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역사 발상지' 시민에 돌려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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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역사 발상지' 시민에 돌려줘야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05.1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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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일보 협약기사] 근대 이후 문학산이 겪은 시련

흔히 인천의 진산(鎭山)을 문학산(文鶴山)으로 알고 있다. 풍수사상에서 유래한 진산의 개념을 보면 도읍이나 성시(城市) 뒤쪽에 있는 큰 산으로, 그 고을을 진호(鎭護)하고 더불어 상징적 표식(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인천관아 앞 문학산이 이에 조금 모자랐으니, 관아에선 떨어져 있지만 멀리서도 그 모양을 살필 수 있는 산을 진산으로 삼았던 것이다. 과거에는 인천부역이었으나 오늘날 시흥시에 위치한 소래산(蘇來山)이 인천의 진산으로 기록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문학산은 주봉을 비롯해 북쪽으로 연경산·노적산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수리봉과 길마산으로 연이어 너르게 퍼져 있다. 천년의 세월 동안 인천을 안온하게 품에 안아 인천인들에게는 마음의 진산이자 생활 속 진산에 다름 없다. 그러나 문학산은 1883년 제물포가 개항하고 그곳에 '새인천'을 만들면서 그 운명을 바꿨다. 문학산 앞 인천관아를 대신해 개항장 새인천에 '외국과 교섭하는 일을 맡은 중요한 관청'인 감리서가 들어서면서 그곳에 새로운 근대도시 인천이 형성되고, 문학산 일대는 구읍(舊邑)으로 전락했다.

한반도를 노린 제국주의 세력들의 각축 속에서 그 첨병이었던 일본 제국주의가 수도 한성을 공략하기 좋은 길목인 제물포 일대에 개항장을 마련해 행정의 중심으로 옮김으로써 문학산 일대는 점차 구읍으로 추락했다.(졸고, 근대 초기 '새인천'의 형성과정 연구, 인천학연구 창간호,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2002 참조) 이후 제물포 개항장을 일본인의 도시 '소일본 진센(Jinsen)'으로 집중개발하면서 문학산 일대는 철저히 방기됐다.

1913년 10월30일 부제(府制) 공포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재된 인천도호부 관아는 1918년 4월29일 부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문학초등학교 전신)가 관아 자리에 개교하면서 파괴됐다. 이곳에 경찰주재소가 들어서기도 하고 관청이 불에 소실되기도 했다. 학산서원은 고종8년(1871) 3월 단행된 서원정리 조치로 인해 훼손됐고, 최근 문학터널 공사로 그 터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인천향교 또한 부천군 관하라는 이유로 부천향교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더니 시내 한 곳에 두 개 향교는 불필요하다며 부평향교만 남기고 부천향교는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문학산성도 별다른 보호조치 없이 방치되다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화 길로 들어섰다.


문학산 지도 1929.jpg

<그림1> 2929년 인천관광지도 상의 문학산 일대


<그림 1 >은 인천부에서 1929년 제작한 인천부 관광지도로, 일본의 조감도 전문화가인 요시다 하츠사부로가 그린 '仁川を中心とせる名所交通' 중 문학산과 송도 일대를 확대한 것이다. 아직 수인선이 건설되기 전이고, 문학산 일대 관광지 개발도 착수되기 이전 모습을 보여준다. 이 지도에서 특이한 것은 문학산 정상의 봉수대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는 점과 바로 아래에 색을 달리해 문학산성 모습을 그려놓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관청리 일대에도 상당수 민가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 유적과 아름다운 경관을 보존한 문학산 일대는 1930년대에 일제 당국에 의해 식민관광지역으로 지목되면서 대공원으로 조성하려는 개발계획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천부의 문학산 관광개발은 여건상 포기되고, 그 대신 송도유원지가 일본 민간자본에 의해 개발됐다. 그래서 문학산은 한동안 구적을 간직한 채 소풍지로 남아 있게 됐다.


문학산 지도 1937.jpg

<그림 2> 1937년 인천관광지도의 문학산 일대


<그림 2 >는 인천부가 1937년에 제작한 관광안내도 '景勝の仁川'에서 문학산 주변지역을 확대한 것으로, 수인선을 놓은 직후 문학산 일대와 달라진 송도유원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문학산과 청량산('송도금강'이라고 표기됨) 사이로 실선으로 표시된 것이 바로 수인선이다.

수인선 송도역을 통해 시설이 완비된 송도유원지와 바로 연결된다. 주목할 것은 문학산 일대에 '인천의 발상지'와 '성지(城址)'라고 확연하게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산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전통을 간직한 옛 인천의 역사유적을 훼손한 일제도 문학산이 품은 인천의 상징성을 주목해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산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됐다. 이뿐만 아니라 분단시대 내내 문학산성이 위치한 정상부에 군부대가 진주하면서 시민들의 접근이 차단된 공간으로 남아 있다.

며칠 후면 6·4 지방선거를 치른다. 시장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요청한다. 인천의 역사적 정체성을 되찾고 인천을 평화도시로 만들어가는 첫 걸음으로 문학산의 군부대를 적절한 곳으로 옮기고, 문학산 정상부를 시민들에게 되돌려주는 작업부터 착수함이 옳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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