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 동시가 일깨우는 의로운 아버지 - 김병규 단편 아동소설 <아버지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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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 동시가 일깨우는 의로운 아버지 - 김병규 단편 아동소설 <아버지에 대한 연구>
  • 이한수 선생님
  • 승인 2015.05.13 16:2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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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 선생님의 교실밖 감성교육] 제26회
 
 

잔혹 동시로 이 나라 부모님들 모두가 우울감에 빠진 듯합니다. 읽어보라고 보내준 지인(知人)이 여럿이었고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선생님들 사이에 설왕설래 말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어떻게 이런 글을 책으로 내놓을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그 부모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이구동성이었습니다. 학생들도 어찌 초등학생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답니다. 저도 시 구절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엄마 눈깔을 파먹어”를 처음 접했을 때 얼른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입에 올리기도 싫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얘기로 왁자지껄 떠들 땐 입을 닫고 모른척했습니다. 요즘 동심이 너무 끔찍하다 싶어 우울했습니다. 공감교육이고 뭐고 다 부질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멘붕 상태에 빠질 것 같았습니다.
 
경쟁에서 앞선 자 몇몇만 건져 올리고 나머지는 가라앉든 말든 외면하는 건 불의한 것이지 않습니까. 불의를 보고 불의하다고 말하는 건 인성(人性)의 기본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가르쳐 오지 않았습니까. 끔찍한 표현만 지적하는 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끔찍한 속마음을 내어놓는 그 용기야말로 정의로운 자기 헌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저 하나를 위해 그렇게 정성을 들였는데 감사하기는커녕 원한을 품다니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싶겠지만 이 시대 부모의 자식 사랑이 이렇게 끔찍할 수도 있구나 하는 반성적 고찰의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인간적인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지, 사랑은 어떻게 공감될 수 있는지 되짚어 봐야 할 듯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성을 다했는데 그 사랑으로 상처를 받은 적이 있을 겁니다. 가족을 위해 성의를 다했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성가시다고 하면 정말 상처받습니다. 배신감마저 들겠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려면 먼저 그가 뭘 원하는지 살펴야 하잖아요. 내 딴엔 위한다고 하지만 그게 위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옥죄는 것일 수 있답니다. 맞아요. 제 눈에 보기 좋다고 내 취향도 아닌 옷을 억지로 입으라고 하면 고마울 리가 없지요. 그러니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고집이요 독선일 뿐이지요. 정말 사랑한다면 그 귀한 걸 의로운 일에 선뜻 내어놓는다고 미워질 리 없지요. 오히려 내 사랑이 더 아름다워지는 꼴이니 백 배 더 감사해야지요.
 
생일상을 차리느라 고생했는데 사전에 말도 없이 보육원 아이들을 불러들여 생일상이며 생일 선물까지 내어주는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아버지입니까. 이런 아버지와 같이 사는 가족들은 참 힘들 것 같아요. 아버지의 선한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내 성의가 무시당한 것 같고, 나보다 남의 애들한테 더 각별한 것 같아서 서운한 게 인지상정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무심해 보이는 아버지가 실상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진실하다고 봅니다. 자식이 남보다 잘나서 부모 낯을 세웠으면 하는 욕심이 있으면 이러지 못하지요. 자식이 잘나든 못나든 사랑이야 한결같은 것이잖아요. 세상 그늘진 곳에 눈길을 주는 착한 마음으로 자식도 품는 게 진실한 사랑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운한 마음이 눈앞을 가려 그 진실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뭐든 다 그렇겠지만 참다운 건 눈에 잘 보이지 않잖아요. ‘세만’이는 참 다행입니다.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너희 아버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니까?”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속상하면 늘 이렇게 투덜거리지요.
아버지가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했거나, 좀 엉뚱한 일을 저지르거나, 또는 신신당부한 일을 깜빡 잊어버렸을 때, 어머니는 하소연하듯 이 말을 했어요..
지난 해 아버지의 생일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머니가 하루 전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장만한 요리들이 그들먹했어요. 그 비좁은 식탁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미역국 그릇을 식구 수대로 올려놓은 것으로 상차림이 끝났어요.
세만이와 동생 예미가 식탁 앞에 앉아 기다렸어요. 어머니가 콧등에 송송 돋은 땀을 손가락으로 찍어내며 아버지를 불렀어요.
“여보, 어서 오세요.”
그런데 아버지는 웬일인지 “알았어요. 잠깐만!”을 되풀이하며 꾸물거렸어요.
초인종이 울린 것은 그 때였어요. 얼른 나가서 문을 연 아버지가 “어서들 오너라.” 하며 맞아들인 손님은 낯선 형들 다섯이었어요. 세만이보다 두서넛 학년 위인 5,6학년쯤 되어 보였어요. 어머니는 무슨 일이냐고 묻듯이 아버지를 바라보았어요.
“내 생일에 초대한 친구들이야. 자, 이리들 앉아라.”
식탁은 그들 차지가 되어버렸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가 가끔 자원 봉사하러 가는 보육원의 형들이었어요.
이들은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싹 비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가족들은 바닥에 딴 상을 차려서 겨우 아침을 먹어야 했어요.
더 기막힌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어요. 아버지는 가족들한테 받은 생일 선물을 그 형들에게 죄다 나눠주는 것이었어요. 어머니가 큰마음 먹고 백화점에서 고르고 골라서 산 목도리는 작고 허약해 보이는 아이의 목에 감아 주는데 참 잘 어울렸어요. 아들딸의 선물인 야구 모자와 양말, 그리고 친구한테 받았다는 지갑들을 골고루 나눠 주었어요.
그 손님들을 배웅하고 나서 아버지는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어요.
“아, 정말 멋진 생일이야. 도와줘서 고마워.”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셔야할 것 아니어요.”
어머니가 가는 한숨을 쉬며 아버지를 나무랐어요.
“그러면 김이 세지. 자연스럽지 못하고, 이런 생생한 감동도 없을 테고.”
“선물로 넥타이를 안 산 게 다행이군요. 당신이란 사람, 정말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이 말 한 마디로 그날 사건을 마무리 지었어요. 가족을 남만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도로 삼키는 게 분명했어요. 아마 아버지의 생일이라서 많이 봐주는 모양이었어요.
 
