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강가, 옅은 안개속 신비로운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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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강가, 옅은 안개속 신비로운 일출
  • 김유철
  • 승인 2014.03.3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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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무작정 배낭여행] (6)바라나시 - 다즐링
  벌써 3월이 끝나간다. 인도의 본토 지방은 요 며칠 사이로 상당히 더워졌다. 이제 산간지방처럼 특수한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도는 1년 중 가장 더운 시기에 돌입하게 되고  현지인들도 피서지를 찾는 시기가 다가온다. 이번 2주간 도시 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바라나시에서 열흘간 체류하며 홀리축제 또한 바라나시에서 즐겼으며, 현재는 다즐링 차로 유명한 다즐링이라는 산간지방에 와 있다.
   바라나시는 며칠 사이로 상당히 더워져 낮 시간에는 밖에 나가기가 꺼려질 정도인 반면, 히말라야 산자락의 다즐링으로 오니 한국의 늦가을이나 초겨울 정도의 날씨로 상당히 추워졌다. 이렇게 급격한 기후대의 변화를 느껴본 게 실로 오랜만이라 아직 적응이 안되기도 하고 다시 따뜻한 곳으로 내려가고 싶은 생각도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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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바라나시 가트의 풍경이다. 바라나시만의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바라나시
 
  다시 찾은 바라나시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물가가 상당히 올랐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유는 바라나시에 가자마자 정보를 얻을 겸 한국식당에 가보았는데 그 동안에 값이 너무 비싸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방문했을 때와 비교해서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계절에 있었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는 몬순이 시작되어 갠지스 강가의 가트가 모두 물에 잠겨있었다. 때문에 가트를 따라 걷는 길이 아예 없어져 버려서 그곳에서 걸어다닐 수 없음은 물론이었고 불어난 물로 인해 강가에서 보트를 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지금은 건기였기 때문에 물이 차 있지 않아 강가를 따라 걸어다닐 수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숙소잡기도 성공적이었다. "Geeta paying guest house"라는 이름의 숙소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꽤나 추천을 받는 숙소였다. 가족들이 운영하는 숙소인데 저렴한 요금에 깔끔하게 관리될 뿐더러 화장실도 인도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고 했다. 하지만 간판이나 표지가 될 만한 것이 없어 처음에 찾아 가기가 조금 힘들다고 했고, 방이 5개밖에 없어서 방 구하기가 조금 힘들다고 했다.
 그래도 다행히 누군가가 인터넷에 가는 길을 찍어 올려놔서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정말 가는 길에 게스트하우스를 홍보하거나 어느쪽으로 가라는 표시도 없었다. 아는 사람만 알아서 오라는 소리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3월이라 여행객들이 많이 빠져서인지 다행히 방도 있었다. 방을 보니 심플하지만 깔끔했고 듣던 대로 화장실은 정말 역대 최상급이었다. 1,2층은 가족들이 생활하는 일반가정이고 3층을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가족들과도 친해졌고 가족적인 분위기로 지낼 수 있었다.
 숙소의 주인장은 ‘띵꾸’라는 이름의 인도인이었는데 지금까지의 인도인과는 상당히 다른 이미지였다. 그냥 순수 그 자체의 청년인 듯 싶었다. 그렇게 느끼게 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필자가 숙소에 묵기로 하자마자 띵꾸가 처음에 했던 말은 홀리 축제 날 점심 때 공짜로 닭도리탕을 해준다며다 같이 먹자고 것이었다. (알고보니 띵꾸 본인이 닭도리탕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이었다! 하긴 닭도리탕을 먹자고 신나게 이야기 할 때부터 알아봤다.)
 또, 가끔 저녁에 숙소에서 다같이 맥주를 마시는 일도 종종 있었다. 술 가게가 조금 멀어 손님들이 원하면 숙소의 주인들이 맥주를 사와 조금 비싸게 팔곤 했는데  띵꾸는그냥 자신이 산 값 그대로 우리에게 주었다. 그래서 가끔 숙소에 투숙하는 사람들과 띵꾸까지 합세하여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이 숙소가 좋았던 점 중에 또 한 가지는 부엌을 이용할 수 있는 점이었다. 우리는 띵꾸와 함께 동네 슈퍼에서 라면을 사다가 끓여 먹기도 했고 요리를 잘하는 투숙객이 한명 있어서 먹다 남은 밥으로 리조또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밖에서 사먹는 값보다 저렴한 값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가끔 우리가 라면을 사와서 끓이고 있으면, 그 냄새를 맡고 띵꾸와 띵꾸의 형제들까지 달려들어다 같이 밥까지 비벼먹곤 했다.
 숙소에는 필자 말고도 몇몇 사람이 더 있었는데 대부분 장기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때문에 방이 며칠간 좀처럼 비질 않았다. 그 중 몇몇은 각각 몇주전과 몇달전에 바라나시에 머물다가 다른 곳을 여행하다 다시 온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투숙하는 사람들이 모두 오랜 기간 머물다 보니 더 친해졌고 각각 아는 정보도 많아서 바라나시에서의 생활이 더욱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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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축제가 끝난 후 필자와 숙소 주인인 띵구. 필자만 심하게 당한 듯 하다.

