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공장 외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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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공장 외 아무것도 없었다"
  • 강영희
  • 승인 2015.10.16 18: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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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서울·김포·안양·인천 네곳 지도가 만나 그려진 마을

인천과 부천, 그 경계의 마을

 

1914년 이후 인천의 행정구역은 현재의 중구, 동구만 포함되어 있었고, 부평은 지금의 부천을 포함한 부평도호부 관할 구역의 일부였다.  그러다가 1930년대 부평에 일제의 조병창인 미스비시 공장이 들어서면서 1940년 부평은 인천에 편입된다. 1940년 이전의 부평역사를 찾고자 한다면 부천의 역사(부천군이 생긴 1914년 이후)를 참고해야한다.

 

이런 이유로 부평연와 벽돌공장이 부평에 속해있다고도 나오고, 가마공장쪽은 부천이라고 했다. 1976년 지도를 보면 부천시 상동과 인천시 부개동이 인접해 있었지만, 부평연와 가마공장까지 인천에 포함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던 길이 있어서 어른들은 그것이 부천과 인천을 나누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2015년 지도를 보면 본래 행정구역 구획에 맞게 길 나눔이 되어있기는 하다. 전에 없던 길이 생긴 이유가 그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974년 만들고 1976년 인쇄된 지도 - 인천010 지도
<1974년 제작하고 1976년 인쇄된 인천지역 지도. _국토지리정보원> 부평동중학교 아래 바로 부평연와가 있었고, 이전에는 왼쪽 윗부분에 있던 경일연와도 없었다고 한다. 집들이  좀 있어보이는 곳은 24번 종점이었다가 이후 12번 종점으로 바뀐 곳인데 버스가 있어서 주택들이 좀 있다. 이 지도 바깥부분 논과 밭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네 개의 지도가 만나야 완성되는 마을

 

이곳은 도엽번호 김포100, 서울091, 안양001, 인천010의 네 개가 있어야 어느 정도 옛마을의 모습을 정리할 수 있다. 지도는 1974년에 그려지고 1976년 인쇄된 지도가 처음인데 마을 어르신들이 알고 계신 곳과 다른 곳도 몇 군데 있었다.

 

김포100에는  '건샛마을'이라고 하는 마을이 부평연와에 접해 있었다. 이곳 사람들도 벽돌공장으로 일하러 오기도 했는데, 여름 장맛비에 집이 잠기면 동중학교로 피난오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신상리로 가는 길이 김포쪽에서 서울쪽으로 갈라져 간다.

 

서울 091에는 왼쪽 아래 귀퉁이에 신상리가 있다. 포도밭이 있어서 오빠는 친구들과 종종 서리를 하러 가기도 했다고 했다. 그렇게 신상리까지 우리 마을로 쳤는데 그 외곽은 다 논으로 둘러싸여 있다.

 

안양 001은 아랫부분에 양어장과 송전소가 있고, 윗부분에 방송국이 있었다고 한다. 신상리로 가는 길에 서울연와라고 공장이 또 있었다. 양어장은 종종 물난리가 났다. 여름 장마철 물이 넘쳤을 때 이 양어장이 넘치거나 둑이 터졌던 모양이다. 가끔 마을 도랑에 금붕어나 색깔있는 물고기들이 있었고, 이 물고기들을 담아 키우기도 했다.

 

그리고 인천 010에 당연히 가장 많은 마을의 요소가 포함되어있다. 부평 시내로 가는 길, 그 가운데 논과 밭, 길과 내, 도랑이 포함되어 있고, 여기에 부평역과 지금의 부개역도 포함되어 있다.
 

 

부개동 20통 지역 1987년 지도
<인천시 북구 부개동 20통 지역 1987년 지도_국토지리정보원 / 이때는 상당이 많은 집과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어른들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지도에도 적지않은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역의 변화를 보여주는 지도

 

마을의 공간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지도를 구하려고 했다. 1976년, 1987년, 1997년, 2001년, 2012년 지도가 구할 수 있는 지도였다. 10년 단위로 지도를 정비해왔는데, 1997년 다음 발행연도가 2001년이었던 것은 더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걸 알려준다.