친근한 아버지와 경외감(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드는 아버지 중 어떤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까요. 우리 사회는 오래 전부터 이 문제로 고민해온 소중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애들까지도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 웬만하면 다 압니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는 의(義)가 먼저인지 친(親)이 먼저인지 수천 년 고민을 해 왔다는 것이지요. ‘의(義)’가 무엇인가요.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의(義)’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건 참 반가운 일입니다만 우리는 이 얘기를 수천 년 해왔습니다. ‘센델’ 교수가 ‘미덕’이라고 말한 정의의 요소는 글자 ‘의(義)’ 속에 이미 새겨져 있었습니다. ‘양(羊)’은 제물로 쓰는 희생양이라는 의미이고 ‘나(我)’와 결합하여 ‘의(義)’는 ‘나를 희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는 건 참사랑이 아니며 의로운 심성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참 어려운 얘기를 먼 옛날에 벌써 했던 겁니다. 수천 년 세월이 흐르면서 뭔가 더 나아진 게 있기나 한 건가요.
 
선조들은 ‘의(義)’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자식과 소원해지는 게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일깨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 자식 사이에 친근함이 없다면 그 뜻이 전해질 리가 없지요. 그래서 부자지간은 ‘친(親)’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모양입니다. 나무(木) 위에 올라서서(立) 바라본다(見), 즉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이렇게 기다리는 게 참다운 교육이요 참사랑이란 걸 더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자꾸 어려운 한자어를 꺼내 무람하지만 도덕경에 기막힌 구절이 있어 묻어둘 수가 없습니다. 그 깊은 뜻이야 한량없겠지만 저는 이 구절을 배움의 수준을 잘 구분해 준 통찰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도덕경 38장에 ‘인(仁)’을 잃으면 ‘의(義)’를 강조하고(失仁以後義) ‘의(義)’를 잃으면 ‘예(禮)’를 강조하게 된다(失義而後禮)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어질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게 안 되니까 시비를 따지고 나중에는 처벌(法)까지 하게 되는 거잖습니까. 선행을 하더라도 남의 눈에 띄길 바라면 그건 어진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니 참다운 어짊(仁)이 아니란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도덕인의예법((道德仁義禮法)’을 배움의 수준으로 마음에 새기고 싶었습니다. 가장 높은 수준은 가르치려는 의도를 갖지 말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데 그게 감동을 주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수준은 벌칙을 정해놓고 어기면 벌을 내리는 것이랍니다.
 
의로움(義)이 어진 마음(仁)과 더불어 거슬리지 않으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도 공감이 되어 스스로 배움(德)이 있을진데, 어린 아이의 동시가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떠들썩하게 만든 건 아쉬운 게 맞습니다. 참다운 배움은 그렇게 별스럽지 않으니(上德不德) 말입니다. 그런데 의(義)를 보지 않고 그 무례(無禮)만 탓하는 어른들의 처사는 아이의 시심(詩心)에 미치지 못하는 격입니다. 아이의 비범한 재능을 운운하는 건 더 가소로운 게 아닐까요. 재능으로 서열을 짓고 징벌(法)로 다스리는 게 능사인 이 저급한 사회에 의(義)를 환기시킨 동심에 고개를 숙입니다.


인성여자고등학교 이한수 선생님
블로그 http://blog.daum.net/2ha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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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2015-05-13 18:08:17
너무 좋은 글 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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