 그 중, 가장 신기하면서 재미있었던 것은 무슬림 구역에서 치킨을 사다 먹는 일이었다. 장기 투숙하던 사람 중에 누나 한명이 있었는데 두달전에 바라나시에서 무려 45일을 머물려 지내다가 남쪽을 여행하고 다시 바라나시로 왔다고 했다. 과연 장기 투숙자는 내공은 어마어마 했다. 그 동네의 많은 현지인들과 친구처럼 지냈고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여행객들은 전혀없는 로컬 짜이집 중에 맛있는 곳을 찾아서 다니기도 했고 값이 싸고 맛있는 현지 음식점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머무는 곳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무슬림 거주구역이 있는데 그 곳은 여행객들이 아예없는 현지인 구역이라 값싼 가격에 맛있는 치킨을 사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따라가보는데 그 복잡하디 복잡한 골목을 이리저리 다니며 신기하게 길을 잃어버리지도 않았다. 무슬림 구역은 완전한 현지인 동네 같았다. 그리고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모두 무슬림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것이 완전 현지인 동네에 외국인들이 와서 치킨을 사가는 모습에 신기할 법도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른 곳 보다 저렴하게 치킨을 먹을 수 있었다.
  
 홀리축제를 제외하고 바라나시에서의 일상은 어찌보면 단조로웠다. 강가 주변에 앉아서 책을 읽기도 하고 가트변을 계속 걸어다니기도 했으며, 화장터에 가서 화장 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화장터 또한 전에 방문 했을 때와는 달랐다. 전에는 화장터가 물에 잠겨 위쪽 지대로 임시로 화장터를 옮겨서 화장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화장터의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화장터 부근에 들어서자마자 필자를 맞이한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목재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양의 목재를 여러군데 쌓아둔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목재들을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벌써 무엇인가를 태우는듯한 냄새가 이 부근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연기로 인해 온통 뿌연 느낌까지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장터가 보였다. 시신 한구씩을 화장하는 것이 아닌 화장터의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화장이 행해지고 있었다. 화장터에서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쪽에서 화장을 하는 반면 고개를 반대로 돌리면 사람들이 모여서 짜이를 마시고 있거나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이 보였다. 한동안 화장을 지켜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복잡한 감정들이 생겨났다. 유가족인듯한 사람들 또한 먼 발치에 앉아 무덤덤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주변에 몇몇 서양인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자, 찍지 말라며 만류하는 인도인들을 보았는데 서양인들의 태도가 상당히 무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의 문화는 존중해줘야 하지않을까 싶다.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가트로 가는 길에 화장터가 한군데 더 있다고 해서 지나가면서 들러봤는데 그곳의 화장터는 좀더 사람들과 가까이있었다. 계단 바로 앞에서 시신이 태워지고 있었고 바로 앞의 계단에 사람들이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목재와 함께 있는 시신의 모습까지 정확하게 볼수가 있었는데, 그곳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상인지 계단에 앉아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필자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온전한 형체를 갖추었던 시신이 점점 사라지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감정과 인격이 존재했던 한 인간이 한 줌의 재로 변해간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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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터 초입의 목재들이다. 이곳에는 이보다 훨신 더 많은 양의 목재들이 항상 산더미 처럼 쌓여있다.
 
