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연와 사람들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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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연와 사람들 살이
  • 강영희
  • 승인 2015.10.10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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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월 일하고 5개월 일하는데 월급도 없이 상여금으로 살았지
그 시절 벽돌공장 노동자와 가족들의 삶

부평연와 벽돌공장과 관련된 이야기는 주로 김규문씨(72세)의 이야기를 모아 기록했다. 툭툭 끊어지는 기억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는데 20살에 부개동으로 와서 지금까지 부평연돠 벽돌공장 사람들과 그 주변 주민들과 만튼 친목계모임을 이끌어오시면서 공장과 관련된 가장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계셨다. 이 이야기는 그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아내 되시는 분과 그곳에서 일하셨던 분들이 주신 사진 등으로 당시의 벽돌공장 모습을 그나마 그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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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에 서울서 부평연와로 일하러 오신 분은 서울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군대에 가기 싫었단다. 60년대는 살벌했단다. 일을 하려면 신분증-신원을 확인하는데 이런 공장에서는 신분증 확인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에서 공장이 불이나 망하게 되고, 곧 영장이 나왔는데 도망치듯 친구들과 같이 내려왔다. 이런 공장은 말하자면 당시 범죄자 소굴이었던 샘이다.

일년에 7개월 일하고 5개월을 사는데 월급도 없이 상여금으로 살았다. 상여금이 뭐냐면 월급에 덧붙혀 주는 보너스가 아니라 그때그때 일당치기로 일을 하는데 하루일당을 500원으로 치던 시절이었다. 거기에 공장 주인들이 같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에 세금내며 적는 장부와 주인들에게 보고하는 장부가 달랐다고 했다. 조금 더 만든 벽돌을 팔아 개인 임금으로 먹는데 이것을 상여금이라 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저녁 6시까지 일했다. 비오고 눈오고 추우면 벽돌일은 할 수 없었다. 돈을 제때 다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떠날 수도 없었다. 사택이라고 집도 주었기 때문에 나머지 계절에는 공장과 상관없이 온갖 잡일을 하며 버텼다. 일하다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가야 했다. 사고가 나서 병신이 되도 치료비 한 푼 못받고 그대로 쫒겨났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사람들도 다 당연한 것을 생각했다.

부천쪽 상동에 흙을 3-4미터 파서 그 흙으로 벽돌을 만들었다. 땅을 사서 땅을 파고, 깊어져서 물이 잘 모이니까 논농사가 잘 되었다. 다시 얼마간의 땅을 사서 흙을 파서 쓰고 다시 그 땅을 농자 지을 사람들에게 팔고 그랬다. 흙만 쓰고 팔았다. 나중에 흙을 파서 쓰는 것도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그 전까지는 마음데로 파서 썼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 웅덩이가 많았다. 글쓴이는 동생과 함께 마을 흙웅덩이 빠져 익사할뻔 했던 기억이 있다.

88년에 노조 만드는 걸 도왔다. 나(김규문씨)는 이미 퇴직금을 받아 먼저 나왔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이 쫒겨나게 생긴거다. 그래서 당시 금속노조(당시에 요업같은 것도 모두 금속노조로 포함되었다.) 사무실에 가서 가입했고, 이 사람들이 결국 그거라도 해서 얼마간의 퇴직금이라도 받고 공장을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90년대 재개발이 결정된 마을의 토지보상은 후했다고 한다. 가난한 마을에서 그만큼의 보상을 받기가 어려웠기때문에 후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별다른 싸움 없이 다들 마을을 떠났고, 사람들이 나가면 그집은 즉시 부숴졌다고 했다.

98년도 이전에 폐업을 했고, 98년 토지와 건물등의 배상을 받고 완전히 문을 닫은 후 운전면허시험장이 들어왔다. 보상을 받으며 사택에 살던 사람들은 나왔고, 사택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아파트가 동중학교 뒤에 있는 백영아파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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