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서 부러워했던 인천 록의 번성과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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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부러워했던 인천 록의 번성과 쇠퇴
  • 배영수
  • 승인 2014.06.08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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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음악 이야기 2


지난 번 1편 ‘인천 언더그라운드 록 음악의 태동’ 편에서는 당시 방값이 저렴했던 관교동 일대에 록 밴드들이 숙소를 잡고, 대부분 인천에서 공연도 하는 등 활약하며 언더그라운드 신의 형성에 영향을 줬던 내용까지 언급했다. 80년대부터 일어난 일로, 90년대 들어 인천의 록 신은 더욱 발전해 갔다. 이 장에서는 그 발전에 대한 내용 그리고 쇠퇴의 과정 등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1-문화회관소극장.jpg

현재 인천예총이 관리 중인 수봉공원 문화회관의 소극장 내부. 90년대 인천지역 헤비메탈 밴드들의 주된 공연 장소였다.

 

80, 90년대 인천의 록 밴드들은 주로 서너 구역 정도에서 공연을 했다. 장소는 어느 시대든 비슷했으니 90년대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우선 동인천 일대 공연이 가능했던 소극장들과 현재 인천예총이 사용 중인 수봉공원 문화회관 소극장, 그리고 지금은 철거된 주안동의 옛 시민회관 등이 당시 국내에서 날고 긴다는 밴드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주된 장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수봉공원 문화회관 소극장은 지역 내 프로 록 밴드들과 청소년 아마추어 록 밴드들의 공연이 많이 치러진 곳이어서 IMF 이전 80, 90년대의 인천 중/고등학생들이었다면 이들을 보러 그곳을 찾는 경우도 상당했다(당시 공연 관람비는 3천원과 5천원 사이를 오갔던 걸로 기억한다.). 장소가 몇 배 더 넓었던 옛 시민회관은 인천과 서울 밴드들이 모여 일종의 ‘록 페스티벌’ 같은 행사를 여는 경우도 있었는데, '사하라'나 '블랙 신드롬' 등 인천에서 자주 공연을 가졌던 팀들은 물론 블랙홀과 기타리스트 이현석 등의 유명 뮤지션들 역시 이곳에서 그런 주제로 모여 ‘합동’의 방식으로 무대를 가졌던 적도 있었다.

 

특히 인천지역에서 터를 잡고 공연을 하던 밴드들은 이를 계기로 타 지역의 록 팬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다. 7년간 무명 생활을 하다 두 장의 앨범을 내고 그중 한 장이 일본 팬들에게까지 알려지며 해외 활동도 타진한 적이 있는 '사하라'가 대표적일 테지만, 소위 ‘익스트림 메탈’이라 하여 극한의 강력한 록 음악을 했던 ‘사두’와 같은 팀도 앨범을 냈었다. 현 넥스트의 김세황이 몸담기도 했던 ‘다운타운’ 역시 앨범을 내고 인천에서 많은 공연을 했던 팀이었으며, 최근 리마스터(옛날 음반들의 소리 등을 수정 보완해 재발매하는 음반)된 세트가 나오기도 했던 '노이즈가든'이나 '터보', '제로 지' 등의 팀들 역시 인천에서 공연을 하고 연습실을 마련한 경우였다. 그 외 앨범을 낸 건 아니지만 RPM이나 퍼스트 메이든, LPG, 비비드 등의 팀들은 지역 신에서 꽤 이름이 알려졌던 부류에 속한다. 그중 연주력이 뛰어난 멤버들은 타 지역에서 “누가 손가락을 1초에 몇 번 돌린다더라” 등의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옛날 일제 강점기 시절 김두한의 주먹이 서울 일대 협객들에게 입소문을 탔던 것처럼, 그렇게 연주 실력에 대해 알려지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팀들의 공연 소식은 당시 국내의 대표적인 음악 잡지였던 [핫뮤직](당시 편집장 성우진 - 현 경인방송 FM에서 자정에 [한밤의 음악여행]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자주 소개가 됐을 정도여서 전국적으로 팬들의 관심이 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2-사하라앨범.jpg

 인천 록 밴드 사하라1993년 발표한 음반. 앨범 제목을 [7년간의 가뭄(The Seven Years Of Drought)]이라 지은 이유는

결성 후 7년간을 무명 밴드로 보냈기 때문이었다고.

