조봉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강화도 기행길에 올랐다. 이 답사길에는 청소년 22명도 부모님들과 함께 해 그 의미가 남달랐다.

 

죽산 조봉암 선생 답사 기행에 자녀와 함께 온 주부는 “아이들이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고 해서, 이번 기행을 통해서 죽산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는 장소도 알려줄 기회가 생겨 이번 답사길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한다.

 

먼저 답사팀은 현재 강화면사무소 옆에 2001년에 세워진 “죽산조봉암선생생가터” 앞에서 이곳에서 표지석이 세워진 근거와 그 뒤에 이 곳 생가터 표지석이 세워진 관청리 500번지는 죽산이 태어난 곳이 아니고,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라는 사실과 마주하게 됐다. 그리고 생가터 표지석이 면사무소 주차장 공사로 다시 정면에서 옆으로 이동한 사실 앞에서 답사 기행팀은 죽산 선생에 대한 역사 홀대가 여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답사팀은 곧이어 죽산이 1907년 입학해서 다녔단 강화초등학교를 거쳐, 1910년 세례를 받은 강화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을 방문해서 죽산의 삶의 행보에서 기독교가 그에게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강화중앙교회100년사 집필자 이은용 씨는 “죽산의 정신적 뿌리는 강화에서 피어난 정재두, 이건창으로 대표되는 양명학의 강화학파와 강화진위대장 이동휘 선생으로부터 이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며 죽산의 저항 정신과 진보적 정치가 강화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답사팀에게 새삼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이민우 지부장은 “죽산을 생각할 때, 일반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고 않은 게 사실이다. 죽산이 지나온 삶 속에서 표출시킨 사상과 실천의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죽산이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낸 강화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 죽산이 못다 이룬 그 꿈이 무엇인지 어림풋하게 다가설 수 있다고 본다”며 “앞으로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형태의 대중적 역사기행은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다”고 덧붙였다.

 

죽산 조봉암은 1899년 강화에서 태어나, 1959년 이승만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사형 집행됐다. 죽산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59년 만에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 합의부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아, 역사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죽산은 제헌의원의원과 대한민국 정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역임하면서 농지개혁법을 입안해서 이를 실행한 인물이다. 1956년에는 제3대 대통령선거(간접선거)에 216만 3천여표를 획득해,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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