하지만 바라나시에서는  이러한무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골목골목을 해메며 다니다 보면 상당히 활기찬 그들의 일상을 볼 수가 있었다. 어딜가나 사람들의 떠드는소리가 들렸고 필자를 보며 환하게 인사를 해 주기도 했다.
 바라나시에서의 필자는 아침은 대개 씻지도 않은 채 짜이 한잔을 마시러 동네 좌판으로 가서 짜이를 마시며 같이 짜이를 마시던 인도인들과 간단히 안부를 묻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짜이를 마신 후에는 아침을 먹으러 유명한 뿌리(인도인들이 아침에 많이 먹는 음식으로 밀가루반죽을 동그랗게 빚어기름에 튀겨 커리와 같이 먹는다 )를 사와 숙소 로비에서 먹은 후 하루를 시작했다.
 
바라나시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필자는 강가에서 보트를 타보기로 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는 물이 너무 불어있어 보트 띄우는것을 경찰들이 금지시켜버려서 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트는 아무때나 탈수 있지만 필자는 일출과 일몰을 각각 보기로 했다. 몇시에 가면 되냐고 물어보니 일출은 6시까지, 일몰은 오후 5시까지 나오라고 했다. 보트를 타기로 한 곳에 가니, 필자와 같이 타기로 한 사람과 함께 몇몇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더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타면 값이 조금씩 내려가기 때문에 내심 좋았다.
보트를 젓는 사람은 ‘철수’라는 이름의 인도인인데 이 근방에서는 꽤나 유명했다. 특히 한국과 일본 등 동양인 여행자들에게 유명했는데 몇년간 보트를 몰며 여행객을 상대로 일하다 보니 한국어와 일본어 모두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그래서 보트를 몰며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기도 해서 좋았다. 그리고 한가지 더 좋았던 점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대화를 통역 해주는 점이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통역을 인도인이 해주는 모습이 상당히 재미있고 신기했다.
이른 아침부터 보트를 타며 일출을 보니 너무 좋았다. 새벽녘의 강가는 옅은 안개가 끼어있어 강에서 가트를 보면 뭔가 신비로운 느낌이었는데 그 모습과 더불어 해가 뜨는 모습까지 바라보니 한층 더 신비로웠다. 게다가 이른 아침부터 강가에서 신성한 물로 몸을 씻으려는 현지인들의 모습까지 더해져 가트의 풍경은 신비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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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에서 바라본 바라나시의 일출이다. 이른 시간부터 많은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있다.

보트에 탄 우리들은 서로 친해져 철수를 대신해 노를 저어보기도 하며 놀았다. 철수가 저을때는 상당히 쉬워 보였는데 막상 우리가 하려고 하니 상당히 힘이 들었다. 그 와중에 일본인 친구 두명과 꽤 친해져 일몰 때 보트도 같이 타기로 약속하고 같이 아침도 먹었다.
 일몰때의 보트는 일출때 그것보다도 더 재미있었다. 우선 강가의 건너편으로 넘어가아무것도 없는 한적한 모래밭에서 일몰을 구경하고 다시 보트를 타서 매일 밤 열리는 제사 의식을 강에서 구경을 한 후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보트를 타고 강 건너로 넘어가니 아직해가 지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그곳에는 몇몇 여행객들이 둘러앉아 기타를 치기도 하며 쉬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 중에 한 분이 한국인이었다. 그 무리의 모습은 흡사 그곳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일몰때까지 시간이 남은 우리는 무얼할까 고민하다가 일본 친구의 아이디어로 한국대 일본으로 시합을 하기로 했다. 첫 번째 경기는 저 멀리있는 간이 움막을 돌고 빨리 돌아오기였는데 처음에는 잘 달리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둘이 서로 붙잡고 넘어뜨리며 서로 장난치기 바빴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씨름을 했는데 이 역시 결국 장난으로 끝났다.

