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타도 물결, 6월민주화항쟁과 인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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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타도 물결, 6월민주화항쟁과 인천(1)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06.09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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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 협약 연재] 인천 민주화의 현장을 찾아서 (4)

 

차도에서 연좌시위를 하고 있는 인천시민들.jpg
"인천의 노동자, 셀러리맨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차도에 연좌,
독재타도와 민주쟁취를 외쳤다."(<말>지 수록 사진)
 

 

모든 계층의 남녀노소들이 무리를 지어 쫒고 쫒기면서 밤낮없이 거리를 질주했다. 그들이 내건 최대의 구호는 ‘독재타도’였다. 시위대는 시간이 갈수록 수천 명에서 수만 명으로, 다시 수십만 명으로 불어났고 대규모 군중집회를 동반한 대중열기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시위양상도 초기의 비폭력에서 폭력사용 쪽으로 발전, 시민무장론 속에 돌과 화염병이 날고 때론 각목까지 등장했다. 이처럼 수그러들 줄 모르고 확산돼가던 시위 열기 속에 4.19혁명을 쿠데타로 뒤엎고 외세를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후 26년간을 국민 위에 군림해온 정치군부집단의 철옹성은 마침내 흔들리기 시작했다.

      - ‘6월항쟁’을 특집으로 다룬 <말> 12호 표지 헤드라인(1987. 8. 1 발행)

    

6월 10일, 가톨릭회관의 가두방송

 

전국적으로 궐기대회가 열리고 있는 1987년 6월 10일, 인천의 가톨릭회관에서는 오후 내내 가두방송이 흘러나왔다. 인천의 7개 단체로 구성된 ‘호헌분쇄 및 민주개헌을 위한 인천지역공동대책위원회’(이하 ‘인천공대위’)는 가톨릭회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6.10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오후 4시 20분부터 10분 간격으로 국민대회 참가를 촉구하는 가두방송을 내보냈다. 당시 인천의 인구는 140만 명. 항구 주변으로 대규모 공장이 밀집해있고 주안, 부평공단을 중심으로 약 40만 명의 노동자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 6.10민주화운동의 첫 집회는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부평역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오후 6시, 부평역에서는 애국가 낭송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국민대회가 시작됐다. 지나가던 택시 기사들이 경적을 울리며 집회에 호응했다. 십자가를 앞세운 시위대가 도로로 나오자 곧 주변의 시민 학생들이 합류해 시위대는 곧 2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장기집권 획책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대형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전경들이 잇따라 최루탄을 난사했지만, 함께 모인 시민들은 골목길에 흩어졌다 다시 모이길 반복하면서 결국 부평역 도로 앞을 점거하고 연좌시위를 전개했다. 시민들은 ‘인천공대위’의 주도로 대중집회가 열리자 스스럼없이 마이크를 잡고 발언에 나섰다. 직접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도 주변에서 박수를 보내줬고 음료수와 빵과 휴지를 시위에 나선 학생과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오후 7시가 지나자 퇴근한 인근 공단의 노동자들이 “노동3권 쟁취, 민주노조 결성, 잔업 철폐, 임금 인상” 등의 요구를 외치며 시민과 합세하자 곧 격렬한 시위가 전개됐다. 이날 시위는 부평역을 출발해 공단을 끼고 계속 이동하면서 진행됐다. 오후 10시경 효성동 사거리에서 다음의 투쟁을 약속하면서 해산했으나, 그 시각 이후에도 부평역과 안병원 앞 등 부평 곳곳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산발적 시위는 6월 10일 밤 늦도록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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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6.10민주화항쟁 근거지였던 인천가톨릭회관의 현재 모습

 

 

 

6.10으로 결집된 인천의 반독재운동

 

1986년 소위 ‘5.3사태’를 빌미로 한 5공 군사정책의 탄압은 1987년 벽두부터 계속됐다. 1월 9일 인천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선중, 한현구 씨가 통방을 이유로 장기 금치된 이후 비녀꽂기 등의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를 받던 중 물고문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알려졌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수사당국의 발표는 오히려 전국민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1월 26일 오후 7시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단과 평신도협의회 공동 주최로 인천 3개 지구(답동성당, 부평1동성당, 소사성당)에서 박종철군 추모미사에 이어 진혼제를 개최하면서 고문 종식과 민주화를 기원하는 집회가 열렸다. 2월 7일에는 서울 등 전국 16개 지역에서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무산되자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천주교 인천교구는 오후 2시부터 가톨릭회관 6층에서 사제단 명의로 약 1시간 40분 동안 옥외방송을 통해 인천 추도회를 개최했다. 2월 17일엔 인하대생들이 교내 해방광장에서 박종철 추모식을 거행하고 후문에서 거센 시위를 전개했다.