 

여러 사람의 인터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세대가 나뉘고, 공간이 교차하면서 달라진다. 그래서 사진 이야기전은 그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지도에 집중하게 되었다. 어른들(60~80대)의 기억도 2-30년의 공간의 변화가 담기면서 지도에 남는다. 오빠나 동생(40-50대) 또래의 기억도 약간 다른 방식으로 담겨지고, 조카 또래들(20대)의 공간은 이제 마을에 다 담기지 않는다.
 

직접 그린 마을지도 - 70대/ 50대/ 40대<주민이 직접 그린 마을 지도 _  각자 당시를 주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연령과 살던 방식에 따라 지도의 방향과 공간의 크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담기고 빠지는 것도 개인이 결정하도록 했다. 신상리 방향이 북쪽, 부평연와 가마공장 방향이 동쪽이다.>
(지도 1) 70대 주민이 그렸다. 부평연와 사택에 살았다. 당시 30대 후반. (지도 2) 50대 주민. 당시 10대 후반~20대 초반. (지도 3) 40대 주민. 당시 10대 초, 중반>
 

벽돌말(부평연와 벽돌공장 마을)은 70-80년대에 부개동 20통에 속해 있었는데 이때 통장을 지내던 주민에 따르면, 대략 520세대에 달했다고 한다. 공장이 많이 생기면서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기도 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벽돌공장이나 루핑공장 등 꽤 큰 공장이 많아서 일을 하러 많이 오갔다고 한다.


1979년 3월 무시로로 덮은 흙벽돌, 뒷편으로 사택과 부평동중학교 뒷모습이 보인다.
<1979년 3월 무시로로 덮은 흙벽돌. 뒷편으로 사택과 부평동중학교 뒷모습이 보인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지역에 공장과 주택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_ 주민 제공>

 


공장 식당을 대신한 밥집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 때 밥집을 했다. 2층집 고모네 지하에서 살 때부터인지 미나 언니네 집 옆에 살 때부터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어머니가 우리 삼남매 배는 곯리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밥집을 시작했다고 하셨다.

 

일반 식당이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삼시세끼를 차려주는 밥집이었다. 아침, 저녁은 공장에서 제공하는 공간에서 기거하는 사람들이 주로 식사를 했는데 그리 많지 않았고, 점심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했다. 작은 공간이라서 시간을 정해 식사를 제공했는데 20-30분 단위로 시차를 두고 사람들이 다녀갔던 기억이 있다.

 

점심때가 지나면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하는 건 고역이었는데, 이것은 학교를 파하고 돌아온 나와 동생의 몫이었다. 점심이 끝난 엄마는 다음날 찬거리를 위해 거의 매일 부평시장에 장을 보러 갔기 때문에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는 설거지를 했다. 엄마가 늦어지는 날에는 가마솥에 장작불을 피워 밥을 하고, 국을 끓이기 위한 물을 끓이고 있어야 했다.

 

겨울 김장을 할 때면 적게는 500포기에서 많을 때는 7-800포기를 했는데 몇 톤짜리 트럭에 산더미처럼 쌓인 배추를 쏟아놓고 가면 정말 아득했다. 사람들이 파는 배추냐고 물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이 배추를 어린 동생과 나도 함께 다듬었는데, 우리가 잠이 든 후에 새벽까지 다 다듬고 나면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에 서리가 내렸다고 하셨다. 

그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그것을 다시 아래와 윗부분을 바꿔놓고, 마지막으로 배춧속으로 무와 당근채를 썰고, 야채들과 새우젓이며, 양념등을 준비하는 것까지 일주일이 걸렸는데 그것들을 어찌했는지 아득할 정도다. 그렇게 속재료를 준비하고 꼭두새벽부터 절인 배추를 씻고 있으면 동네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열댓명씩 오셔서 배추를 나르고, 속을 넣고, 옮기고 하는 것을 도와주시고 가시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게 김장을 마치면 땅에 묻고 쌓은 거대한 고무통과 김장독이 12개가 넘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우리 뒷집에도 밥집이 생겼고, 친척댁도 밥집을 했고, 기찻길이라는 이름의 식당도 80년대 중반 이후에 생겼다. 그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 일을 반복했던 것으로 봐서 상당히 많은 분들이 그 마을에서 일을 했던 것 같다.
 

