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그 누구도 승자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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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그 누구도 승자일 수 없다”
  • 배영수
  • 승인 2014.07.1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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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듣는 세상 4

요즘 국제 카테고리 뉴스를 매일같이 장식하고 있는 소식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습에 대한 기사들입니다.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구들을 향해, 이스라엘 본정부가 미사일과 포탄을 쏘아 올리면서 시작된 이 공습은 이미 사진으로도 어린아이가 타죽거나 잔혹하게 죽은 주검들이 보도되면서 국제사회에 커다란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들에 대한 국내 네티즌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스라엘 죽일 놈들”입니다. 80년대 아니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거꾸로 “팔레스타인 죽일 놈들”이었는데 근래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탈(脫) 미국 중심주의와 반(反)기독교 운동이 확산되면서 20여년 사이 완전히 분위기는 바뀌어 있죠. 헌데 그 바뀌는 분위기의 과정들을 가만히 보면 무언가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수는 예나 지금이나 극히 적다는 게 놀랍습니다. 중간에서 냉철하게 꼬집어주는 사람이 없이 분위기에 따라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모양새란 말이죠. 사실 이 분쟁에 대해서는 보다 냉철한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그러니까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민족(구약성경의 ‘블레셋 민족’이 이에 해당하죠)의 분리는 성서, 그러니까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도 자세히 그 기원이 서술돼 있습니다. 요즘엔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1년에 성서 한 번을 완독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보니 어디에 나오는지 모르는 ‘무늬만 교회 다니는 크리스천’들이 부지기수일 테니 그런 분들을 위해 언급하자면 창세기의 15~21장까지의 기록에 바로 이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죠. 신 여호와는 구약성서의 인물 아브라함(당시 아브람)에게 자손을 주고 큰 민족을 이루어 줄 것을 약속했지만, 당시 그의 아내 사라(당시 이름 사래)가 아기를 갖지 못하는 몸이었음을 알게 되자 성급한 마음에 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데리고 있던 첩 하갈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됐습니다.(성서의 인물이 여러 아내를 거느린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타민족의 생활 풍습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처사일 테죠. 당시 일부다처제는 이 민족의 관습 가운데 하나였으니까요.) 이 아들의 이름이 ‘육체를 따라 낳은 자’라는 이름의 ‘이스마엘’이었고, 신이 그에게 약속한 아들은 이후 사라가 아브라함과의 사이에서 아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한 신의 배려로 태어난 인물, 바로 ‘이삭’입니다. 신은 이삭을 통해 민족을 형성케 했고 이것이 현재의 유대민족이 되는 것이죠.
 
문제는 이 두 아들 중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놀리고 조롱하면서 시작됩니다. 두 아들이 한 집안에서 함께 할 수 없음이 드러나면서, 신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첩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쫓도록 합니다. 같이 두면 집안 자체가 풍비박산이 날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 대신, 쫓겨나는 자신의 아들을 걱정하는 아브라함에게 신은 한 가지 약속을 합니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니 그를 통해서도 큰 민족을 허락하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약속대로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신의 보호 아래 성장하며 그 역시 큰 민족을 이루게 되는데, 현재의 팔레스타인 민족이 바로 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성서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이나, 모두 구약성서의 신 여호와가 민족의 정체성과 존재 자체를 허락했다는 충분한 논거가 됩니다. 이후에 이 두 민족이 자신들의 공격이나 테러에 대한 합리화를 위해 논거로 제시하는, 이를테면 영토가 어쩌고 저쩌고 하며 “원래는 여긴 우리 땅이었어” 하는 류의 문제들은 사실 부차적인 사항에 해당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서의 가르침대로라면, 이 둘은 공존 체제 하에서 각자의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해 갔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아닌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신의 가르침을 거스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근본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수니파(현 팔레스타인 정부 하마스 역시 이에 해당됩니다)’로 대표되는 이슬람 원리주의, 그리고 흔히 ‘순복음주의자’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근본주의를 따르는 두 강경파의 충돌, 이것이 지금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근본 뿌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주의와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잔인하고 어마무시합니다.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고 연장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다른 민족 다른 종교들을 아예 몰살시켜 세상에서 아예 없애버리자는 게 이들의 목표거든요. 강점기 시절의 일제 우리에게 행했던 ‘민족말살정책’과 가히 비슷한 사상인 거죠.
 
