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를 떠나 네팔로, 칸첸중가를 만나다
상태바
인도를 떠나 네팔로, 칸첸중가를 만나다
  • 김유철 여행가
  • 승인 2014.04.27 23: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홀로 무작정 배낭여행] (7) 네팔 다즐링


사람들이 춥다고 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조금씩 덥다는 말들이 들려 온다.

3월이 왔다는 말을 불과 몇일 전에 한 것 같은데 벌써 4월이란다. 정말 이 상태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필자의 인생에서 가장 빨리 지나가는 1년이 되지 않을까 싶다.

현재 필자는 네팔로 와 있다. 정든 인도땅을 벗어나 네팔로 오니 인도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은 다른 것들이 느껴진다. 한번 여행을 해봤던 인도와는 달리 네팔은 처음 온 것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조금 낯설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이번 2주간도 많은 일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도 했고, 만났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그만큼 헤어짐도 많았다. 또, 만났던 이들을 다시 만나 반가워하기도 했고, 그 중 한명은 현재까지도 나와 함께 다니고 있다.

 

다즐링

 

스페인 친구가 추천해 준 방은 결론적으로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방에 들어가면 약간 눅눅하고 추운 감은 있었지만 어딜 가나 그런 느낌이었으므로 별로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방값 또한 혼자 쓰기에 다즐링 치고 좋은 값이었고, 무엇보다 순간온수기가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가장 좋았던 점은 게스트하우스에 레스토랑이 하나 딸려 있는데 분위기 자체가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노닥거리기 좋은 분위기였다. 때문에, 저녁만 되면 그곳에서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필자를 포함한 몇몇은 그냥 와서 뜨거운 차 한잔을 시켜놓고 몸을 녹이며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맛은 그리 좋지를 못했다. 때문에 항상 밥은 다른곳에서 먹고 이곳에서는 쉬면서 노닥거리기만 했다.) 그곳에 온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놀기도 하고 편안히 쉬기도 했다.

바라나시에서 뉴잘패구리까지 가는 기차를 갔이 탔던 미국인 친구가 한 명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기차가 7시간 연착될 동안 한쪽 바닥에 자리잡고 계속 우쿠렐레를 연주하며 노래를 했다. 그 친구를 우연히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곳에서도 그 친구는 매일 밤 연주를 하며 노래를 했다. 한쪽에서는 기타연주를 하고 한쪽에서는 사람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니 매일 밤마다 시간가는줄 모를 정도였다. 그 친구는 한국에서 영어 강사를 하다 와서 그런지 한국말도 아주 조금은 할 줄 알았다. 그리고 대구에서 일을 해서인지 소주같은 술은 물론 막창, 곱창 같은 것까지 알았다. 그 친구와 상당히 재미있게 지내다가 어느 날 그는 쿨하게 다른 곳으로 한마디 말 없이 떠났다.

다즐링의 또 하나의 좋았던 점은 길거리 좌판이 활성화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좌판에서 싼 값에 모모(티베트식 만두)와 초우면(중국식 볶음면) 같은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좋은 음식들이 많았고 또한 짜이도 있었으며, 티베트식 빵과 같은 처음 보는 생소한 음식들도 있었다. 그래서 항상 하루에 한 끼 이상은 좌판에서 모모나 초우면을 먹고, 후식으로 짜이를 마신 후, 티베트식 빵을 우물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다즐링의 길거리는 대체적으로 깔끔했다. 예전 여행에서 라다크 지방이나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와 그 일대의 산간 지방에서 느꼈던 점이 하나 있다. 그곳에도 도로가 인도스럽지 않게 깔끔하고 무언가 정돈된 느낌을 준다는 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옷 차림새도 조금 더 단정해 보였고 길거리에 소들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아마도 인도 힌두 문화권에서 조금 벗어난 곳들은 좀 더 깔끔하고 정돈된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놀라웠던 점은, 다즐링에는 ‘초우라스타’라는 광장이 있는데 그 광장에서 와이파이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카페나 레스토랑 같은 건물 내부에는 물론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 많았지만 실외에 그것도 크나큰 광장에 와이파이가 된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광장 또한 사람들이 항상 많았고, 조금이라도 햇살이 비추는 날에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인도와 또 달랐던 한 가지는, 이곳 사람들은 축구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거의 모든 지프나 다른 차들의 창문에는 각종 축구 팀들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팀들의 로고를 아무곳에서나 쉽게 볼 수가 있었다. 심지어 숙소 레스토랑에도 여러 팀들의 로고가 새겨진 옷가지와 액자, 그리고 목도리 등이 많았는데 특히 아스날 것이 많았다. 알고 보니 숙소 주인이 아스날 팬이라서 그런 것이었다.

