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하와이 이민 개척자 안정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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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하와이 이민 개척자 안정수 (2)
  • 이성진(기독교사 연구자, 영화여자관광경영고 교사)
  • 승인 2014.07.0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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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미주에서의 독립운동과 그 평가
3. 하와이 이민과 그의 역할
 
1902년 11월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의 주도로 제물포에 하와이 이민대행 업체인 동서개발회사 본점이 세워지면서 안정수는 데실러의 통역직원으로 입사하였다. 존스 목사는 영어 실력이 탁월하고 성실한 안정수를 데쉴러에게 천거하여 제물포교회 권사인 장경화와 함께 동서개발회사 직원이 되어 하와이 이민 사업에 전력하도록 하였다. 데쉴러는 1903년 봄이 되기 전까지 하와이 이민단을 보내야만 한다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하여 1902년 12월까지 1차 하와이 이민단을 제물포항에서 출발을 시켜야 하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육정수, 개발회사분투사, 삼천리 1930. 4)
 

경인철도 기공식에 참석한 데쉴러로 추정되는 인물(좌측 두번째) 출처 : 패터슨
 
동서개발회사는 제물포에 본사를 두고 평양, 원산 등 전국 주요도시에 지점을 운영하였다. 확장한 지사를 관리할 직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한성순보 광고에 냈다. 이때 현순이 일본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와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하다가 하와이 이민을 간다는 조건으로 동서개발회사에 취직하면서 안정수와 재회하였다. 안정수는 현순, 육정수, 송언용, 장경화 등과 함께 하와이 이민을 한국인에게 권유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당시 오랜 기근으로 고통을 겪는 많은 한국인들이 먹기 살기 위해서 하와이 이민을 선호할 줄 알았던 데쉴러의 기대와는 달리 한국인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인에게는 먹고 살기 위해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땅을 떠나 낯선 이국땅으로 이민 간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데쉴러는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사가 시작되는 봄이 오기 전에 하와이 이민단이 도착하여야 하는 다급한 상황이 되었다. 데쉴러는 한국인들의 저조한 지원으로 인한 하와이 이민단 구성에 큰 차질을 빚게 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알렌 미국공사와 협의하였다. 알렌공사는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을 뿐 더러 불법적인 상행위로 법적 조치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을 때 도움을 받았던 존스목사가 나서서 하와이 이민을 독려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페터슨, 아메리카로 가는 길, 들불, 2003) (참조주-구전에 의하면 존스목사는 한국말은 너무 잘 한 선교사였고, 사형장 터 위에 집을 짓고 살아 당시 조선 귀신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양대인 귀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존스목사는 우각동 일대에 많은 부동산을 매입하여 중국인을 고용하여 서양채소를 재배, 양대인에게 판매하는 농장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존스는 미국에서 물건을 수입하여 조선인에게 직간접으로 판매하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집에도 할아버지가 축첩하고 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선교사에게서 미국제 재봉틀을 사서 준 적이 있는데 도둑이 들어 훔쳐 가는 바람에 할머니가 두고 아쉬워하는 얘기를 어릴 때 자주 들었다고 하였다. 1998년 창영동 **이발관에서 배다리 근처에서 3대째 살고 있으시다는 오모(당시 81세. 2001년 작고)옹가 어릴 때 집안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은 이야기라고 하시면서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알렌공사로부터 하와이 이민 지원 요청을 받은 존스 목사는 추운 겨울이 다가기 이전에 하와이 이민단을 보내야 하는 까닭에 1902년 12월 1차 하와이 이민단 출발 시한을 1개월 남짓 남은 기간 동안 제물포 교회 교인과 제물포항 노동자들에게 집중적으로 하와이 이민을 권유하고 설득하였다.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 출처 :한국이민사박물관
 
우리나라 사람 장경화, 안정수, 송언용, 현순들이 사무를 보면서 하와이의 사정을 방방곡에 널리 선전도 하며 각 시, 군과 각 항구에 이민 모집광고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혹은 반신반의하며 응모하는 수가 적었다. 이때에 인천항 용동의 기독교 교회당 목사 미국인 조지 허버 존스씨가 하와이의 형편과 참 사정을 시도들에게 설교하여 알렸더니, 이때에 그 교인 남녀 쉰 명 쯤과 함께 항내 노동자 스무명이 이민 가기를 자원하고 나섰다. (현순, <포와유람기>, 뿌리깊은나무, 1978.2)
 
존스목사는 한글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하와이 이민을 권유하면서 당시 기근으로 시달리고 있는 한국인에게 하와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비유하면서 하와이 이민을 적극 설득하였다.
 
