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시] 가만히 있자, 우리는
상태바
[특별기고 시] 가만히 있자, 우리는
  • 김명인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 승인 2014.05.05 12: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하여


                                                                                       김명인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가만히 있자,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언제부턴가 조금씩 기울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이 뒤집혀 가라앉더라도
익숙했던 바닥이 닿을 수 없는 천장이 되고
늘 드나들던 문이 도무지 대답 없는 벽이 되고
숨 쉬던 대기가 갑자기 숨 막히는 심해가 되더라도
이제 속절없이 죽음과 마주하겠지 싶어도
우리는
가만히 있자

가만히 있자, 우리는
가던 길 멈추고 바쁜 약속일랑 내던져버리고
이대로 머물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말자

우리가 가던 길은 길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 바빴던 그 약속은 진짜 약속이 아니다
진정 우리가 가려고 했던 길이 아니다
진정 사랑의 약속이 아니다
이제 이 더러운 길은 그만 가자
이제 이 더러운 약속 따윈 그만 지키자
이 길이 길이 아님을 벌써 알고 있지 않았느냐
이 약속이 약속 아님을 벌써 알고 있지 않았느냐
이제 우리는 그만 가자
제발 가만히 있자

우리가 딛고 살던 바닥은 사실은 허공이었다
우리가 문으로 알던 것은 사실은 벽이었다
허공에 발 딛고 벽을 문으로 여기며
우리는 우리를 속이고 살지 않았느냐
이제 그만 속이자
제발 가만히 있자

가만히 있자, 우리는
가만히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우리가 이 헛된 길 가던 동안
뭉개버린 풀잎들을
꺾어버린 꽃 대궁들을
막아버린 바람 길들을
짓밟았던, 짓밟고도 몰랐던, 아니 알고도 짓밟았던
모든 것들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자

그러면
새 길이 보일 것이다
새 약속이 정해질 것이다
그 길로, 그 약속으로 일으켜 보내자
우리가 뭉갰던 꺾었던 막아섰던 그
사실은 진실로 진실로 사랑했던 사랑하는 뭇것들을

그리고
가만히 있자, 우리는
되돌아가지도 말고 이제 이 자리를 지키자
헛된 길, 헛된 약속을 길이라 약속이라 우릴 속였던
저 밀물, 저 찬 바람을 우리 빈 몸으로
고스란히, 겸손하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젠 막아내자

가야할 것들 떠나야 할 것들에게 안녕하고 손 흔들어 보내고
우리는 가만히 있자
이 자리를 지키자
바위처럼 절벽처럼
모처럼 부끄럽게도 전사처럼

비록 내일 새벽
물고기에게 눈이 먹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더라도
총탄에 턱이 날아가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더라도
우리는
이 자리에
가만히 있자

가만히 있으라.jpg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