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각국거리'는 조선인 마을이 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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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각국거리'는 조선인 마을이 있던 곳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07.17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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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까지 길조차 뚫리지 않은 곳으로 확인돼
인천의 역사, 문화계가 '개항 각국거리 조성사업'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곳이 실제로 개항기 때 '각국공동조계' 지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외국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역사적 실상까지 왜곡하면서 유서깊은 도시가로를 겉만 치장해 상업적 개발을 노린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현로 39번길은 개항 당시에 각국공동조계 바깥에 위치한 조선인마을이 위치했던 곳이다.  이곳의 바로 위쪽에는 제물포 개항장의 조선 행정기관이었던 감리서가 위치해 있던 곳이다.

1898년 출간된 <신찬인천사정>에 수록된 인천조계지도를 보면, 개항 15년이 지나서도 이곳에는 '우현로 39번길'에 해당하는 길조차 뚫리지도 않은 곳으로 나타나고 있다.(아래 지도 푸른 원 지역)
 

1898년 출간된 <신찬인천사정>에 수록된 인천거류지도(오른쪽 푸른색 원 부분이 아직 도로 개설이 이루어지지 않은 '우현로39번길' 지역, 바로 위 삼각형 지역이 인천감리서가 위치한 곳이다.

위 지도에서 하늘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각국공동조계 지역이고, 분홍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일본전관조계 지역이다. 노란색은 청국전관조계 지역이고 갈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바로 조선인지계 지역이다. 푸른색 원 안에 있어야 할 우현로39번길은 아직 뚫리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이 일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도 남아 있다. 인천감리서와 함께 조선인 마을이 초가를 이루고 있는 아래의 사진이 바로 지금의 신포시장과 '우현로 39번길' 일대다.
 

1900년대 초 인천감리아문과 조선인마을의 모습. 그 뒤로 지금의 자유공원인 응봉산 일대가 보인다.

당시 인천감리서에는 청년 김창수(훗날의 백범 김구)가 황해도에서 일본 밀정을 살해하고 개항장 재판소로 이감해와 감리서 감옥에 갇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지역사회에서는 수년 전부터 인천 감리서를 백범기념관으로 조성하자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현로 39번길은 언제 뚫렸을까? 지금의 우현로 39번길은 일제에 의해 러일전쟁 전후하여 조선인 마을의 일부를 철거하면서 일본인들이 길을 뚫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인천부 지도에 와서야 비로소 현재의 '우현로 39번길'이 표시되고 있다. 당시 이 길이 위치했던 곳에는 신마찌(新町) 3정목으로 표시돼 있는데, '신마찌'는 새로 조성된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천항시가도(1911)에 나타난 신정3정목길(붉은색 표시, 지금의 '우현로 39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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