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 그 날의 인천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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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 그 날의 인천을 걷다
  • 김현석 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위원
  • 승인 2014.04.18 23: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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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 협약 연재] 인천 민주화의 현장을 찾아서 (1)
 혁명 후 1년, 도원동에 다시 모인 학생들
 
장동원. 17세. 도원동 거주.
 
국립4·19민주묘지에 안장된 유일한 인천 사람이다. 1960년 4월 19일 서울 내무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로부터 꼭 1년 후, 도원동 운동장에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였다. 아직 어린 생명이었다. 비통함 속에 꽃다발과 위로금이 유가족에게 전달됐다. 이 자리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정부에서 발표한 사망자 명단에 인천 출신 학생들로 추정되는 이름들이 몇 명 올라가 있다.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혁명 1주년 기념식은 인천공업고등학교 밴드부의 축하 연주로 시작됐다. 희생자들에 대한 묵념이 이어지고 연단에 오른 학생들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한 해가 지났건만 세상은 변하지 않은 듯 했다. 사회는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고 정치는 혼탁했다. 학생들은 분노했다. ‘학생들을 정치에 이용하지 마라’, ‘학생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마라’, ‘자유와 진리를 위해 단결하라.’ 혁명의 감격과 눈물어린 호소가 뒤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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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직후 질서를 회복중인 경동로터리>(경인일보 1960. 4. 28)
 
기념식을 마친 학생들과 시민들은 1년 전의 그날처럼 거리를 행진했다. 한 무리는 창영초등학교를 거쳐 미림극장과 화평동 철교를 지나 동인천역에서 해산했고, 다른 한 무리는 신흥동 방향으로 향한 후 인천여상, 동방극장, 시청 앞을 통과해 해안동 로터리에서 흩어졌다. 1960년 4월, 시위대가 걷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을 천천히 따라가 보았다.
 
 
혁명 전야, 봉쇄된 동인천역
 
멀리 마산에서 전해 온 항쟁 소식은 인천 시내를 술렁이게 했다.
민주당 인천시당 당원들은 전국을 휩쓰는 반정부 시위에 호응해 16일, 3·15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17일, 애관극장 앞 당사에 다시 집결했다. 시내 경찰병력이 총동원돼 민주당 당사 앞을 막았다. 소방차와 최류탄차도 동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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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도로를 차단하고 경비를 서는 경찰>(경인일보 1960 4. 17)
 
거리는 교통을 차단해 오가기도 힘들었고 무장경찰이 곳곳에 배치됐다. 확성기를 튼 경찰 차량은 시내를 돌며 동요하지 말라는 경고를 반복해 내보냈다. 동인천역의 진출입도 금지됐다. 경찰은 서울방면에서 온 승객들을 인천역까지 가서 내리도록 종용했다. 아무 생각없이 플랫폼에 내린 승객들은 역사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오랜 시간 갇혀 있어야 했다.
 
경찰과 대치하던 민주당 당원들은 경찰 저지선을 향해 달려들며 당사 밖 탈출을 감행하고 일부는 구호를 외치며 자리를 지켰다. 얼마 후 이들은 모두 연행돼 버스에 태워졌다.
 
18일, 마치 평화가 찾아온 듯 시민들은 고요한 하루를 보냈다.
 
 
4월 19일, 시청을 향하여
 
4월 19일, 학생들의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 날, 인천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오전 수업을 받던 중 거리로 뛰쳐 나왔다. 시위를 주도했던 나광조는 최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1학년 학생 일부를 제외한 7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교사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부 학생들은 수봉산을 넘었고 다른 일부는 교문을 빠져나와 시내로 향했다.
 
목표는 시청이었다. 중도에서 합류한 대열은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으나 이내 경찰과 맞닥뜨렸다.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 물을 뿌렸다. 양쪽에서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시위대는 결국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제물포역에서 모두 흩어졌다. 나광조는 후에 부평경찰서 정보과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후 풀려났다.
 
인천공업고등학교의 시위는 4월 19일 인천에서 일어난 최초의 학생 시위로 알려져 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이듬해인 1961년 6월, 학교 교정에 ‘4·19학생의거기념탑’을 세웠다. 여기 비문의 일부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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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군부 혁명이 또하나의 부패를 소탕하고 우리 앞날에 희망이 가득찬 오늘 입석 기공하여 이들의 장거를 찬양하고 나라와 겨레의 발전과 융성을 기원하는 바이다."
 