  DAJEELING.jpg

다즐링에서 자주 가던 펍에서의 모습이다. 필자의 옷차림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나는 다즐링에 도착하자마자 배낭 깊숙히 넣어뒀던 두꺼운 옷들을 꺼냈다. 더운 곳에 있다가 쌀쌀한 곳으로 올라와서 그런지 몸이 더 추위를 느끼는 것 같았다. 덕분에 배낭 깊숙히 자리만 차지하고 무게도 상당히 많이 차지했던 옷들이 없어지며 배낭도 가벼워지고 공간도 더 생겨서 좋았다.

그러나 아무리 옷을 꺼냈어도 그래봐야 윈드자켓 하나와 군대용 깔깔이, 그리고 트레이닝 바지 하나가 전부였다. 때문에 옷들을 조금 더 사야 했다. 그래서 쇼핑을 하려고 이곳 저곳 돌아보고 있는데 때마침 길거리에서 옷가지나 다른 방한도구를 파는 곳들이 눈에 띄었다. 가보니 긴 옷가지와 내복들은 물론이고 목도리와 털모자들까지 종류 또한 다양했다. 목도리를 대신 할 숄은 이미 바라나시에서 하나를 구매해서 상관이 없었는데 털모자 정도는 있으면 좋을거 같아서 털모자를 사려고 둘러보았다. 좌판마다 파는 종류는 거의 일정했기 때문에 값을 물어보고 다니며 가장 좋은 곳을 한 곳 골라 그곳에서 다시 흥정을 해서 꽤나 싼 값에 털모자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러 축구팀이 새겨진 목도리나 모자도 있었는데 마음 같아선 사고 싶었지만 솔직히 너무 촌스럽게 생겨서 도저히 사서 쓸 엄두가 나지 않아서 포기했다.

 

이렇게 좋은 점이 많았던 다즐링이었지만, 빨래를 함에 있어서는 다즐링은 상당히 좋지 못했다. 쌀쌀한 날씨에 눅눅하고 구름까지 많이 끼어있는 날씨에 비까지 종종 왔기 때문에 빨래를 해도 3일 동안 마르지 않은 경우도 대다수였다. 때문에 샤워를 할 때마다 빨래 걱정으로 머리속이 가득 찰 정도였다. 게다가 세탁 서비스도 다른 곳보다 상당히 비싼 편이었고 원래도 이용하지 않던 세탁서비스에 값까지 비싸니 더욱 이용하기는 어려워졌다.

 

다즐링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몇 만났었다. 다즐링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와이파이로 인터넷 카페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다즐링에 온다는 글을 발견했다. 그렇게 연락이 되어서 누나 한 명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누나는 처음엔 다즐링의 다른 숙소로 갔는데 그곳이 너무 불친절하고 만족스럽지 않아 하다가 필자가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보고 당장에 옮기겠다고 해서 옮기게 되었다.

또, 다즐링 근교에서 다즐링을 오려 하는데 배탈이 나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다는 사람도 한 명 있었다. 그래서 필자가 인도에서 생산하는 지사제를 먹으면 효과가 바로 나타날 것이라고 이야기만 해주고 말았었다. 그 날 밤 저녁을 먹고 뜨거운 차 한잔 마시러 숙소 레스토랑으로 갔는데 한국인 남자 한명이 있었다. 알고보니 배탈이 났다는 그 사람이었는데 지사제를 한번 먹으니 괜찮아져서 이때다 싶어 바로 다즐링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그 또한 필자보다는 형이었다.