하와이에서 노동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농장주들의 노력의 결과로 시작된 하와이 이주는 우리 (선교) 사역에 많은 걱정과 손실을 가져왔다. 우리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포함된 일반 노동자 계층뿐만 아니라, 교사들과 통역자들도 요구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러한 권유를 하는 것은 가난한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와이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믿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얼마동안 우리의 가장 잘 훈련된 사역자들을 모두 잃게 된 듯 하였다. 유일한 위로는 주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 하여 이들 농장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데 그들을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Annual Report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C.1903~1904)
 
존스목사는 제물포교회의 교인과 노동자들에게 하와이 이민을 권유하면서 영어에 대한 두려움은 안정수, 현순과 같은 유능한 사역자가 통역, 전도사로 따라 가기 때문에 언어에서 오는 어려움은 물론 신앙생활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김진형, 하와이 이민과 존스, 조원시 목사 학술대회자료, 인천 내리교회 2005.7.18, 4쪽) 결국 존스목사의 피나는 노력으로 인하여 안정수는 정인수와 함께 통역으로 1902년 12월22일 1차 하와이 이민단 102명을 이끌고 제물포항을 떠났다. 현순도 이듬해인 1903년 2월10일 2차 하와이 이민단 통역으로 90명을 이끌고 떠났다.
 
1902년 12월 22일 1차 하와이 이민단에 제물포 교회 교인과 제물포항 노동자가 대다수를 차지한 이유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의 요구인 봄철 사탕수수 농사가 시작되기 전 하와이 이민단이 하와이에 도착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요구를 들어 주기 위해서 존스목사가 제물포교회 교인과 제물포항 노동자들을 집중 설득, 권유하였기 때문이었다. 존스목사의 피나는 설득과 권유로 꾸려진 102명의 1차 하와이 이민단은 안정수, 장경화, 정인수 등이 인솔자가 되어 눈이 내리는 제물포항을 떠나 하와이로 활기차게 출발하였다.
 
그때는 추운 겨울이엇슴니다. 명년 봄 농사에 철이 맛게 보내느라고 국내에 널니 광고하여 제일차 이민 400명을 모집하여서 눈이 푸실푸실 내리는 날에 仁川부두를 火輪船을 타 출발식히엇슴니다. 그때 인솔자는 도포 이후 근 30년에 지금은 布蛙의 굴지하는 부호가 되엇다 전하는 안정수씨엇는데 400여 이주자는 부두에서 고국을 떠나면서 모다 조곰치도 슬퍼하는 빗을 아니보이고 장쾌하게 출발하더이다.(육정수, 개발회사분투사, 삼천리 1930. 4)
 
안정수는 제물포 교회 권사인 김이제와 함께 102명의 하와이 이민단을 하와이로 이끌고 가면서 갤릭호 안에서 매일 예배를 보았다. 이것을 미국 한인 감리교회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1903년 1월12일 호눌루루에 도착하여 존스목사의 연락을 받고 마중 나온 피어슨 하와이 감리사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일본 나가사키와 호눌룰루에서의 신체검사를 엄격한 통과하여 최종 하와이 땅을 밟은 하와이 이민은 86명이었다.(김찬희, 초기 미주 한인 이민의 역사, http://dev.umc.org/interior)
 