은근슬쩍 5·16군사쿠데타가 ‘혁명’으로, 4·19혁명이 ‘의거’로 탈바꿈했다. 게다가 학생들을 ‘화랑의 후예’로 귀속시켰다. 인천의 유일한 4·19혁명 기념탑인 데다가 당대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으니 의의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2011년부터 인천시가 공식적으로 ‘4·19혁명 기념식’을 개최해 가고 있는 지금, 혁명의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기념비의 건립이 시급하다.
 
 
경동사거리, 혁명의 고개를 넘다
 
인천공업고등학교의 시위는 주변 학교들을 자극했다.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경동파출소가 위치해 있던 경동사거리는 시위대의 중심축이었다.
20일 오전, 각 학교 고등학생 수백여 명이 숭의시장에 집결해 시내 진입을 시도했다. 경찰이 앞을 막자 투석전이 벌어졌고 시위대는 숭의동 일대에 흩어져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 병력을 보내 학생들의 이탈을 막았다. 학생들이 계속 연행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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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파출소〉
 
21일, 대학생들이 처음 거리로 나섰다. 인하공대 학생 2백여 명은 경동파출소 앞에 연좌한 채 농성을 벌인 후 스크럼을 짜고 동인천역 광장으로 향했다. ‘경찰국가 타도하라’는 구호가 나왔다. 자유공원까지 올라간 학생들은 주변에 흩어져 삼삼오오 집결했다. 경찰 트럭이 공원 입구를 차단, 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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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시내를 행진하는 시위대>(경인일보 1960. 4. 23)
 
22일은 대규모 시위가 있던 날이다. 아침부터 배다리 부근에 모인 학생들은 시위대를 형성, ‘부정선거 다시하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싸리재를 넘어 경동사거리로 나왔다. 동인천역과 화평동 철교를 거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시위대는 경동사거리와 답동광장, 해광사 앞을 지나 신흥동로터리로 향했다. 초등학생들을 포함해 곳곳에서 학생들이 나와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금새 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세계극장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진열을 정비했다. 이때 숭의동 쪽에서 박문여고 학생들이 달려와 이들과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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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동에 위치했던 세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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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세계극장 자리. 대부분의 건물은 철거해 주차장으로 사용중이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난 후 대열은 시청 앞까지 몰려가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이미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경찰들은 여기서 앞을 막아서며 해산을 권유했다. 투석전이 벌이지고 경찰은 공포 두 발을 쐈다. 경찰의 위협은 시위대의 열기를 꺾지 못했다. 경찰의 저지선을 피해 자유공원 쪽으로 우회, 동인천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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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시청 앞에 운집한 학생 시위대>(기호일보 1960. 4. 22)
 
시위대는 지칠줄 모른 채 행진을 계속했다. 배다리, 미림극장을 거쳐 만석동 구름다리를 건너 동양방직까지 간 후 인천역을 거쳐 경동사거리에 다시 돌아왔을 때에야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이날 밤, 신흥동과 배다리 일대에서는 학생들이 횃불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23일에는 인천여자중학교 학생들이 싸리재를 넘었다. 오전부터 경동 동일약방 뒷골목에 모여 든 학생들은 대오를 형성해 경동파출소 앞으로 향했다. 2백여 명의 학생들이 연행 학생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통제하지 않았고 시위대는 계속 시청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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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싸리재에서 시위행렬에 나선 여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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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 동일약국〉
 
 
4월 24일, 답동광장의 추도식
 
24일, 신흥동 세계극장 앞에 다시 모인 학생들은 조기를 앞세우고 답동광장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묵념과 간단한 추도문을 낭독한 후, ‘4·19순국학도 애도’라는 플랭카드를 든 채 싸리재, 중앙시장, 화평동, 동인천, 자유공원을 거쳐 답동광장으로 돌아오는 무언행진을 이어갔다. 학생들의 추모행렬에 시민들의 성금도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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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동광장〉
 
인천지역의 4·19혁명은 경동사거리를 중심으로 해서 답동광장, 자유공원, 배다리, 시청 앞 등을 주요 지점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이러한 혁명의 현장에 아무런 표지석 하나 놓여 있지 않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시위의 규모도 다른 지역에 뒤지지 않을 만큼 대규모였다. 당시 시위대의 행진을 되밟아보는 코스 등 적극적인 발굴 작업을 통해 잊힌 혁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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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만 2014-04-19 02:37:55
김현석 연구위원님 잘 읽었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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