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세 차례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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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세 차례 인천상륙작전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07.04 0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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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인천일보 협약기사]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우려하며
▲ 그림 1-운요호의 영종진 전투를 다룬 니시키에 '조선의 전쟁(朝鮮の戰爭)' (1876)
 
 
일본이 자위대 창설 60주년인 2014년 7월1일, 집단자위권 행사가 허용된다는 새로운 헌법 해석을 채택하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전환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내각은 이날 오후 총리관저에서 임시 각의를 열어 일정요건을 충족하면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의 각의 결정문을 의결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날 각에서 채택한 자위대의 무력행사 요건은 '①우리나라(일본)에 대한 무력공격이 발생한 경우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국가에 대한 무력공격이 발생하고, ②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존립이 위협당해 국민의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이 근저에서부터 뒤집힐 명백한 우려가 있는 경우, ③이를 배척하고 우리나라의 존립을 완수해 국민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경우 필요 최소한의 무력행사가 자위조치로서 허용된다'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기존의 자위권 발동 3요건이 일본에 대한 침해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 것과 달리 타국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에도 무력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명시했기 때문에, 자위대의 해외파병이 허용된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군의 해외 파병은 우리에게 악몽 같은 기억을 다시 들춰낸다.

경술국치에 뒤이은 36년간의 일제 강압통치의 악몽도 악몽이려니와, 특히나 일본군대가 한반도를 침탈하고자 인천에 몇 차례나 상륙했던 역사를 뼈아프게 다시 환기하게 된다.

우리는 그간 1950년 9월15일 전개된 인천상륙작전(Incheon landing operation)을 승전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지만, 1950년 인천상륙작전의 압도적인 기억에 가려져 망각되고 은폐된 또 다른 외국 군대의 '인천상륙작전'들이 있었음은 지금껏 간과해왔다.

1866년과 1871년 병인, 신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와 미국 군대의 강화도 상륙과 침탈은 그 아픈 역사의 시작이었다.

미국으로부터 포함외교를 본받은 메이지 일본은 1875년 8월 운요호(雲揚號)를 이끌고 조선 개항의 명분을 찾고자 도발했다. 강화 초지진에서 교전을 벌였던 운요오호는 초지진 상륙을 포기한 대신 남하하여 영종진(永宗鎭)을 포격하고 점령하였다.

상륙한 일본군은 40여명에 불과하였으나 조선군은 이조차 막아내지 못한 채 영종진 병사 중 35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대포와 군수품을 노획한 뒤 성내에 불을 질러 관아건물과 민가를 완전히 불타우고 나가사키로 귀환했다.

이후 일본의 메이지 언론은 <그림1>과 같은 자극적인 이미지로 일본 국민을 상대로 정한론을 일으키고 조선 개국의 강제적 명분으로 삼았다.

일본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894년 5월 갑오농민전쟁을 빌미로 인천에 대거 상륙한 일본 군대의 모습은 서양의 언론에 삽화와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풍도 앞바다에서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인천을 통해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킨 후 평양으로 진격하여 육군 대회전에서 승리한 이후로 만주와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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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일본군의 제물포 상륙을 보도한 영국의 한 화보신문 표지삽화 '동양의 전쟁'.
 
<그림2>는 일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영국의 화보신문 <그래픽>의 표지삽화다.

'동양의 전쟁'이라는 제목 하에 일본군의 상륙을 크게 보도한 해외언론의 관심은, 오랜 동아시아의 대제국 청의 몰락과 함께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 일본의 부상을 다루고 있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진 지 꼭 10년 후인 1904년 2월8일 밤,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일본 제1군이 야밤을 틈타 인천 제물포에 기습 상륙한 것은 불과 110년 전이다.(<그림3>)

치요다호를 위시한 일본함대가 2월9일 낮 제물포 앞 바다에서 세 척의 러시아 함을 격침시키면서 인천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뒤에는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의 뒤에는 독일과 프랑스가 후원했던 이 전쟁은 20세기의 서장을 연 사건이자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10년 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이었다.

뿐만아니라 이 전쟁은 청일전쟁으로 인해 와해된 중화체제를 대신할 20세기 새로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결정짓는 계기가 됐다.

만주와 한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전개된 이 전쟁에서 대한제국은 강제로 일본과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체결했으나, 1905년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곧바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국권을 상실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었던 일본이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자국의 군대를 해외에 파병하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다시 나아가고 있다.

악몽 같은 일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다시는 재연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현명한 대처가 긴요한 때이다.
 
▲ 그림 3-1904년 2월 9일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 육전대 병사들. 출처: The Russo-Japanese War(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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