<첫 이민선을 탄 김이제 전도사 가족>

하와이 땅을 밟은 하와이 이민들은 오하우(Oahu)섬 Waialua Plantation에 있는 Mokuleia Camp에서 하와이 첫 생활을 시작하였다. 여기서도 이들은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예배를 보았다. 안정수는 사탕 농장 경영주 동맹회 노동부의 통역직원이 되어 영어를 하지 못하는 이민들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녔다.(김찬희, 같은 글) 그리고 제물포교회 우병길 권사(후에 윤병구로 개명)와 함께 호놀룰루 시내에 하와이 이민을 위한 교회를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여 1903년 11월 첫 주일 리버(River)와 스트리트 호텔(Hotel Street) 모퉁이 방을 빌려 한인 감리교 선교회(Korean Methodist Mission)의 이름으로 예배를 보았다. 이것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시작이었다.(이덕희, 하와이 이민 100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나?, 중앙 M&B, 2003. 79~80쪽) 1903년 2월 18일 제물포교회 구역전도사인 홍승하가 한인 감리교 선교회 담담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하와이에 왔다. 그리고 1905년 4월 한인 감리교 선교회는 최초의 공식 한인감리교회로 출발하였다.
 

하와이 제일한인감리교회

안정수는 1903년 8월 홍승하 전도사와 함께 하와이 교포 공동체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신민회를 조직하여 하와이를 선교와 함께 민족운동의 핵심체로 만드는 초석을 마련하였다. 신민회가 하와이 교포의 정치적 의식 박약과 내부분열로 진통을 겪다가 홍승하 전도사가 건강을 잃고 귀국하는 바람에 해체 되는 아픔을 겪지만 안정수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하와이 교포의 구국정신과 대동단결을 고취시키기에 힘썼다. (전인철, <크리스찬 주축 하와이 이민이 효시>, 한국기독교사, 1992. 7.22)
 
안정수는 바벨론 유수 이후 팔레스타인 밖으로 이산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신앙을 통하여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유지하였듯이 고국을 떠나 온 하와이 교포에게서 공동체의 형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유지, 조국과의 유대를 꾀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이영호, <하와이 이민과 인천>, 근대의 이민과 인천, 인천광역시, 2004, 2쪽)를 꿈꾸었다고 볼 수 있다.
 
4. 미국 본토로의 이주와 독립운동
 
1904년 말 안정수는 미국 본토에 사는 한인 교포선교를 위하여 문경호, 이교담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1905년 안정수는 박용만과 함께 지방 전도사로 임명받아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지역으로 이주하였다.(이덕희, 앞의책, 80쪽)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공립협회 창립에 직접 참여한 것 같다. 하와이에서 신민회가 실패를 직접 겪어본 안정수로서는 공립협회 결성을 통해서 동족상애, 환난상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정치적 운동기관을 만들고자 하였을 것이다. 1905년 11월 14일 공립협회 회관이 마련되었고, 11월20일 공립신보가 창간되었다.(김원용, 재미한인50년사. 혜안, 2004, 78쪽)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

그러나 안정수는 박용만과 함께 인종 차별이 심한 캘리포니아나 샌프란시스코보다 기독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으면서 인종 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은 네브라스카주로 이주하였다. 1906년 박용만이 네브라스카 대학교 헤스팅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자, 안정수도 곧 네브라스카 대학교에 입학하여 미국에서 학업을 시작하였다. 네브라스카는 1910년대 한인 유학생의 절대 다수가 집중되었던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1911년 미국 내 한인 유학생의 80%가 네브라스카에 집중된 것이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다.(북악사학회, <박용만-미주지역 항일무장투쟁론의 선구자>, 역사에 비춘 한국 근현대 인물, 백산출판사, 1995, 135쪽) 안정수는 한인 자치기관이 구성되어 있는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포사회와 연관을 맺으면서 틈틈이 방문하였다.(安氏 到布, 공립신보 1907.7.5.)

1907년 안정수는 네브라스카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이미 뉴욕에는 하와이 이민을 함께 온 윤병구(우병길)가 뉴욕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1907년 10월 안정수는 뉴욕에 있는 한인 교포들을 중심으로 하는 공제회를 구성하여 1905년 한일보호조약 이후 일본이 뉴욕 일본영사관을 통하여 한인 교포사회의 정세를 정탐하며 한인 교포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간섭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인구조사를 하는 것을 강력 저지하였다.(공립신보 1907.10.4/ 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 260~261쪽) 그러나 1908년 5월 안정수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안착하였다.
 