  

그렇다면 이러한 인천 언더그라운드 록 신이 갑자기 왜 무너졌을까? 당시 인천에서 록 음악과 록 공연을 즐기던 팬들 대부분은 그 이유를 IMF로 인해 음악을 비롯한 예술문화에 대한 소비가 크게 감소했던 것을 이유로 꼽는다. 지역 유지들의 경우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록 밴드들의 주요 활동지였던 동인천이 당시엔 지역의 주된 상권이었기도 했지만 90년대 말로 접어들며 관교동 일대 터미널과 지하철 그리고 대형 백화점 입점 등으로 급작스럽게 상권이 이동했던 것이 지적한다. 여기에 1999년 10월 50명 가량의 중/고교생들을 사망케 한 ‘인천호프집화재사건’으로 인해 동인천 상권이 완전히 죽어버려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제의 관점에서 어른들의 시각으로 본 이유였다.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다음부터다.

 

우선 록 음악은 ‘외산 음악’이다. 때문에 완전히 정착화된 지금과 달리 전자기타의 굉음에 익숙치 않았던 대중들에게 ‘록 음악 + 한글 가사’는 어색함의 극치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정서를 완벽히 소화할 수 있었던 록 보컬리스트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영어로 노래하면 그렇게 잘 부르던 싱어들도, 한글 가사를 넣어 부르면 소위 ‘무너지는’ 모습들을 자주 노출했었다. 그게 극복이 됐던 사람들이 현재에도 가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서울의 임재범이나 이승철 같은 부류들이었고, 전문 보컬리스트가 아닌 경우는 '블랙홀'의 주상균 정도가 그나마 한글 가사를 괜찮게 소화하는 경우였다. 이런 한계는 자연히 밴드들의 주 레퍼토리를 자작곡이 아닌 해외 밴드들의 카피곡으로 구성해야 했으며, 창작보다 악기 연주력 등 소위 ‘기술 향상’에 혈안이 돼 있던 밴드들에게서 젊은 세대가 오래도록 집중할 수 없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라면 그 신이 너무 ‘록/메탈’이라는 한 가지 장르에만 국한된 나머지 쉽게 질려버린다는 맹점을 지녔었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서울 홍대의 인디 신을 보면 답이 나온다. 그곳 역시 90년대 들어 노 브레인이나 크라잉 넛 등의 밴드들이 세상에 알려지던 당시엔 록 음악이 중심이었지만, 현재 홍대는 록은 물론 흑인 펑크(Funk)와 일렉트로니카, 그리고 재즈까지 다양한 음악들을 연주하는 분위기가 갖춰져 있기에 그 판이 쉽사리 질리지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인천은 오로지 ‘록 음악’ 하나였다. 그 정서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쉽사리 접근도 어려웠다. 자연히 젊은 친구들은 당시 TV를 주름잡던 서태지와 듀스, 김건모와 김현철 등의 가수들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90년대에는 TV에 자주 혹은 종종 모습을 비추던 가수들이, 소위 ‘보여지는’ 모습에 신경을 쓰긴 했어도, 뛰어난 음악을 들려줬던 데다 청소년들의 음악에 대한 관심사 역시 단순한 밴드가 아닌 댄스와 노래부르기, 작곡 등 다양한 범위로 넓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해외 밴드들의 곡을 카피해 공연하는 노선 하나만 지닌 록 밴드들의 관심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인천의 언더그라운드 신은 힘을 잃어갔고 IMF의 칼바람이 불며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최근 신포동의 ‘글래스톤베리’와 부평의 ‘루비살롱’ 등 클럽과 과거 ‘티삼스’의 멤버였던 안정모씨가 회장을 역임중인 인천밴드협회 등을 중심으로, 과거의 움직임을 다시 살려보려는 움직임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라는 것이 한 번 죽으면 다시 되살리는 게 어려운 성격의 것이어서, 이들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좀처럼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어, 지역 주민으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만, 과거를 기억하는 몇몇 지역민들을 중심으로 그 분위기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분위기들이 나타나고 있고, 작년부터 인천문화예술회관을 중심으로 [밴드 데이] 등 관 주도로 진행되는 공연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과연, 인천은 “한국의 LA”라는 옛 명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3-밴드데이.jpg

인천문화예술회관이 주도하는 [밴드 데이] 콘서트에서 인디 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공연 장면.

인디 밴드의 섭외 및 공연까지 모든 과정을 관 주도로 이끄는 비교적 드문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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