실례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합병하지 않는지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만,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전쟁하지 않는 방식의 합병으로 팔레스타인을 껴안고 가면 그 안에서도 팔레스타인의 사상이 꽃피우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에, 분쟁으로 계속 끌고 가면서 그들이 모두 죽어 없어질 때까지 공습에 공습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힘을 받지 못해 그렇지, 팔레스타인도 사실은 이와 마찬가지 논리로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아예 말살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둘이 툭하면 미사일에 포탄을 터뜨리면서 시민들이 죽으면서 길거리가 사람들의 도살장으로 변해도 전혀 개의치를 않는 것입니다. 어차피 일반인들도 이 둘의 시각으로는 다른 민족 사상을 갖고 있는 ‘불순분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이 두 강경파 모두 기독교의 신 여호와, 그리고 이슬람교의 신 알라가 이야기하는 선함과 지혜로움, 자비함의 모습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시각에서도, 그리고 이슬람의 시각에서도 이 둘은 모두 각자가 가진 성서(성경과 코란)의 가르침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죠. 이슬람의 경우 지하드의 의미를 폭력투쟁으로 변질 해석한 수니파들이 대표적이며, 기독교의 경우 ‘땅밟기’와 같은 가히 주술적이기까지 한 움직임을 보이는 인터콥 혹은 국내에서도 활발한 예수전도단 등의 단체들이 이러한 강경파에 해당됩니다. 총기를 들고 그 무력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며 걸핏하면 살육도 마다하지 않는 수니파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는 곳을 직접 밟아야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성서 어디에도 그런 가르침이 없는 이상한 거짓 메시지를 전하는 땅밟기 같은 건 모두 자신들의 종교 자체를 욕되게 하는 행위들인 것이죠. 성도가 땅을 직접 밟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하고, 믿지 않는 자들과 무슨 스트리트 파이터처럼 1:1로 영적 싸움을 해야 한다는 소위 ‘샤머니즘 사상’에 가까운 이런 얘긴 도대체 어디서 꺼내온 건지 신학대학을 나온 저조차도 의아할 정도입니다.
 
뭐, 인천 시민들이 주로 정독하고 한글 언어만을 사용해서 글을 써야 하는 이 지면에서, 저같은 사람이 이런 이야길 한다고 이미 국제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과 공습이 해결되지는 않을 테죠.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이 양쪽의 주장들이 좀 우스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테러를 일삼는 악의 무리들을 절대 용서치 않을 거라며 “결국 승자는 우리가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천명하고 있고, 총기무장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하마스는 그들대로 민족적 승리를 자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그 누구도 승자일 수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겉과 속은 모두 파괴되고, 이내 황폐해지죠. 목숨만 붙었을 뿐, 모두가 패자이며 죽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과연 기독교의 여호와, 이슬람의 알라와 같은 절대자들이 소망했던 것이었을까요? 단언하건대 ‘절대’ 아닙니다!
 
* 아래 영상은 1916년 부활절 봉기에 의한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인해 영국과 아일랜드 간에 발생한 희생자들과 주변의 참혹한 모습을 모티브로, 아일랜드의 록 밴드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가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담아 만든 곡입니다. “너의 머릿속에서 그들은 탱크와 폭탄과 총으로 무장하고 싸움을 벌인다. 너의 머릿속에서 그들은 울부짖는다. 너의 머릿속에는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좀비”라는 가사를 살펴보면, 총칼을 들고 그 총칼 앞에서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 좀비와 같은 끔찍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1994년 9월 발매된 이 싱글은 독일과 덴마크 등 주요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빌보드] 모던 록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으며, 이 곡이 담긴 그들의 두 번째 앨범 [No Need to Argue]는 유럽과 미국 음반 시장에서 도합 1,200만 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The Cranberries - Zombie
 
http://www.youtube.com/watch?v=6Ejga4kJU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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