늬우욕 한인교회에서 뎐도?? 안졍슈씨가 거 이십사일 샹항에 안탹 ?얏더라(안씨 원??ㅣ, 공립신보 1908.5.6.
 
1908년 7월 8일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대표로 독립운동가 이승만을 영접하러 샌프란시스코역으로 나가기도 하였다.(영접 리학사, 공립신보 1908.7.8) 그러다가 1908년 12월 시카고로 이주하여 마치지 못한 대학공부를 위해 근처에 소재한 서북대학교(North-West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안씨 입학, 공립신보 1908.12.10)
 
안정수는 이후 오하이오주로 이주하여 그동안 중단한 학업을 시작하였다. 1916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하고(한인학생 일람표, 신한민보 1916.6.22) 그곳에서 미술상점을 개업하였는데 5,000원 정도의 진열품으로 시작하였지만 안정수의 탁월한 사업수완으로 영업이 날로 번창하였다.(안졍슈씨는 졸업후 미슐상뎜을 ?l셜, 신한민보 1918.1.24)
 
1918년 1월 캘리포니아주 정향주, 박기수와 함께 사업관계로 코리아선편으로 귀국하기도 하여 1919년 3월까지 체류하기도 하였다.(안졍슈씨의 회환, 신한민보 1919.4.12) 체류하는 동안에 당시 일제의 폭압적인 탄입에 시달리고 있는 민족현실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고 1919년 3.1 독립운동을 직접 목격한 안정수는 미국 한인사회에 진상을 재빨리 알리기 위하여 미국으로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절친한 친구인 현순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는 모습을 본 안정수는 일제에 대한 분노와 울분이 더했지만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맞서는 고국 동포에 크게 고무되어 미국 한인사회에 이 사실을 알리고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미국으로 귀환한 안정수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면서 긴박한 조국 현실을 알리기 위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안정수는 1919년 4월10일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우리는 대한 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을 성공할 민족이니 하느님이 졍의의 서시샤 우리 二千오?l 만 동포로 더부러 싸호시는 듕이오. 세계 형셰가 우리를 도읍는 동시 일본은 세계련?l회에셔 버셔나는 듕이니 우리의 앞길은 찬란한 셔광이 빗치온 하는 정즁한 마대에 일반의 일정한 긔상은 더욱 굳세히 떨치더라.(안졍슈씨의 연설을 듯고서, 신한민보 1919,4,19)
 
안정수는 자신이 직접 한인 교포가 있는 지역을 직접 다니면서 연설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개성출신 애국지사인 이기호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조국의 실상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여론 형성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모국 ?ㅐ성에 잇는 ?ㅐ국지사 리긔호씨는 나라를 사랑하며 동포를 구호하는 대의가 열렬하든바 거룩한 날 민죡 젼례의 대활동ㅇ이 니러 나면셔 그의 열정과 츙의를 더욱 높이 떰치는 ?ㅐ에 악독한 왜적의 참혹한 치욕이 신셩 민죡 부녀 사회에 까지 미침을 당하야 그 끌어오르는 열혈이 맛츰?ㅣ 나라를 위하야 피를 뿌려 순사 하얏다는 통신이 이 곧 안뎡슈씨의 부인에게 도착하얏다더라 (신한민보 1919.6.7. 지사 리긔호씨의 순사)

안정수는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경찰의 잔혹한 진압으로 인하여 피살당하거나 부상을 당한 고국 동포를 돕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구제합시다!, 공립신보 1919.6.10.)
 
또한 이창배, 박장술, 이준호 등과 함께 오하이주를 중심으로 긴박한 고국의 현실을 알리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한인 유학생들과 함께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한국 사정을 알리기 각 교회를 다녔다.(컬럼버쓰 한인학?l의 활동, 신한민보 1919.10.2) 그리고 1920년 3월 헐버트 박사를 초청하여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서 일제의 탄압에 신음하고 있는 한국사정을 알리면서 미국의 동정과 후원을 호소하는 행사를 갖기도 하였다.(헐벋박사는 오하요를 환긔, 신한민보 1920.3.12.)