누나와 형은 둘 다 장기여행자였다. 특히 형은 1년 계획으로 떠나 왔다고 했다. 여기서 신기했던 점이 둘 다 밀양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서로 여행 다니면서 밀양 사람은 처음 본다고 상당히 반가워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세명은 항상은 아니었지만 같이 다니게 되었다.

 

다즐링에 왔으면 다즐링 차를 마셔봐야 하는 법. 우리는 다즐링 차와 함께 빵을 먹기 위해 꽤 유명한 곳으로 들어갔다. (사실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갔다.) 그곳의 분위기는 전혀 인도스럽지 않았다. 세련된 분위기에 조용한 음악까지 흘러나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빵과 케이크의 값이 상당히 저렴했고 생각보다 다즐링 차의 값도 비싼 편이 아니었다. 창밖으로는 비록 구름이 껴있지만 히말라야 산들이 어렴풋이 보였고 그 앞으로 산간지방 특유의 층으로 된 구조의 마을이 보였다. 비록 싼 값의 빵과 케이크의 맛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그 정도 분위기면 훌륭했다. 다만 그곳 또한 따뜻하거나 안락한 느낌은 없었고 계속 으슬으슬 춥기만 했다.

 

또, 다즐링에서 상당히 마음에 드는 현지 가게를 발견했는데 정확이 무슨 가게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저 싼 값에 과자를 팔거나 따뜻한 국물에 감자를 넣고 라면 같은 것을 넣은 스낵 종류와 짜이를 파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잠깐 들러서 몸을 녹이고 속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  또한 한적한 길을 찾아 산책을 하던 도중 또 다시 비가 왔다. 조금 내리다 그치겠거니 했지만 비는 점점 굵어져 어쩔 수 없이 가던 길을 되돌아와야 했다. 그러다가 잠시 비를 피할 곳을 찾던 도중 짜이를 팔 것 같은 곳이 하나 보였다. 당장에 그곳에 들어가니 그곳에는 현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몇과 주인 같은 아주머니과 또 다른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4인용 탁자 하나 들어갈 자리밖에 없던 공간이라 꽤나 북적거렸다.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한 우리는 그냥 우두커니 서있었는데 그들이 자리를 내어주며 앉으라고 해줬다. 그들은 교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얼굴은 학생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이들이 조금씩 있어 보였는데 이 동네의 학생들이 대부분 그랬다. 얼굴은 아저씨 같은데 교복을 입고 있었고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나이를 물어보니 역시나 일반 학생들의 나이보다는 조금 많은 만 20살, 21살 정도였다.

그 학생들은 잠시 점심시간이었는지 쉬는 시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곧 밖으로 나갔다. 때문에 우리가 그곳에 앉아 비를 피할 겸 짜이를 시켰는데 값도 저렴할 뿐더러 분위기도 허름하니 상당히 괜찮았다. 또한 주인 아주머니 또한 티베트계 아시안이었는데 한국의 중년 아주머니 같았다. 짜이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아주머니께서는 상당히 한국을 많이 알고 계셨고 좋아하셨다. 그리고 언젠간 한번 한국에 와보고 싶다고 하셨다.

짜이를 마시다가 문득 아주머니께서 테라스(그냥 입구 반대편에 있던 조그마한 문)로 나가보라고 하셔서 나가보았더니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다. 날씨만 좋으면 그곳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며 앉아있어도 될 것 같았다. 안개가 자욱히 낀 산자락은 고요한 느낌을 줬고 공기까지 정화되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후, 우리는 심심할 때 한번씩 이곳에 와서 짜이를 마시며 노닥거리곤 했다.

  TUNGBA HOUSE.JPG 

  뚱바를 파는 집이다. 어지간해서는 찾아가기도 힘든 위치에 있다.

