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위에 그리는 '부평연와',그 시절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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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위에 그리는 '부평연와',그 시절의 흔적들
  • 강영희 객원기자
  • 승인 2015.10.06 16: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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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 인천, 영희의 고향 이야기>②부개동의 기억

웅진플레이도시 건너편, 6단지 버스정류장이 우리집터야!

지난 한가위 차례를 지내고 가까이 사는 8촌 친척 집 차례를 지내러 갔다. 예전에 살던 마을에서도 2~3백미터 떨어져 있던 그 집으로 차례를 가곤했다. 2남 3녀의 조카뻘 학렬을 가진 친척집이었는데 시끌벅적한 집안 분위기가 좋았는지 한동안 그 곳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1990년 10월 2일 웅진플레이도시가 생긴 그 길의 옛 모습
<1990년 10월 2일 추석 전날> 왼쪽 공장은 ‘제일공업사’라는 빠우치는 공장이라고 했다. 아마도 스테인레스 그릇에 광을 내는 일이었는데 빠우 공장 특유의 냄새가 있다. 끄트머리 차 두 대가 있고, 이정표가 있던 곳이 삼거리인데 직진으로 보이는 곳이 김포방향, 이정표가 있는 곳이 서울방향 길이었다. 명진이 오빠네는 그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 근처였는데 쌀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옆에 중국집도 하나 있었다.사진_강. 필름.


차례를 지내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평연와-벽돌공장'이 있던 우리 마을 이야기를 꺼냈다. 기억은 좀 달랐다. 나 보다 3살 많은 명진 오빠(조카님이라 부른다)는 조금 더 자세히 마을을 기억했다. 우리 동네 흔적을?거의 찾아볼 수 없게 사라진 지금도 '웅진 플레이 도시' 건너편 부개주공 6단지 옆 버스 정류장이 자신이 살았던 집터라며 이야기를 꺼낸다.

옛날 마을 이곳저곳의 위치가 대략 지금의 어디어디라며 이야기를 하는데 좀 놀라웠다. 옛 모습은 사라졌어도 나는 거의 기억 못하고 있는 흙산 뒷 동네 이야기, 벽돌공장 기계창(흙으로 벽돌을 만들어내던 곳), 지금의 부개초교까지 다니던 길에 있었던 송신소며, 철길까지 아직 부개역이 없었던 시절 ...

1969년 부개동 송신소 가는 길
<1969년 부개동 송신소 가는 길> 부개초교를 다니던 언니나 오빠들은 이 길을 기억한다.사진_ 촬영 곽준석/ 제공 부평역사박물관.

"말을 하고, 지도를 그려보니 기억이 나네. 신기하다." 높이 치솟은 외곽순환도로 교각이 세워지던 곳이 어떤 자리며, 한강에서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끌어들인 물이 냇가를 이뤄 마을의 꽤 여러 곳을 지났다는 이야기까지 꺼집어내는 것이 아닌가 . '흙타무지'라고 불렀다는 기억에서는 다들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를 쳤다.

강원도 탄광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이곳, 부개동에 땅을 사고 집을 지어놓고 글쓴이 아버지를 인천으로 부르고, 당신도 3년 후 마을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오시니 당신 형제들도 따라왔고, 부천에 사시던 고모 네도 인근에 살게되었다. 술을 많이 드셨던 시홍 오빠 - 그 형제들의 아버지는 나의 오빠뻘 학렬이다.- 때문에 속상했던 언니가 차마 친정집으로는 못가고 시골 시댁에 갔다가 우리 아버지 손을 잡고 엄마를 찾으러 갔던 오빠와 길이 엇갈렸던 이야기, 그 언니가 시골 시댁에 내려간 3일째 되던 날 사과 한 박스를 내놓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들이?이어졌다.

가난한 동네에서 다들 술은 왜 그렇게 많이들 드셨는지, 조카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아름드리 수양버들 아래 있던 담뱃가게 할아버지 댁에서 노란 주전자에 한 가득 퍼주시는 막걸리. 흔들리는 걸음에 흘리게 되면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홀짝홀짝 마시던 막걸리는 참 달았다는 이야기.

공간 하나하나의 기억은 그렇게 그들 삶, 어딘가의 무의식을 건드려 켜켜이 쌓인 추억을 쏟아놓게 만든다. 그래서 공간은 이제 그저 땅이 아니게 되는 거 같다.


부개동 철도 건널목
‘부개동 철도 건널목’으로 가던 길. 지금의 <부개역>이 있는 부근으로, 80년에 초반 고가도로가 생기며 사라졌다. 사진_곽준석, 제공_부평역사박물관


우리 마을 도랑에도 맑은 물이 흘렀다.

부평여중과 부평동중 샛길은 마을에서 논과 밭을 지나 부평시장으로 걸어가는 길이였는데 이 길 옆으로 작은 천이 흘렀고, 나중에 복개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을 듣고 나니 우리 동네(부천시 상동과 인천시 부개동)를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르던 길 옆으로도 길을 따라 작은 개천-도랑이라 불렀다-이 있었던 기억도 났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송내 인근에 있던 양어장이 넘쳐 우리 동네 개천까지 물고기-금붕어 같은 것들이 흘러왔고, 종종 그 물고기들을 병에 담아 기르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후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주변에 논밭이 많아 자연스럽게 따뜻한 계절이면 미꾸라지가 바가지로 퍼낼 정도로 많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도시 한 가운데 도랑에 금붕어야 양어장에서 왔다 치더라도 바가지로 퍼낼 만큼 많았던 미꾸라지는 어디서 왔을까? 오빠는 그것까지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도랑에 비가 많이 쏟아져 넘치게 되는 여름이면 아랫동네-신상리와 김포쪽 사람들이 옷가지와 이불 같은 것을 이고 지고 동중학교에서 지내곤 했다.