 

3월 3일 박종철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전국 주요도시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자 대규모 거리시위가 재연되었다. 권인숙 성고문사건의 파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자 노동자, 학생, 재야운동이 일제히 군부독재의 타도를 외치며 거세게 들고 일어났다.

 

전두환 대통령은 4월 13일 특별담화를 발표, 현행헌법으로 연내 대통령선거를 간접선거로 치르겠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타오르기 시작한 민주화운동은 ‘민주헌법 쟁취’와 ‘군부독재 타도’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다. 4월 30일,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 39명이 민주개헌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가톨릭회관에서 단식기도에 들어가 5월 6일까지 단식농성을 전개했다. 5월 2일에는 인천지역 인권선교위원회가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하였고, 5월 5일에는 인하대 28명의 교수를 비롯한 7개 대학 교수 269명이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5.18 7주기를 맞는 대학가에서는 광주항쟁 추모와 진상규명 투쟁이 호헌분쇄 투쟁과 연계되면서 뜨겁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어 5월 20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 은폐된 사실을 폭로하자, 민주헌법 쟁취와 군부독재 타도를 향한 흐름은 전국적으로 ‘민주헌법쟁취범국민운동본부’의 전국적 조직 결성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인천에서는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인천지역협의회(인천노협), 가톨릭노동청년회, 인천기독청년협의회, 인천산업선교회 등 7개 운동단체가 모여 ‘4.13호헌분쇄 및 민주개헌을 위한 인천지역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5월 24일 부평역 광장에서 ‘광주영령 추모 및 민주개헌을 위한 인천지역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시민대회 이후 전개된 가두시위로 인해 149명이 연행되고 1명이 불구속 입건되었으며 19명이 즉심에 회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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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16일 '인천지역민주노동자' 명의로 배포된 선전물(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천공대위의 조직과 활동

 

7개 지역단체가 함께 구성한 인천공대위는 실무회의를 통해 인천의 6.10항쟁을 이끌어갔다. 5월 24일 집회에 이어 6월 10일과 18일, 26일 대규모 집회를 준비했다. 공대위에는 7개 단체 이외에도 비공개로 활동하던 노동운동 단체와 학생 등 인천의 민주, 민중운동 세력 전반이 직간접적으로 자리를 함께 하면서 협의체로 운영해나갔다.

 

당시 실무회의에 참여했던 이민우 인천산업선교회 일꾼자료실장은 다른 지역보다 인천이 다소 늦게 만들어졌다고 기억했다. 7개 단체의 협의체로 운영되던 인천공대위는 가톨릭회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인천지역 6.10항쟁의 일종의 본부 역할을 감당했다. 김병상 신부, 조화순 목사 등이 공동대표를 맡고 상임집행위원단과 집행위원장 체제로 운영됐는데, 사무처장은 박귀현이 맡았다. 그러나 인천공대위는 6.10 대회 직후인 6월 12일 인사연 집행국장 안영근, 인천가톨릭노동청년회장 강석태, 인천기독청년회장 김영철 등 3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나머지 단체 대표 5명은 수배령이 내려졌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인천에서 6.10민주화항쟁을 계속 이어갔다.

 

한편, 5월 27일 서울 향린교회에서 전국조직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정식으로 발족, 6월 10일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로 전국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바로 그 하루 전날인 6월 9일, 학교정문에서 시위 중이던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생명의 위독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민심은 6월 10일 전국의 거리를 분노의 물결로 뒤덮였다.

 

동인천 가톨릭회관에서 부평역 앞 인천시민대회를 알리는 가두방송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날 인하대생들은 교내에서 국민대회 출정식을 마치고 1천여 명이 부평역까지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부평역에서 시작된 인천집회는 밤 9시 3천명의 시위대가 백마장 입구에 모여 가두시위를 전개한 후에도 한양아파트 사거리, 영아다방 사거리로 이동하면서 군부독재 타도, 민주헌법 쟁취를 외쳤고, 점점 불어난 시위대는 한때 5천명까지 어나 자연발생적인 집회를 갖기에 이르렀다. 6월 10일의 첫날 시위 이후 인천은 노태우의 ‘6.29선언’에 의한 직선제 수용발표가 나오기까지 거의 매일 6.10민주화항쟁 시위가 계속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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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동 마루턱에서 내려다본 6.10민주화항쟁의 현장 동인천역의 현재 모습

 

<참고자료>

특집 "6월항쟁", <말> 12호, 민주언론운동협의회, 1987. 8.

6월항쟁을 기록하다 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87년 인천 6월민주항쟁, 6월민주항쟁20년사업 인천추진위원회, 2007.

송정로, 인천시민사회운동20년사, 명문미디어아트팩,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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