또 하루 어느날 밤에 필자는 가이드북을 뒤적거리다가 티베트, 네팔식의 전통주인 Tungba(이하 뚱바)를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순간 뚱바에 대해 너무 궁금해져서 다음 날 바로 가보기로 했다. 저녁에 가면 좋았겠지만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낮에 갔다 와야 한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다음날, 점심 무렵 뚱바를 파는 집을 찾아 나섰다. 번화가를 벗어나 산길을 걸어다니니 상쾌했다. 그리고 아래로는 상당히 큰 차 농장도 있었다. 알고 보니 그 곳은 다즐링에서 유명한 차 농장이었다. 재배철에는 재배과정과 같은 여러가지를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재배를 안하고 있어서 보지 못한다고 했다.

농장을 지나서 더 걸어가니 점점 사람들도 없어져 한적해졌고 주변엔 로컬 상점들이 보였다. 그리고 동네 주민처럼 보이는 분들이 길가에서 전통놀이 같아 보이는 것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알까기처럼 손으로 튕겨서 하는 놀이였는데 손으로 알을 튕겨 다른 알을 맞춰 구석의 구멍으로 넣는 게임이었다. 흡사 포켓볼과 알까기를 섞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지도를 보고 계속 걸었다. 하지만 뚱바를 파는 곳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했던 점은 지금 이 길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길이 아닌 언덕 위의 이 길과 평행한 길에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선 윗길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올라가는 길은 금방 찾을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 그 길에는 좌판이 있었고 각종 먹을거리와 기념품 등을 팔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사람이 없었던 길이었는데 이곳은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의아했다. 알고보니 윗길로 이어지는 이 길의 중간에는 동물원이 하나 있었다. 현지인들에게는 꽤나 유명한 관광지인지 그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필자도 가이드북을 찾아보니 인도에서 유일하게 시베리안 호랑이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때문에 필자도 호기심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입장료는 역시나 외국인은 더 비쌌다.

동물원에 들어가서 보니 세련되진 않지만 나름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는 소와 비슷한 종류의 동물들도 몇 종류 있었는데, 인도 길거리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소들을 여기서까지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아서 잘 보지 않았다. 그 외에 여러 초식동물들이 있었고 곰과 표범과 같은 동물들도 있었으며 호랑이도 역시 있었는데 한국의 동물원과는 사뭇 달랐다. 한국 동물원의 동물들은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고 보살핌을 잘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이곳의 동물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그냥 방치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하나 같이 말라 있었고 힘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모습은 동물들이 대체적으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느끼게 된 이유는 많은 동물들이 이유없이 계속 반복되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곰 같은 경우에는 계속 두 발자국을 갔다가 다시 두 발자국을 돌아오기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앉아서 주위를 돌아보다가 다시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 표범의 경우에도 두 지점을 두세 번 왕복하고 갑자기 한바퀴를 구르고 다시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 그런 모습을 보자니 이곳에 계속 있기도 조금 거북했고 왜 제대로 동물들을 관리하지 않는지 의문마저 들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동물원을 나와 다시 뚱바 파는 곳을 찾던 도중, 또 좌판을 하나 발견했다. 그곳은 모모와 다른 몇종류의 스낵을 파는 곳이었는데 좌판을 좋아하는 필자는 그곳으로 들어가 모모와 짜이를 마셨다. 역시나 값은 착했고 모모는 맛있었다.

항상 필자가 느끼는 것이지만 모모나 짜이와 같은 음식들은 레스토랑보다 길거리가 훨씬 싸고 맛있다는 것이다. 특히 산자락에서 으슬으슬할 때 먹는 좌판의 모모와 짜이는 정말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다시 뚱바집을 찾아 나선 필자는 오래 지나지 않아 드디어 집을 하나 발견했다. 역시나 가이드북의 지도와 위치가 조금 잘못되어 있었다. 신이 난 나는 당장 안으로 들어가 뚱바를 찾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인도에서는 주류를 파는 행위에 허가증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전문적으로 술을 파는 곳이 아닌 그냥 식당에서 전통주를 파는 것이라 경찰의 단속이 심해져서 요새는 팔지 못한다고 했다. 몇 시간을 찾아 해매었지만 결국의 뚱바는 먹지 못했다. 하지만 현지인들의 모습과 우연찮게 발견한 동물원 등 심심하지는 않았던 여정이었다.

  TUNGBA.JPG

뚱바의 모습이다. 발효된 곡물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신다.  