그렇게 놀다보니 벌써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강 건너편의 가트뒤로 지는 해는 정말 멋있었다. 매일 보트를 젓는 철수씨도 감탄하며 사진을 찍을 정도였다. 우리는 다시 보트를 타고 강가에서 제사지내는 모습을 보고 돌아왔다. 보트를 탄 것도 신기했고 재미있었지만 재미있는 일본인 친구들을 만나서더욱 재미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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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바라나시. 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가트와 태양이 인상 깊다.

별 다른 일을 하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홀리축제가 다가왔다. 거리에서는 색색의 색 가루들을 팔았고 한두곳씩 물총을 파는 곳이 늘어났다. 필자 또한 홀리를 준비하기 위해 색 염료를 샀고 물총값이 더 올라갈 것에 대비해 꽤나 큰 물총도 미리 사놨다.
이미 홀리 며칠 전부터 가트에서는 아이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감을 던지며 놀았다. 타켓은 대부분 외국인 여행자들이었는데 때문에 이미 그때부터 여행자들의 옷은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마침내 홀리 전날 저녁, 가트에서 대규모로 물총싸움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너도나도할것 없이 물총이나 물풍선을 들고나와 사람들에게 던졌다. 금새 다들 온통 얼룩덜룩해져 있었고, 너무나 즐거워했다. 필자 또한 몇년만에 물총싸움을 해보는터라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다같이 얽혀서 무차별적으로 물총싸움을 해대니 멀리서 보면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처음에 아이들이 물총에 갠지스강 물을 넣어서 쏠때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고 우리 또한 갠지스강 물에서 물을 얻어 물총싸움을 했다. 결국 우리의 옷과 얼굴에 묻는 물은 모두 갠지스강 물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서로 얼굴에 대고 쏘면 입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한참을 놀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더 이상 가트에서 심하게 놀면 위험했기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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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 맞추어 신성한 갠지즈 강물로 목욕하러 나온 인도인 부부. 서로를 챙겨주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원래는 다음 날 아침에 큰 규모로 홀리축제를 즐기는데, 아무래도 그날은 인도에서 큰축제이니 만큼 다들 술에 취해있기도 하고 과격해지는데다가 외국인들에게 타겟을 맞춰 조금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때는 가트에서 홀리를 즐기지 않았다.
대신에 아침 일찍부터 숙소 옥상마다 사람들이 올라와 홀리를 즐겼다.필자와 몇몇 사람들도 잔뜩준비를 하고 옥상에 올라갔는데 올라가자마자 온갖물감 세례가 쏟아졌다. 알고보니 옆 숙소의 옥상이 우리 숙소의 옥상보다 월등히 높아서 그곳에서는 손쉽게 우리를 공략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그러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심지어 물총의 사정거리가 그곳에 닿지도 않았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물풍선을 만들어서 던졌는데 물풍선을 만드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온갖 색의 물감과 물풍선이 날라왔고 막상 만들어서 던져도 그곳에 잘 닿지 않거나 그들에게 맞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반대편쪽 게스트하우스의 옥상은 우리와 같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투숙객의 수가 적었던 반면 그들은 인원이 월등히 많아서 또 엄청나게 물감세례를 당했다. 결국 우리는 양 옆으로부터 얻어터지기만 했다. 그러면서 애꿏은 띵꾸에게 빨리 건물을 증축하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며 물감을 던졌다.
 
