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천연의 역사를 파괴하지 말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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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천연의 역사를 파괴하지 말라!(중)
  • 곽현숙
  • 승인 2015.11.2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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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칼럼] 곽현숙 / 도로 전면무효화(폐기)대책위원회 공동대표



 - 배다리는 인천의 민족정신이 배태되고, 뭉쳐간 역사적 장소다
 
 배다리는 왜 이런 소리를 낼까?
농경사회에서 상공사회로 개척되던 시대, 개항을 통해 이주해 온 각 나라 사람들과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천은 중구와 동구를 중심으로 인구가 늘어가고 도시가 형성됐다. 일본과 중국인들이 밀려들자 중구에서 밀려난 우리나라 사람들은 배다리로 상징되는 동구에 주로 살았다. 오광철 전 인천일보 주필은 “중구 신흥동에 심부름 갔다가 일본아이들이 조센징 노 스파이라고 목 칼을 휘둘러 혼났었다”라고 증언했듯이 당시 마을의 경계가 얼마나 강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정 때 우리사람들을 깔아 뭉기려던 일본 놈들의 눈길을 그대로 내려 받아 못난 생각들에 덮혀 가난 +동구 로 밀려가는 현상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사실은 주어진 삶에서 개척 해나갈 움직임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슬 되어간 도시 생태계의 추이를 상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10년대에 박팔용 시인의 ‘인천’이라는 시에는 중국 산둥과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로 기록했다. ‘이길용 기자’ 라는 책에는 1900년대에 경상도 출신의 거상이 아들 이길용의 교육을 위해 동구 창영동에 자리를 잡는다. 이길용은 영화학교를 나와 경인기차 통학생 친목 회원이었고, 철도국 역무원으로 일하면서 3.1 운동 후 임시정부 문서를 운송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동아일보 기자로 들어갔다. 그는 1936년 베르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민족의 의분을 상기시킨 주역으로 기록돼 있다.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의 자서전에는 어린 시절의 배다리엔 부두에서 일본으로 끌려가는 어린 영친왕이 ‘나는 안 간다’고 소리 지르며 쉬지 않고 울어대던 소식에 배다리 사람들의 울음이 한 달이 넘도록 끊이지 않았었다는 기록도 있다. 영친왕의 울음이 조선 마을에 잃어버린 나라의 슬픔을 하염없이 뿌렸던 기록을 보게 된다. 막노동을 하던 조선사람들은 부두와 식당이나 노동이 필요한 곳에는 예외없이 일하면서 당시의 나라와 지역의 중대소사가 동구로 흘러들어 많은 시민들이 알게될 수 밖에 없는 지역적 특성을 보게된다. 책속에 1915년 음력 12월30일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한 우각리(지금 창영동이며 우각로) 시장 모습을 그려낸 글을 본다. 시장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정보가 많이 모인 곳으로 보인다.
 
지난번 배다리 산업도로 중단 사태를 겪으면서, 잠잠했던 배다리의 정체성이 드러나 언론에 기록으로 남겨진 사실들과 전문인들이 보는 배다리의 가치를 새로이 기록하는 일들이 생겨 났다. 그중에 ‘리뷰인천’ 통권 2호(2009년 여름호) 표지 상단에는 (특집-‘배다리 산업도로’) 라는 명제가 있다. -배다리 인물- 편에는 이길용 하상훙 임영균 김차영 배인철 한남철 김호순 존스목사와 부인 김애식 하복순 김활란 김애마 김영의 황예도 이옥녀 서은숙 장명덕 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 조석기 조진만 곽상훈 고유섭 고일 주정기 정영복 신태환 함세덕 박영성 이원옥 권정석 한상억 오화섭 김선웅 박남칠 박창례 최성연 조규봉 김은하 김찬삼 박현식 강재구 김병훈 박정화 김관철 유완식 등 나라에 기둥 역할을 한 이름들이 들어있다. 인상, 동명, 창영, 송림, 송현, 서림, 영화학교들이 좁은 동구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은 교육 의 산지로 인구의 밀도를 가늠할 수 있다. 학교들이 들어서기 전에 창영학교 앞에 김병훈 선생의 ‘의성사숙’이 있어 문과 예를 함께 가르치셨다고 한다. 영화학교 정우 교장선생은 창씨 개명에 불응한 사실로 동구 사람들의 가슴에 긍지를 심어간 사실을 김병훈 선생의 며느님 홍사숙 어른 외에 여러분들의 말씀 속에서 힘으로 전해온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강덕우 박사는 ‘한시대 역사가 머문 곳’이라는 명제로 동구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에서 찾아 전한다. 동구에 있었던 학교와 공장들을 열거하며 인천 3.1 운동이 발발한 후 3월6일부터 한 달 동안 만세운동은 집회가 8회, 집회인 수가 9000명, 투옥자수 1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발상지는 주로 학교다. 창영학교와 인상학교에서 시작되었으며 배다리에서 시작해서 시가지를 돌며 독립선언서가 시내에 배포되었다고 전한다. 인상학교 경우는 징역, 태형, 퇴학으로 학생수가 100명이 줄어드는 사태를 낳았다.
 
이렇게 배다리 문화권에서 점화된 3.1 만세운동은 인천이 개항 이래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던 이유로 일본 군, 경의 사전 단속이 철저 했음에도 불구하고 봉기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으며, 이후 5월까지 인천시 전역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정미소, 성냥공장, 부두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시작되었고 동양방적, 우마차조합, 양말직공, 인천염업조합, 인천 매립공사장, 수산주식 중매인 인천차량회사, 세관 구내 하역자등의 노동쟁의가 단독 또는 연대 파업으로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는 노동운동의 실태를 전한다. 일제 강점기의 노동운동은 쟁의가 반복되면서 점차 민족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전환하였다며 배다리 우각 로는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고 인천사람들이 모여드는 터전이었다. 비록 대다수의 토지가 이방인에 의해 점유 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보여주었지만, 그 모순도 극복해가려 했던 개척지였고 선구지 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며 글을 맺는다.

그렇다면, 일제 강정기에 인천의 노동자들은 누구였을까? ‘개화의 선구지 인천’을 쓴 이성구(전 인천시교육위원회 의장) 선생님 말씀과 같다. “배다리는 인천의 시민정신이 서슬되어 뭉쳐간 역사적 장소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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