항상 저녁에 다즐링에서 고정으로 가던 로컬 식당이 있었다. 간판도 없고 출입구도 눈에 잘 띄지 않아 찾기가 힘들었는데 물어물어 찾아가서 보니 값이 정말 저렴했다. 역시 로컬식당 다웠다. 또 한가지, 고기가 들어간 종류가 많았다. 인도의 다른 지방에서는 고기를 접하기가 힘들었고 있어 봐야 치킨과 양고기 정도였는데 이곳은 무려 돼지고기가 들어간 메뉴들도 많았다. 필자는 툭바(티베트식 칼국수)를 시켜보았는데 지금까지 먹어보았던 툭바들 중에 최상급에 속했다. 국물도 다른 곳은 싱겁거나 너무 연했는데 이 집은 한국의 순대국 만큼의 진한 맛이 났다. 또한, 고기가 들어간 종류의 음식을 보면 고기는 정말 손톱만큼 들어가 있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곳의 돼지고기 툭바는 값도 저렴하면서 고기의 양도 상당히 많아서 너무 좋았다. 때문에 값도 싸고 상당히 맛있었기 때문에 저녁마다 이 곳을 애용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 로컬식당의 가까운 곳에는 펍이 하나 있었는데 분위기가 정말 고전적인 펍이었다. 영국의 오래된 펍 같은 느낌이었다. 그곳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그곳도 자주 갔었는데 하루는 주말을 맞아 영국 축구가 하는 날이었다. 빅매치라고 할 수 있는 첼시와 아스날의 경기였는데 형이 첼시팬이었기 때문에 형과 함께 첼시를 응원하면서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경기 시작 전부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더니 곧이어 조그마한 펍은 금새 사람들로 꽉 찼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우리 숙소의 주인도 들어왔다. 숙소와는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왜 여기 있냐고 놀라며 반가워했다. 아스날 광팬인 숙소 주인 또한 축구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기 위해 온 것이었다.

경기는 시작되었고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시끌시끌한 분위기에서 축구를 봤다. 시작하자마자 첼시가 몰아붙이더니 결국 계속해서 골을 넣었다. 처음에는 형과 같이 숙소 주인을 놀리고 그 또한 조금만 기다려보면 다시 따라갈거라고 했지만 계속해서 첼시가 골을 넣자 숙소 주인도 포기했는지 그냥 술만 마시며 같이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했다.

그 펍의 분위기가 좋아서 자주 갔었는데 이 날이 펍에서의 가장 재미있는 날이었다.

  KANCHEN GUNGA.JPG 

히말라야의 여왕 칸첸중가의 모습이다. 

다즐링에 오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히말라야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는 ‘칸첸중가’를 보러 위해서이다. 나 또한 칸첸중가를 기대하고 왔지만 계속되는 흐린 날씨와 비 때문에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하루종일 날이 좋았다. 그래서 다즐링에서 가장 칸첸중가가 잘 보인다는 타이거 힐에 가서 일출을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날씨가 종일 좋았기 때문에 혹시나 다음날 아침엔 보일 확률이 높지 않을까 해서였다.

숙소 위층에는 한국인 모녀분 여행객이 계셨는데 다음 날 네팔로 떠나신다는 분들이셨다. 그러나 계속되는 좋지 않은 날씨 때문에 아직 칸첸중가를 못보셨고 아직 타이거 힐도 못가보셨다고 해서 같이 갈 것을 제안했더니 흔쾌히 같이 가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형 누나한테도 물어보니 한번 가보자고 해서 우리는 다 같이 타이거힐에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어떤 중국인 여자애 한 명이 와서 형과 아는척을 했다. 알고보니 형과 콜카타에 있는 마더 테레사 수녀께서 설립한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만났다고 했다. 그 중국애의 이름은 Mei(이하 메이)였는데 아직 다즐링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해서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 타이거 힐에 가서 일출을 볼건데 같이 갈꺼냐고 했더니 같이 가겠다고 했다.