이것은 안정수가 1918년 1월부터 1919년 3월까지 1년간의 고국 체류를 통해 일제하의 암담한 민족현실을 목격하고 미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고국을 돕는 일에 적극 나서기 시작하였고 조국의 독립 필요성을 미국 한인 교포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충실히 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안정수는 교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1919년 6월 오하이오주 콜롬버스에서 개최된 미이미교 백년기념 한인대표자로 참석하였다. (미이미교백년긔념회 한인대표자 二十명, 신한민보 1919.6.26.)(참조주-오하이오주 콜럼버쓰에서 개최한 미이미교회 선교 백주년 기념식에 한인교회 대표 20명이 참석하였다. 대표인사는 임정구, 김유순, 윤영선, 안정수, 김현구, 리춘호, 이병주, 정영도, 임주환, 김세봉, 양유찬, 신흥우, 김득수 등이다.) 안정수는 오하이오에서 미술상점을 운영하면서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안정수는 고국에서 귀환한 즉시 뉴욕으로 이주하여 오하이오주에서 미술상점을 운영하면서 벌은 자본금 10만원을 기반으로 중국향을 제조하는 회사를 설립하였다. 미국인들이 가정에서 중국향을 피우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중국향 제조회사를 세웠던 것이다. 안정수가 제조하여 판매한 중국향은 큰 반향을 일으켜 안정수의중국향 제조회사는 날로 번창하였다.(허헌, <東西 十二諸國을 보고 와서>, 별건곤 제7호, 1927.7)
 
紐育에 약 30만$(60만원)가는 朝鮮人 富者가 잇스니, 그는 安正洙氏라 氏가 富者가 된 經歷을 드르면 처음에 東洋에서 香木原料를 가저다가 香을 만들어 팔엇는데, 그것은 西洋가정에서도 마치 우리들이 萬壽香을 항상 방안에 피어 두드시 향불을 피워놋는 습관이 잇는 것을 着目하고서 씨가 제일 몬저 이 사업을 경영하기 시작하여서 크게 好評을 밧엇다는데 지금도 큰 공장을 짓고 흑인 노동자를 사용하여 가면서 크게 장사하고 잇섯다. 氏의 사업은 먼-장래까지 매우 有望하게 보이더라.(허헌: 世界一周記(第 二信), 삼천리 제2호 1929.9)
 
바쁜 사업일정 속에서도 대한인 국민회 뉴욕지방회 조직을 주도하였으며, 정인수, 신세헌과 함께 한민상회를 조직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사업이 날로 번창하였다. 이로 인해 안정수는 뉴욕 한인사회에서 사업이 유망한 유력 사업가로 주목을 받았다.(뉴욕 동포의 영업이 유망, 신한민보 1920.7.29.)
 
또한 안정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1920년 4월2일 뉴욕 대한인 국민회 지방회 창립 1주년 기념회에 참석하여 <국민자격과 국민회 드림>이라는 연설을 하여 한인 사회와 고국에 대한 뉴욕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을 고취하였다.(뉴욕디방회 일쥬년 긔념, 신한민보 1920.7.29.)
 
1921년 6월 상해 임시정부의 주미특명 전권공사이자 절친한 친구인 현순이 이승만에 의해서 파면되고 공금횡령으로 몰리는 어려움을 겪고 있을 시기에 안정수는 직접 나서서 현순을 변호하였다.(안정슈씨는 현순씨를 변호, 신한민보 1921.6.30) 그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승만은 상해에서 직접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나 유교적인 권위주의적 방법을 통해 일을 처리함으로 합의를 통해 일을 처리하던 임시정부의 관행과는 크게 부딪치면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현순은 상해 임시정부를 떠나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비밀자금을 요청하였다. 현순은 구미위원회를 다시 복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허가를 받아 임시정부의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현순은 탁월한 외교수완과 한국 감리교의 주일학교 총장으로서의 조직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본의 침략주의와 한국에서의 잔인한 만행에 대해 월슨 전 대통령, 캘빈 크릿지 부통령, 미정부 각료, 미국회 상하의원, 워싱턴 주재 외국대사들에게 호소하는 외교를 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미의회에서 현순의 요청 사항에 관련하여 청문회를 가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데이빗 현, 앞의책, 65~66쪽)
 
