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연와의 탄생, 벽돌공장 노동자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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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연와의 탄생, 벽돌공장 노동자들의 삶
  • 강영희
  • 승인 2015.10.23 19: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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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 인천, 영희의 고향 이야기> ④김규문씨에게 듣다

 

부평연와의 역사와 벽돌공장 노동자들의 삶

 

김규문씨. 1965년, 20살이 되던 해 서울 영등포에서 부개동으로 내려와 88년 5월까지 벽돌공장에서 24년 일했다. 지금까지 벽돌말 사람들과 친목계를 하며 부평에 거주하고 있다. 김규문씨와 인터뷰 하며 벽돌공장 역사와 마을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공장에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 내용을 정리했다.

(인터뷰 중 양성연, 허태동 씨가 말을 거들었다)
 

      <공장앞에서... 김규문씨>

 

 

부평연와는 어떻게 생긴건가요.

 

최성순이라는 사람이 일본 회사에서 소사일을 보다가 해방 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이곳을 적산물(공장포함 약 3만8천평 소유. 어디가 자기땅인지도 모를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로 받았다. 최씨는 벽돌을 굽기 위해 연탄이 필요했는데, 연탄장사를 하던 이종수씨를 불러들였다. 일본인들은 주안에서 연탄을 받아 썼는데 (벽돌을 굽기위한)연탄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일본인들이 철수하며 이씨에게 퇴직금을 연탄으로 주었던 것이다.

이씨는 그래서 쌓아놓은 연탄을 다 팔아먹었는데, 쌓아놓은 연탄 아래가 평지인줄 알았는데 파도 파도 계속 연탄이 나오는 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고운 연탄이 아니라 투닥투닥 튀는 연탄... 곡수라 하는데 .. 이것이 타고 나면 그 가루가 밑으로 떨어지는데, 그것을 다시 흙과 섞어서 손으로 뭉쳐 말려서 팔았다. 화력은 세지 않아도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많이 사서 썼다.(양성연씨 - 루핑공장에서 겨울에 일 없을때 가서 그걸 상차-차에 싫어주면서 얻어오곤 했다.)

 

부평연화합자주식회사 상무가 이혁재씨라고, 동인천에서 철물점을 크게하고 있었는데 현찰이 많았고, 사장 최성순은 땅과 공장을 갖고 있었고, 이종수는 연탄을 대서 합자해서 벽돌공장을 차렸다. 재산가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은 많고, 공장은 큰데 노상 돈이 없어 쩔쩔맸다.

 

70년대 중반인가, 그 넓은 마당에 깔았던 벽돌까지 다 팔아서 돈을 엄청 벌었다. (허태동씨 - 맞어, 언제 한 번 그 마당이 텅 비었더러구. 그때... 나쁜 벽돌도 많이 만들고 그랬지... 양성연씨 - 그래, 그때 벽돌 파동 날  때 한번 있었지)

 

그런데도 왜 망했냐면 사장들이 상주하지 않고 주안 본사에만 있었단말이야. 그런데 그 밑에 일하는 사람이 몇 천장 팔아도 몇 백장 팔았다며 보고를 하니...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이 돈을 벌었지. 그리고 근로자들은 12달에서 7개월 일하고 일없을 때 5개월 쉬었으니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벗어날 수없는거야. (양성연 - 노깡도 똑같았어. 겨울에 가불해서 먹고, 여름내 갚아가며 살았지. 가불을 했으니 나갈수도 없고. 흙 만지는 사람들 똑같았어... 그때는 정말 고생들 많이 했지)

 

<월급이 따로 없었다. 흙 벽돌을 찍어내는 만큼 돈을 받았다고 한다. 10개 찍으면 만원, 5개 찍으면 오천원. 그런건데, 일종의 도제다.>

 

"돈을 많이 벌때도 있었는데 한 번 잘 벌면 3년 동안은 불경기였다"
그렇게 불경기면 어떻게 하셨나요?

 


중간에 시마이(종료)를 한다. 근로자들은 죽거나 살거나, 회사가 돈이 없는걸 어떻게 하냐. 대물변제도 할 수 없다. 회사가 돈을 벌든 안벌든 요즘엔 쟁의하면 다 받아주지 않나.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싫은 소리만 해도 해고를 시켜버렸다. 그땐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엎드려서 "살려주십쇼" 해야했다. 근로자는 아무 런 힘이 없었지.

 

88년 5월에 나오면서 벽돌공장 노조를 맨 먼저 만들어줬다.
 

나는 축산을 했기 때문에 사료를 저렴하게 사기 위해서 사업자등록증을 냈거든. (그래서 기록을 잘 해놨지.) 그런데 그때 회사에서는 이중장부를 써서 깜짝 놀란거야. 퇴직금 안주면 세무서에 가서 이중장부 신고하겠다 했지. 월금 3만원 줬는데 2만원 줬다고 쓰고 나머지는 탈세를 한거야. 나도 월급 주고 받은거 다 써놨거든. 그 기록을 보여주며 협박을 했지. 그래서 나는 퇴직금을 받았어.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1원 한 장 못받고 나왔거든. 억울하잖아 .. 그래서 내가 노조를 만들어주고 나왔지... 그래서 (사업주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었지.

여의도에 전국금속노조연맹 사무실이 여의도에 있었어.그때는 요업쪽은 다 금속쪽이었어.그 사무실에 가서 설립을 했지. 그때 노조를 만들어놓으니까 조금씩 '으쌰으쌰'도 하고...

 

그러면 언제 부평연와-벽돌공장이 문을 닫았나요?

벽돌공장 마당에 운전면허학원이 있었는데...