다음 날 새벽, 4시경에 일어나니 형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타이거 힐에 가는 지프는 4시 반 정도에 출발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씻지도 않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오니 밖은 아직 깜깜했고 상당히 쌀쌀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자 메이가 나왔고 누나는 결국 못일어났다. 또 모녀분들은 시간이 지나도 나오시지 않아 일단 우리 셋이 지프를 잡으러 출발했다. 지프의 왕복값은 생각보다 싸지 않았다. 가이드북 정보는 2년 정도 전 정보라 그런지 적힌 값은 맞지 않았다. 결국 지프를 하나 골랐는데 저 멀리 모녀분들이 뛰어오고 계셨다. 결국 우리는 지프 하나를 잡아 탔고 그 지프에는 서양인 3명이 더 올라타 총 8명이 탔고 지프는 다른 지프들과 함께 출발했다.

타이거힐로 가는 길에는 지프만 연속으로 수십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현지인에게도 인기있는 곳이라 그런 듯 했다. 정말 지프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고 그 많은 지프들이 다 어디서 나왔는지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30분 정도를 달리니 지프를 주차할 곳이 나왔다. 우리 지프의 위치를 확실히 파악하고 우리는 위로 올랐다. 이미 조금씩 해는 뜨고 있었는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타이거 힐은 이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도 없었고 이렇게 있다가는 사람들에 가려 일출을 보지도 못할 판이었다. 결국 우리는 각자 흩어져 자리를 잡기로 했다. 필자는 위쪽으로 올라가 난간 위에 서서 보니 하늘이 온전히 보였고 밑에는 사람들이 정말 새카맣게 엉켜 있었다.

하늘은 불행하게도 맑지 않았다. 특히 해가 쓰는 산등성이 부근에 구름이 끼어 있어 해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더 기다려 봤는데 이미 해는 뜬 후였고 결국 일출은 보지 못했다. 사람들 또한 하나둘씩 내려가고 있었다. 일출을 보지 못한 우리도 하나둘씩 내려갔다.

지프 앞에는 서양인 3명 중 한 명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어디 갔냐고 하니 사람들 틈에 끼어있다가 헤어졌다고 했다. 우리는 남은 2명의 서양인을 기다렸다. 하지만 10분 20분이 지나도 그 둘은 오지 않았고 이미 다른 지프들은 다 떠나고 그 북적거리던 곳은 이내 황량해졌다. 3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운전기사는 그들을 찾으러 갔고 곧이어 그들과 함께 돌아왔다. 알고보니 먼저 내려온 친구를 기다린다고 계속 위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해는 되었지만 한번쯤 내려와서 확인을 해보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늦어서 미안해 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상관이 없었을텐데 친구를 기다렸을 뿐이지 자기들의 잘못은 전혀 없다는 태도로 인해 그 추운 곳에서 30분 넘게 기다린 우리는 조금 마음이 상했다.

 

타이거 힐에서도 칸첸중가를 보지 못하자 우리는 시킴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되었다. 며칠 전부터 시킴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결국 한번 가보자고 의논은 했었는데 타이거 힐에서까지 산을 보지 못하자 이제 가려는 마음이 더 굳어졌다.

시킴은 75년까지 독립 왕국이었지만 복잡한 이유로 인해 인도로 병합이 된 곳이었다. 그래서 아직 시킴에 들어가려면 특별한 퍼밋이 필요했고 사람들에게도 시킴은 많이 가보지 않은 신비의 땅 같은 느낌이 있었다. 또, 중국은 그 땅을 인도의 영토로 인정을 하지 않는 등 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있었다. 때문에 중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시킴의 북부 지역은 아예 외국인들의 접근이 금지되었고 그나마 갈 수 있는 시킴의 북쪽은 들어가려면 돈이 상당히 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시킴의 북쪽까지는 가지 않고 동부와 서부쪽으로 가서 더욱 가까운 곳에서 칸첸중가를 보기로 했다. 그리고 필자의 기대를 증폭시킨 큰 이유는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이드북인 ‘론니플래닛’이 선정한 14년도 꼭 가보아야 할 곳 1위로 시킴이 선정되어 시킴의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게다가 부탄과 비슷한 이미지인듯 해서 부탄의 느낌을 느껴보고 싶기도 했다.