한바탕의 물총 싸움이 끝난후, 우리는 각자 씻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닭도리탕을 먹기로 했다. 알고보니 닭도리탕을 띵꾸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투숙객중에 요리를 잘하시는 분이 만드는 것이었다. 그 분은 예전에 그곳에서 투숙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띵꾸도 익히 그 분의 요리실력을 알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홀리에 맞춰 다시 올테니 방을 비워두라는 말에 띵꾸는 닭도리탕을 먹자고 하면서 요리를 그 분에게 떠맡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날 미리 그분께서 띵꾸에게 필요한 식재료들을 말해 띵꾸가 식재료를 사와 홀리에 맞춰 요리해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닭도리탕에 맞춰 각자 조금씩 가지고 있는 음식들을 풀었는데 어떤 사람은 깻잎을 가져오기도 했고 필자도 예전에 다른 한국인에게 얻은 고추장을 비롯한 몇몇 재료를 꺼냈다.
닭도리탕에 다른 몇몇 재료들까지 더하니 완전 진수성찬이었다. 게다가 투숙객들 모두 신기하게도 장기여행자인데다가 한국을 떠나온지가 오래되어 정말 한국음식을 오랜만에 먹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이곳이 인도인지 한국인지 모를 정도로 더 맛있었고 열심히 먹기에 바빴다.
 인도에서 경험해 본 축제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번 홀리축제는 그렇게 끝이 났고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홀리때는 모든 업무가 마비되었기 때문에 홀리가 끝나면 바라나시를 떠나려고 미리 기차표를 예매해 두었다. 날씨 또한 며칠 사이로 부쩍 더워져서 이제낮 시간에는 바깥활동을하기가 조금 어려워졌다. 하지만 바라나시에서 다른곳으로 떠날생각을 하니 가기가 망설여졌다. 오히려 홀리가 끝나고 조금 더 쉬다가 갈껄 하며 이미 표를 끊어 놓은 행동을 약간 후회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정말 기차표를 찢을 생각까지 진지하게했었다. 떠나기 전날부터 주위의사람들은 그냥 표 찢고 더 있다가라고 장난스레 필자를 설득했고 띵꾸 또한 계속해서 더 있다 가라고 했다.
그리고떠나는 당일이 되자 체크아웃을 준비하면서도, 짐을 싸면서도 계속해서정말 떠나야하나 아니면표를 찢어버릴까 하며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결국 필자는 표를 찢지 못했고 결국 떠나게 되었다.
 그때 당시 표를 찢었으면 뭔가 하나의 에피소드가 더 생길뻔 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또, 다음 도시인 다즐링까지 가는길이 많이 힘들어서 그런 생각이 한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다음목적지인 다즐링을 가기위해서는 바라나시에서 ‘뉴 잘패구리’라는 곳으로 16시간 기차를 타고 간 후, 그곳에서 다즐링으로 지프를타고 3시간을 더 올라가야 했다.
 우선첫 출발부터 순조롭지는않았다. 다질링에 가는 기차는 가까운곳의 ‘바라나시 정션역’이 아닌 20km가 넘게 떨어져 있는 ‘무갈사라이’역으로 가야했다.  길이상당히 먼데다가 밤기차였기때문에 해가 질때쯤 역으로 이동하려하니 오토릭샤들이잘 잡히지도 않았고바가지 요금을 부르기 일쑤였다. 결국 비싼값을 부르는릭샤꾼들 중에서 그나마 적게 부르는 사람과 좀 더 협상을 해서 출발 할 수가 있었다.
 역까지가는 길은 정말 멀고도 험했다. 과연 릭샤가 건널수 없을것 같은 임시 나무다리를 덜컹거리며건너고 불빛 하나 없는 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다가 정말 납치당하는것은 아닌가하고 걱정까지 되었다. 게다가 도로 상태도 정말 최악이라 릭샤는 속도를 내지를 못했다. 결국 역까지 가는데만 1시간 가까이 걸렸다.
 역에서도고난은 계속 되었다. 바라나시에서 아는 사람이 알려준 어플로 현재 기차가 얼만큼 왔는지 연착은 얼마나 될것인지를 알아보았는데계속해서 연착 시간이 길어졌다. 그래서 우선 웨이팅룸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웨이팅룸에는 당연히 거의 모든 사람이 인도인이었고 필자를 제외하고 외국인은일본인 한명이 있었다. 그 일본인은 계속 밖을 왔다갔다 거리며 안절부절해 했다. 그래서 그 일본인을 불러 기차 번호를 물어보고 그 기차의 현재 상황을 검색해 주었다. 알고보니 그 일본인 또한 다즐링을 가기위해 ‘뉴 잘패구리’로 가려는 사람이었는데 필자보다 3시간정도 빠른기차를 타야 했다.  그는 자신의 기차가 계속 연착이 되어서 언제 열차가 올지 몰라 기다리고 있다고했는데 검색 결과 이미 그 기차는 30분전에 떠났다고 되어 있었다.