이에 이승만은 현순의 탁월한 외교능력에 자신의 지도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과 자신의 정치자금으로 사용하였던 구미위원회의 기금이 임시정부의 기금으로 돌려 질 것을 염려하여 현순을 주미특명 전권공사에서 파면하였다. 이승만은 현순이 날조된 신임장을 사용하고 기금을 횡령하고 대통령인 자신의 허가 없이 일하였다고 고발까지 하였다.(데이빗 현, 같은책, 67쪽)
 
안정수는 절친한 친구인 현순의 억울한 모함으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뉴욕 한인 교포를 상대로 적극적인 변명에 나섰다. 안정수는 즉각 공동회를 열어 모인 뉴욕 한인동포에게 이승만이 임효, 조병옥을 통해 서재필박사가 움직여 현순을 모함하도록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안정수는 공동회에 모인 뉴욕 한인동포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안졍수씨는 현순씨를 변호, 신한민보 1921.6.30) 안정수는 감리교 목사인 친구 현순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고 현순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안정수는 현순에게 하와이로 다시 돌아가 목회자의 길로 걷도록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1922년 4월 18일 안정수는 뉴욕에 사는 한인들이 예배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뉴욕 한인회, 흥사단, 한인학생회, 동지회, 대한인국민회 뉴욕 지방회 등의 단체들에게 각종 활동 장소를 제공할 수 있는 뉴욕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김홍기, 미주한인감리교회백년사 1권, 기독교대한김리회 홍보출판국, 2003, 135쪽) 안정수는 뉴욕 한인감리교회를 3.1절, 8.29 국치일, 신년축회 등 뉴욕 한인 교포들의 대내외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하여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실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써 뉴욕 한인감리교회는 한인 유학생 중심으로 민족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교회로 일본 뉴욕영사관의 감시대상이 될 정도였다. 이 중심에 서 있던 인물 중 하나가 안정수였다.(김홍기, 앞의 책, 135쪽)
 
1924년 12월 10일 안정수는 뉴욕 한인교민단 설립하였다. 안정수는 뉴욕 한인교민단을 통하여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 등에 고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이 만든 구미위원회를 적극 후원하였다. 뉴욕 한인 교민단을 설립함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체계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인구세 징수, 애국공채 발행 등의 모금활동을 하였다.
 
1924년 12월 10일에 뉴욕 시에서 안정수, 홍득수, 리봉수, 송세인, 신성구, 허정, 리진일 들의 발기로 뉴욕 한인교민단을 설립하였으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교류동포를 규합하여 친목을 증진하며 정치행사에는 구미위원부 사업을 후원하기로 하였다.(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 혜안, 2004. 164쪽)
 
또한 1920년대 후반 미국 전역에 불어 닥친 대공황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인 유학생들을 돕기 위하여 한국 선교사였던 노블선교사, 존스선교사 부인들이 미국인 여성후원회를 구성하자,(김홍기, 앞의책, 157쪽) 안정수는 뉴욕한인감리교회를 한인유학생들의 숙소로 제공하도록 하였으며, 특히 한인 유학생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한 다음부터는 그가 운영하는 안씨 중국향 제조회사에서 제조한 향을 판매하도록 지원하여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도록 하였다.(정일형, 오직 한 길로, 을지서적, 1988, 75쪽) 그로 인하여 뉴욕은 한인 유학생들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안정수는 중국향 제조회사를 통해서 재산을 크게 모았지만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국 독립운동을 위하여 구미위원회 지원뿐만 아니라 조국 동포들의 어려움을 돕기 위한 모금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7월 조선 적십자사를 돕는 행사에 참여하여 의무금 5원을 내기도 하였다. (의무금, 신한민보 1919.7.26) 1920년 11월 안정수는 현순이 직접 관장하고 있었던 구미위원회에 공채금 25원을 기부하여 (공채금, 신한민보 1921.1.20)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해 임시정부를 돕도록 하였다. 1921년 3월 간도 동포 참상 구제금을 5원 기부하였고, (간도챰상 구제금, 신한민보 1921.3.24) 열강회에 대한 특별연조에도 참여하여 100원을 내기도 하였다.(령강회에 대한 특별연조, 신한민보 1921.8.18) 1933년 서울 보성전문학교 개교 30주년을 맞이하여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강당, 체육관 건설 기금을 모금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보전기념 사업회 뉴욕지회를 조직하고 회계를 맡아 일을 하기도 하였다. (普專긔념 사업에 在美同胞 積極 後援, 조선중앙일보 1933.10.24)