우리는 타이거 힐에 가기 전날 메이를 처음 만났을 때도 시킴에 갈 건데 생각이 있냐고 하자 생각해보겠다고 했다가 결국엔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타이거 힐에 갔다 온 후 아침에 메이와 같은 방을 쓴다는 또 다른 중국인 친구와 같이 아침을 먹다가 그 친구도 가겠다고 해서 우리는 다 같이 시킴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시킴에 가려는 퍼밋을 받기 위해 점심 정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형 누나를 제외한 필자와 메이와 또 다른 중국인 친구는 토이트레인을 타보기로 했다.

  TOYTRAIN.JPG

다즐링의 명물 토이트레인이다. 이름처럼 정말 장난감처럼 생겼다.  

토이트레인은 일반 기차보다 훨씬 작은 기차였는데 기차길의 폭이 70cm 정도밖에 되지 않아 협궤열차라고도 불린다. 원래 뉴잘패구리에서 다즐링까지 올라오는 토이트레인이 있었고 상당히 유명했었다. 세계 10대 기차에 선정 될 만큼이었는데 그 이유는 토이트레인의 특수성과 함께 기차를 타고 천천히 히말라야를 오르며 만나는 풍경이 정말 아름다워서라고 했다. 하지만 현재 뉴잘패구리에서 다즐링으로 올라오는 토이트레인은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용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다즐링에서 뉴잘패구리까지는 기차가 운행을 하지 않지만 그 중간 정도까지는 운행을 아직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토이트레인을 타볼 겸 다즐링에서 가장 가까운 역인 ‘굼’까지만 갔다와 보기로 했다.

토이트레인을 타러 역에 가보니 정말 기차는 자그마했고 정말 이름 그대로 장난감 같았다. 우리는 그냥 표를 끊고 타면 되는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일반 인도기차의 예약석을 예약하듯이 신청서를 작성해야 했고 외국인은 창구가 아예 다른 곳에 있는 등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싼값의 2등석을 타려고 했지만 이미 예약이 끝나고 1등석만 남아있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1등석을 타야 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기차 내부는 정말 심플했는데 한 줄에 의자 3개씩이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정말 아담했다.

출발 시간이 되자 기차는 굉음과 함께 서서히 출발했다. 아직 토이트레인은 증기기관차였기 때문에 칙칙폭폭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증기를 내뿜는 기차는 상당히 신기했다.

기차는 정말 천천히 이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네를 가로질러 가는 데다가 찻길과 평행하게 달리는 길도 많고 철도길 바로 옆에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기차를 타고 동네를 가로지르고 자동차와 같이 나란히 달리는 것이 신기했다. 아니, 동네 한가운데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간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그리고 내려가면서 보이는 히말라야 산의 모습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멋진 경치와 함께 검은연기를 내뿜는 기차를 보니 정말 산악열차를 탄 것이 실감났다.

  TRAIN RAIL.JPG

협궤열차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찻길의 폭이 상당히 좁다. 

 토이트레인을 타고 돌아와 필자와 형, 누나, 메이, 그리고 또 다른 중국인 친구(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시킴 퍼밋을 받을 수 있는 오피스로 향했다. 도착해서 우리는 퍼밋을 작성하기 위해 신청서를 쓰려 하는데 담당자가 우리 보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우선 우리는 한국인이라고 할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옆에 있는 친구들은 중국인이라고 하니 중국인은 시킴에 못들어간다고 했다. 중국인은 시킴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며, 만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 퍼밋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과정도 상당히 까다롭고 무엇보다 델리까지 가서 받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중국이 시킴을 인도 땅으로 인정하지 않아 그에 따른 복잡한 문제들 때문에 그런듯 했다.

메이와 다른 중국인 친구는 갑자기 시킴에 가지 못한다고 하자 당황하며 상당히 실망해 했다. 메이는 우리 보고 한국인인게 부럽다며 왜 하필 중국인인지 모르겠다며 실망했다. 우리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그들에게 위로를 해보았지만 별로 소용이 없는 듯 했다.