그 물길은 한강에서 끌어 온 물길이라고 했다. 부평이 평야였던 만큼 논과 밭들 사이로 꽤 많은 물길이 있었던 거 같다. 필자가 중학교 쯤 들어갔을 때 폐수가 흐르던 천은 점점 좁아지고 작아지더니 '노깡'이라 불리던 토관으로 물 통로를 만들고 덮어버렸다. 그 물은 아직도 그 땅속에서 흐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래서?물이 흐르던 인천, 다시 물이 흐르는 고장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평여고를 다닐 때 유일하게 도시 한 가운데를 흐르던 굴포천이 학교 옆으로 흘러 ‘검은 세느강’이라 불리고 있었다.


벽돌막 마을로 들어가는 12번 버스 종점

1976년 지도를 보면 아스팔트길이 끊긴다. 그래서 12번 시내버스의 종점이기도 했다. 어려서는 버스를 타고 다닌 일이 거의 없어서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가끔 어린 나와 여동생을 데리고 버스를 타시곤 버스 안내양에게 "애들인데 무슨 돈을 다 받냐"며 실갱이를 하시던?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종이로 된 버스표, 열린 버스 문에 매달려 차를 '퉁퉁'치며 버스 뒷문을 닫으면서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 안내양 언니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12번 종점이 있던 부근에는 신라목욕탕, 동중원이라는 짜장면집, 명절이면 떡쌀을 찧느라 여러 가지 다라들이 늘어서 있던 방앗간도 있었고, 버스정류장 표지 앞에는 사진관이 기억에 있다. 내가 처음 파마를 했던 미용실은 남아있지만 옛전 마을 어머니들이 다녔던 미용실은 아닌 것 같다.

일요일이면 엄마와 함께 목욕을 갔지만 가끔은 동생과 둘이서 목욕을 다니기도 했는데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는 종종 동중원에 둘이 앉아 짜장면을 시켜먹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수많은 글씨-메뉴가 있었음에도 짜장면이라는 글씨밖엔 보이지 않았다.

12번 버스에서 내려도 머리에 한 짐-보자기에는 끊임없이 먹을거리며 물건들이 나왔다.-을 이고 한참을 걸어 내려와야 우리 동네였다. 15-20여분 이었겠지만 상당히 긴 길로 기억한다.

12번 종점-버스정류장에서 부성교회로 들어가는 길
<부성교회로 들어가는 주변의 옛 건물들> 12번 버스 정류장 주변에는 조금씩 변해갔다. 아파트와 빌라도 이 주변에서 처음 생겼고, 다양한 가게들이 생겼다. 2003년 그 마을을 떠난 후 처음 그곳에 갔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일부는 내 기억속의 모습도 많이 보인다. 다만 그 일대가 다시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있어 개발을 거부하는 현수막과 안내문들이 많이 있었다. _2015년 4월. 사진_강.


12번 종점 2015년 4월 <2015년 봄에, 12번 버스 정류장이 있는 옛 마을 입구> 지난 봄에 갔을때 명성이발관이 있는 건물은 그대로였다. 코너에4층 건물이 좀 나중에 생긴 것 같다.

2003년 12번 버스정류장.
2003년, 12번 버스 정류장에서 동중학교 입구 모습. 우리 가족은 1994년도에 마을에서 나왔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 마을 일부는 남아있었고, 상동과 부개동 경계선에 계발이 한창이었다.

고갯길이 오르락 내리락했는데 경사가 급하진 않았지만 12번 종점에서 동중학교까지 내리막 오르막 했고, 학교 앞을 지나 쌀가게, 연탄가게, 창호상회를 지나 벽돌공장이 보이기 시작하면 담뱃가게까지 다시 내리막, 오르막 길이었는데 여기는 자전거를 타고 오르내리기에 좀 벅찼다. 겨우겨우 오르막을 올라 담뱃가게에 이르면 서울로 가는 길도, 김포로 가는 길도 모두 평탄했다. 마을은 슬레이트 벽으로 길게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길로 여름이었는지 초가을, 봄이었을까? 철모와 배낭에 나뭇가지를 꽂은 군인들이 총을 메고 탱크를 호위하듯 양 옆으로, 뒤로 따라 걷곤 했었다. 탱크가 지나고 나면 길에는 탱크의 바큇자국이 얼마동안 남아있었다. 그 자국은 흙산에서 흙을 퍼내던 포크레인 바큇자국과 비슷했다. 그 군인 아저씨들은 종종 우리 마을에서 쉬어갔는데 물통을 들고 우리 집에 물을 담으러 왔었던 기억도 선명하다.

처음에는 흙길이었다가 초등학교 5-6학년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콘크리트가 흙길 위에 깔렸다. 길이 생기고 마을버스도 생겼다. 그 즈음이었을까? 지금의 부개역 인근에 철도를 넘긴 교각이 생겨서 12번 버스 종점은 일신동으로 옮겨졌다. 그 버스는 아직도 일신동이 종점이다.


추가. 원래 12번 버스 종점이었던 지금의 부개고 입구 버스 정류장은 12번 버스가 다니기 전에 24번 버스의 정류장이었다고 한다. (강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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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규 2015-10-07 14:36:12
1957년도에 부개초등학교 첫 졸업한 부평맨입니다. 오늘 부개초등학교 60돌 기념 부개 어울림 마당에 다녀와 이 글 접하고 감회가 솟아 댓글 올립니다. 당시의 모습 해가 갈수록 하나 하나 지워지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깝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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