 그일본인이 타기로 한 기차는 18시 30분에 출발했어야 했는데 2시간 반정도 연착이 되어서 21시경에 출발을 했다. 하지만 그것을 몰랐던 일본인은 21시30분이 되어서야 그사실을 알았다.
 그사실을 알게 된 일본인은 어쩔줄 몰라했는데 어차피 필자도 ‘뉴 잘패구리’에 가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필자가 탈 기차를 타라고 했다.
 그일본인에게는 그나마 천만다행인 경우였다. 원래 가까운 거리가 아닌 이상 하루에 한번 이상 지나가는 기차는 많지 않은데 바라나시에서 뉴 잘패구리까지 가는 기차는 운좋게도 하루에 4대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 다음 날 기차를 타야 했을 것이다.
 원래필자의 기차는 21시 15분에 출발하여 16시간을 달려 그다음날 점심경에도착하는 기차였다. 그래서 처음에 조금 연착이 되었을 때는 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기차의 연착 시간은 점점 더 길어져 역에 가까이 기차가 올 때 즈음엔 3시간정도 연착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때의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간이라 너무 피곤해서 얼른기차에 타자마자 자야겠다는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한참이 지나도 기차는 10km정도 밖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슬슬 플랫폼으로 나갈 준비를 하던 필자와 그 시간동안 웨이팅 룸에 들어와 있던 몇몇 일본인들은 기차가 갑자기 출발을 하지 않으니 나가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시간은 흘러흘러 한두 시간이 지나도 기차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까 기차를 놓쳤던 그 일본인은 편안하게 잠이 들어 있었고 다른 일본인들 몇몇도 잠이 들어 있었다. 다들 어쩜 그렇게 태평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새벽이 되니 잠잘 타이밍을 놓쳐서인지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았다. 결국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기차는 느릿느릿 플랫폼으로 들어와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밤 9시에 도착했어야 했을 기차가 7시간이나 연착돼 새벽 4시에 도착한 것이다. 아직까지 그렇게 길게 연착이 된 이유는 알지 못한다.
 필자는 기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고 기차를 놓친 일본인은 이곳저곳을 서성이다 빈 자리를 발견했는지 그 다음부터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기차에서는지루함의 연속이었다. 새벽내내 깨어있어서 그랬는지낮이 되었는데도 계속잠이 와서 그냥 어차피 할것도 없는데 잠이나 자자는 심정으로 계속 잠만 잤다.
 하지만잠을 자는것도 한계가있는 법. 나중에는 잠도잘 오지 않았다. 그동안에 기차는 조금 더 연착이 되었는지 ‘뉴 잘패구리’에 도착을 하니 밤 10시 정도가 되었다.
 애초의 계획은 점심쯤에 도착을해서 지프를 타고 다즐링으로 가 숙소를 잡을 예정이었는데 이미밤이 늦어 버려서 역에 발이 묶여 버렸다. 무리하게 다즐링으로 올라간다고해도 새벽이었기 때문에어디 들어갈 곳이 없을것 같았다.
 결국역의 웨이팅 룸에서 밤을 지새기로 했다. 낮동안 내내 잠만자서 잠이올것 같지도 않았다.
 웨이팅룸을 찾아 해메고 있는데 저 멀리 서양 여행객 한명이 보여서 간단한 정보글 얻을 겸 해서 말을 걸어 봤더니 역시나 다즐링에서 내려온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다즐링의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히말라야 산이보이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계속 비가 내리고 춥다고 하며 연신 영어로 욕을 남발했다. 날씨가 요즈음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좋지 않은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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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 잘패구리역의 웨이팅룸. 다들 널브러져 자고있다.