 

망한 게 아니고 자동차 운전면허학원(삼원)으로 전환을 한거야. 벽돌공장은 문을 닫고 .. 나중에 상동에 보상이 나오면서... 벽돌은 그만 만들게 되고, 삼원자동차운전면허학원으로 전환한거지.  93년쯤 생긴거야.


여기에서 언제 문을 닫고, 언제 자동차 학원이 생기고, 하는 것이 서로의 의견이 분분했다. 한번에 모두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상 받고 나갈때마나 집을 부수는 방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각자의 기억이 좀 달랐다. 집단적인 저항이 없었던 건 보상을 충분히 준 마지막 개발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1대 1로 해결을 하며 집을 철거해했다. (허태동, 양성연씨가 자동차면허를 그 학원에서 따려다가 다 못따고 나왔다고 했다. 그 년도를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고 95-6년으로 알고 있었다.)

 

1998년 상동이 개발되면서 바뀌었는데, 부평연와쪽은 조금 늦게 개발된게 2000년 즈음이다. 벽돌연와 사택은 벽돌공장과 같이 98년에 모두 비워졌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삼원자동차 학원은 벽돌공장 앞마당을 세를 준것이고, 그 학원이 잘 되자 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뒷마당을 사서 한독 자동차학원을 차렸다. 앞마당은 부평연와에서 계속 운영했다. 자동차 면허학원도 부평쪽은 허가가 나지 않았고, 부천쪽만 허가가 나와서 공장의 반쪽에만 면허학원이 두개가 있었다고 한다.

 

 

흙산은 언제 없어졌어요? 있는거 보고 나왔는데 ..

 

흙산은 자동자학원이  폐쇄될 때까지 있었어. 개발할 때까지 남아있어는데 벽돌은 안찍으니까... 그냥 그 흙이 그냥 있었던거지. 그래서 개발사에서 그 흙산을 샀어. 저지대가 많았으니까 그걸 평평하게 만들어야 하잖아.

(양성연씨 - 그걸 부평연와에서 다 파먹은거야.) 그게 어떻게 된거냐면 (부평연와에서) 경인천철 밑에서부터 해마다 내년에 땅을 팔 자리다 싶으면 오늘부터 토지주들이랑 계약을 해. 그래서 (흙을) 파 먹어. 그려면 새땅이 되니까 토질이 좋잖아. 그러면 농사 지을 사람한테 팔아. 옆에 땅 높이가 높은 땅은 논농사를 짓는데 물이 다 빠져버려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잖아. 그러면 토지주들이 공장에 팔고, 공장은 그 땅을 사서 흙을 파서 쓰고, 그 땅을 또 농사 지을 사람한테 팔고 .. 그러면 흙은 공짜로 오는거야. 그렇게 하다보니까 여기(경인전철 밑에서)부터 파다보니 .. 동아기업 앞까지 다 파먹은거지.

 

나중에 국가에서 흙을 파는 것에도 허가를 받아야 하는 시기가 왔지. 흙을 파고 매립-원상복귀를 해야하는데 당시에는 연탄재가 많이 나왔거든. 그래서 그 연탄재를 돈을 받고 받아서 그 땅을 매립해서 팔았지. 그런데 4-5년간은 그 땅에 작물이 자라지 않는거야. 농사도 안되고, .. 그런 사람들을 요즘에는 보호해주지만 그땐 그런게 없었거든  토지주들이 농사를 못짓고 동아기업에 팔은거야. 공장하기엔 딱 좋은거야. 비가 많이와도 물이 다 빠지고 .. 단단하고 .. 동아기업(자동차 부품 만들던 공장)이 싸게 사서 들어왔지.

 

신상리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땅-흙을 파먹은 자리-오른쪽 저지대에서는 오랜동안 농사를 지었고, 왼쪽에는 동아기업 외에도 공장이 많이 들어섰는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거란 걸 이제야 알았다. 부평연와에서 흙을 파기위해 땅을 샀는데 이 땅을 깊에 파서 쓰곤 했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는 깊은 웅덩이가 많았던 기억이 있다. 시화 오빠도 그런데서 친구들과 수영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흙을 쓰고 거기를 연탄재로 매립하고 그 땅을 팔았는데 거기서 일 하던 간부들이 많이 샀다. 비싸져서 일반인들은 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 그렇게 땅 팔면서 부평연와도 돈을 많이 벌지 않았어요?

 

돈을 많이 벌었어도 회사측도 7개월은 일하고 5개월을 쉬니 실제적으로 돈을 벌었다고 할 수 없지. 게다가 사장들이 부평 본사에서 행정만 보지 여기 공장에는 남들이 있었던거지. 그러니 10차 팔고도 7차 팔았다고 보고해도 모르는 거지. 그때 돈 번 사람들은 벼락부자로 잘 먹고 살았거든. 자기 대에서는 잘먹고 살았는데 자식들 커서 대학졸업하고 사업하고 하면서 다 날려먹었지.
 


몇 마디 질문을 하면 수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의 삶은 그렇게 촘촘히 각자의 삶을 살고, 그것들이 어우려서 역사라는 수를 놓는다.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슬프고 가끔은 기쁜 삶들이 어우러진다. 부평연와 벽돌공장의 이야기는 더 촘촘히 수 놓아질 수도 .. 이것이 거의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커다란 벽돌공장이 있던 작은 마을의 역사에 설긴 수가 놓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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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5-10-24 11:10:52
옛날,60년대 70년대. 기차가 주안역에서 부평역(옛날에는 주안역 다음이 부평역)으로 가다보면 허허벌판의 왼쪽에 보이는 높은 굴뚝의 벽돌공장. (지금의 간석 북부역 맞은편)
언젠가 무심하게 바라보니 그곳은 상가와 시장, 주택가로 변했더군요.
우리가 모르는 벽돌공장에 얽힌 얘기가 많네요.
반가워서 들어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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