안정수는 1930년대 중반에 벌써 미국 이민 30년 여년 기간 동안 수많은 재산을 모은 입지 인물로 뉴욕 한인사회에서 다방면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유력인사로 존경을 받았다.(구자옥: 미주에서 활약하는 白衣人才, 요지간은 엇든 분들이 사회에서 활약 하는고, 호수 제8권 1호, 1936. 1)
 
 
5. 결론
 
안정수는 1902년 12월 1차 하와이 이민단 통역사로 미국으로 이민을 와 조국 광복과 한인사회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평생 몸과 물질로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사업가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한인사회에 귀감이 되는 사업가이기도 한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안정수는 미국 최초의 한인교회인 하와이 한인감리교회를 개척함으로 이후 미국 한인사회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코리아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일은 안정수가 1940년 7월 31일 뉴욕 주립병원에서 급성맹장염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안정수씨 별세상보, 신한민보 1940.8.15)
 
안정수의 삶은 크게 네 부분을 나눠 볼 수 있다.
 
첫째, 한성 영어학교에서의 학업을 통해서 서양에 관한 기초적인 소양을 쌓음으로 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졌던 지식인으로 성장하였다. 졸업 후, 제물포 해관에서의 근무생활, 하와이 이민 사업 주도적 역할, 1차 하와이 이민단 인솔 등을 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을 이 시기에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현순과의 교분을 통해 민족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의 민족운동 전개 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둘째, 제물포에서의 삶이다. 제물포 해관에 취직함과 동시에 제물포교회 존스목사를 만남으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여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영화학교 영어교사로 겸임하면서 근대학교의 체제로 변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 하였고, 제물포교회 권사로서, 엡웻 청년회 통신부장으로 신실한 신앙생활과 더불어 민족의식을 구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와이민 사업에 실무적인 일을 주도하였으며, 1차 하와이 이민단의 통역으로 102명을 인솔하는 책임도 맡았다.
 
셋째, 미국에서의 민족운동이다. 하와이 이민단을 인솔하여 미국에 정착한 후에도 하와이 교포사회의 민족 공동체성을 갖도록 하는 교포 조직운동과 3.1운동에서의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리고, 미국 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재정적인 지원을 통하여 민족독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근면함을 최대한 활용하여 사업에도 크게 성공하여 미국 교포사회에서도 입지적인 인물로 추앙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고국 동포를 돕는 일에도 적극 앞장서기도 하였다.
 
넷째, 미국에서의 신앙생활이다. 안정수는 1902년 12월 제물포항에서 갤릭호를 타고 102명의 하와이 이민단을 인솔하여 하와이로 가는 도중에도 계속 예배를 인도하였다. 처음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로 떠나는 불안감을 예배를 통해 극복하도록 인도하였다. 하와이에 도착하여서는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해외 최초의 한인교회를 설립하여 오늘날 미국 이민 사회가 교회를 중심하는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04년 말 미국 본토로 이주하여서는 박용만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선교에 주력하였고, 뉴욕으로 이주하여 1922년 뉴욕 한인교회를 창립하여 1920년 말부터 한인 유학생들의 활동 중심지가 되도록 하여 신앙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하는 밑거름을 마련하였다.
 
안정수는 이승만, 박용만, 서재필,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 한인 독립운동 연구 흐름에 밀려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이 논고를 통해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안정수의 삶이 단순히 초기 하와이 이민사에서 통역사로, 해외 최초의 한인교회 개척자, 뉴욕 감리교회 개척 공로자 뿐만 아니라 민족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조명하여 보았다. 그러나 안정수에 대한 자료의 수집에 한계가 있는 관계로 보다 많은 자료가 수집되고 정리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해 본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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