 뉴잘패구리에 와서 처음으로 든 느낌은 인도인이 많이 없다는 점이었다. 영토 상으로는 인도가 맞지만 많은 아시아인들이 있었다. 뉴 잘패구리는 교통의 요지로 서쪽으로는 네팔국경, 동쪽으로는 인도북동쪽의 아쌈지방, 북쪽으로는 시킴과다즐링, 남쪽으로는 인도본토로 이어지는곳이었다.  아쌈지방이나히말라야 자락의 도시들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아시안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게 생긴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웨이팅룸에서는 역시나 많은 인도인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자고 있었다. 필자도 그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잠은 자지 않았지만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해가 뜨는듯 하자 역 밖으로 나갔더니 지프 호객꾼들이 달라붙어그 중 하나를 잡아타고 다즐링으로 향했다.
 
다즐링
 
 지프를 타고 다즐링으로 가는길은 신비함의 연속이었다. 잘패구리까지는 밤에도 약간 더운 정도였는데 해발 2000미터 정도인 다질링에 점점 가까워지니 날씨도점점 선선해지고 사람들의옷차림도 바뀌어 갔다. 주변의 풍경또한 점점 산으로 바뀌어 갔고 마침내 구불구불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빠르게 날씨는 추워졌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잠을못자서 그런지 계속 졸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는듯 하더니 차가 멈추고 그 곳에서 아침을 먹고 했다. 쌀쌀한 날씨에 먹는 모모(티베트식 만두)와 짜이는 정말 꿀맛이었다. 모모를 먹으며 드디어 히말라야 산자락에 들어온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예전 여행때도 추운 산 골짜기를 야간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중간중간 따뜻한 차와 모모로 몸을 녹였던 기억들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느끼게 된 이 반가운 느낌이 상당히 좋았다.
 
 다즐링에도착하자 마자 또 반가운 인연을 만났다. 다즐링에 도착해 지프에서 내려가이드북을 보고 싼 숙소들이 몰려있다는 곳을찾아가고 있었다. 그 때, 저 멀리 누군가가 다가오는모습을 봤는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보니 카주라호에서 같이다녔던 스페인 친구였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어쩔줄을몰라했다. 이 낯선 다즐링 땅에서 전에 만났던 친구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우리는 신기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체크아웃을 하고 밤에 콜카타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방을 이어 받아 쓰기로 했다. 전에 만났을 때도 그는 숙소 잡을 때 만큼은 깐깐했고 신기하리만큼 싼 방을 잘 잡았기 때문에 믿을 만 했다. 그래서 그를 따라 그의 방으로 가니 방 값도 무척 저렴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뜨거운물도 나오고 나름 깔끔한 방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값에 그만한 방을 구하기란 어려울듯 싶다. 좋은 방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와는 헤어졌는데 이번 여행의 여정에 한국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나중에 한국에서 꼭보기로 했다.
 
 다즐링의 현재 날씨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맑은 날도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흐리고 비가 많이 온다. 날씨도 아침 저녁으로는 상당히쌀쌀하고 낮에는 날씨에 따라 온도가 많이 다른 듯 하다. 결국 아직까지 다즐링에서  히말라야제 3봉인 칸첸중가는 보지못했다.
 그래서 지금 드는 생각은 아예 더 북쪽의 시킴지방을 여행하고 다시 다즐링으로 돌아와 혹시라도 날씨가 좋아지면 조금 더 있다가 네팔로 넘어갈 계획이다. 예상치 못한 날씨로 인해 앞으로의 스케쥴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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