결국 우리만 퍼밋 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었고 신청한 퍼밋을 들고 다른 곳의 사무실로 다시 가서 퍼밋을 받을 수 있었다. 퍼밋은 개인별로 하나씩 주는 줄 알았는데 받고 보니 우리 3명의 이름을 한 번에 적어놓고 종이 하나로 줬다. 이렇게 해도 상관이 없냐고 하니 상관이 없다고 했다.

    CLOTHES.JPG

다즐링에서 시킴으로 넘어갈때의 필자의 모습니다. 마찬가지로 옷차림에 많은 변화가 있다. 

우리는 다 같이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누나는 굼에 가보고 싶다며 ‘굼’으로 내려갔고 다른 중국인 친구는 혼자 돌아다니고 싶다고 했다. 딱히 계획이 없던 나와 형, 메이는 자주 가던 짜이집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형이 어제 혼자 짜이집을 갔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오늘 방과 후에 농구 하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짜이집에서 짜이를 마시며 쉬고 있다가 학교가 끝나는 시간을 물어보니 4시라고 했다. 과연 4시가 되자 학생들이 하교하기 시작했고 형은 그들과 농구를 하러 간다고 했다.

메이는 다즐링 차를 사기 위해 찻집에 갔다가 농구하는 곳으로 간다고 하길래 필자도  한번 따라가 보기로 했다. 차 값은 생각보다 그리 비싸지는 않았다. 다즐링 차는 그냥 다즐링 차인줄 알았는데 다즐링의 어느 곳에서 수확했는지, 어느 시기에 재배했는지에 따라서 각기 이름도 달랐고 향과 맛도 달랐으며 값 또한 달랐다. 어차피 필자는 시킴에 갔다가 다시 다즐링을 들를 예정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정보만 알아 보았다.

    BASKETBALL.JPG

다즐링에서 학생들과 농구를 하는 모습이다. 고산지대에서의 격렬한 운동은  더 심한 체력소모가 따른다.

차 가게를 들른 후, 형이 농구하는 곳으로 가는데 형이 걸어오고 있었다. 왜 벌써 오냐고 물어보니 2:2를 하던 도중, 한명이 집에 가버려 사람수가 안 맞아 끝났다고 했다. 내심 같이 농구를 하고 싶었던 필자는 다시 가서 같이 농구를 하자고 해서 다시 학교로 갔다. 그곳에서는 학생들 몇몇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형이 떠난 후 몇명이 더 온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껴서 농구를 하기로 했다. 반 코트가 아닌 풀 코트로 농구를 했는데 생각보다 그들은 잘하지 못했다. 반면에 한국에서 농구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농구하는 것을 좋아했던 필자는 그곳에 가니 꽤나 잘하는 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산간지방의 특성상 사람들의 키도 작은 편이어서 더 수월하게 경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고도 차이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별 상관이 없었지만 평지에 살던 우리는 갑자기 2000m가 넘는 곳에서 계속 뛰어다니니 체력 소모가 몇배는 더한 듯 했다. 힘이 들어 설렁설렁 경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이겼지만 몸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경기가 끝나고 나는 기진맥진해 있었는데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그래서 그들과 앉아 이야기를 했더니 많은 학생들이 이곳 다즐링 출신이 아니고 시킴이나 네팔에서 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학교에 사는 것 같았고 허름해 보이기는 했지만 기숙사도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메이가 농구를 해보고 싶다고 하자 외국인 여자를 신기해하는 많은 학생들이 너도나도 가르쳐주겠다며 같이 놀고 있었다. 어딜 가나 남자들은 다 똑같은 듯 싶다. 슛 하는 것 하나하나 세세하게 가르쳐주기도 하고 드리블하는 법도 가르쳐주고 있었다.

농구가 끝난 후, 우리는 그들과 작별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항상 현지사람들과 함께 그곳에서 스포츠를 즐긴다는 것은 상당히 유쾌하고 한층 더 그들과 친해질 수 있는 지름길인 것은 확실하다.

BASKETBALL MEMBERS.JPG

다즐링에서 같이 농구를 즐겼던 친구들의 모습이다. 맨 왼쪽 아래가 중국인 친구 메이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