필자는 대학때 MT를 가도 음식은 만들어도 절대 설거지는 하지 않았다. 모임에서 어디를 가거나 행사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6-70명분의 밥그릇 국그릇에 반찬그릇까지 씻는 일은 정말이지 즐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까지는 부평연와 벽돌공장 외에는 공장도 집도 거의 없었다. 그 동네 유일한 이층집인 고모네 집이 지어지면서 서서히 주변에 집들이 들어섰고, 천막만 치면 공장이 되었다고 한다. 사진의 일부를 보고는 여기는 마늘공장, 솜공장, 자전차공장, 비누공장, 사료공장, 노깡공장, 빠우공장, 가구공장, .... 등 공장이 많이 들어서기 시작한 건 70년대 후반부터고, 80년대에 정말 많은 공장이 있었고, 90년대 재개발이 확정되며 거의 동시에 사라진 것이라 하셨다는 게 어머니 말씀이였다.


네번째 이야기는 부평연와 노동자와 가족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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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철 2015-10-17 16:42:48
"1940년 이전의 부평역사를 찾고자 한다면 부천의 역사를 참고해야한다."

이 표현은 1914~1940년 까지는 옳은 표현이지만, 1914년 이전은 옳지 않은 표현입니다.
부천이라는 지명은 1914년에 일제하에서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표현입니다.

현재의 인천광역시와 부천시는
고려시대에는 인주(1122~)와 안남도호부(1150~), 인주와 계양도호부(1215~), 경원부(1390~)와 부평부(1310~)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인천도호부(1459~)와 부평도호부(1413~)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조선말 1883년 근대개항이후 1895년 갑오경장에서 인천관찰부가 신설되면서 그 산하에 인천군, 부평군, 김포군, 안산군이 있게 됩니다. 즉, 인천도호부(현재의 시흥 등 포함)와 부평도호부(현재의 부천 등 포함)가 통합된 것입니다.

그런대 1910년 경술국치이후 일제하에서 1914년에 인천부와 부천군으로 분리됩니다.
여기서 인천부는 개항장 일대만을 의미하고,
부천군은 인천지역과 부평지역을 통합하고, 인천부와 구별하기 위하여 인천의 인과 부평의 부를 합한 이름으로 인천 역사이래 처음 등장합니다. 부천군청사는 현재의 남구 문학동 인천도호부청사에 있었습니다.

인천부는 1936년 다주면, 문학면 일부를 편입하여 1차 확장하고,
1940년 문학면, 남동면, 부내면(부평), 서곶면(서구)를 편입하여 2차 확장하고,
1945년 10월 10일 제물포시로 명칭변경되었다가,
1945년 10월 28일 다시 인천부로 환원됩니다.
1949년에는 인천시로 명칭변경됩니다.
1981년에는 인천직할시로 승격됩니다.
1989년 계양, 영종, 용유를 편입하여 3차 확장하고,
1995년에 인천광역시로 승격됩니다.
1995년 강화군 검단면을 편입하여 4차 확장을 합니다.

결국 인천광역시의 관할지역 지속적인 확장은 확장이 아니라, 1895년 인천도호부(현재의 시흥 등 포함)와 부평도호부(현재의 부천 등 포함)가 통합된 행정구역체제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향후 1895년의 통합된 행정구역체제로의 회귀를 완성하기 위하여, 인천광역시와 부천시, 김포시, 시흥시가 궁극적으로 통합되어 단일한 행정구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천"이라는 말은 일제하에서 역사성 없이 만들어진 용어이며, 현재 부천시는 인천과 부평을 관할하지 않고 있으므로, "소사시"라고 개명하는 것이 적정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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