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남성으로 태어나는 세상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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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남성으로 태어나는 세상을 원하는가?
  • 김성미경
  • 승인 2016.05.24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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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칼럼] 김성미경 /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 젠더센터 젠더고물상 연구위원

2016년 5월 17일 새벽, 강남역부근에서 일어난 여성 살해사건은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전에도 수 많은 여성들이 친밀한 관계에서, 전혀 모르는 관계에서 남성들에게 살해당해 왔었다.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2015년 한해에만 114명에 달했고 유영철(21명), 강호순(7명), 조두순(8세 여아살해), 화성연쇄살인사건(10명)의 주인공들도 99% 여성들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범행현장이 고스란히 녹화된 영상을 보면서 그녀의 공포와 고통을 함께 느꼈다. 특히 남자친구의 몸부림은 그가 어떤 마음 상태라는 것을 한 순간에 모두에게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포스트잇과 함께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분노하고 또 공포스러워 했다. 범인은 잡혔지만 많은 여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 자리에서 살해당한 그녀는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두고 여성혐오범죄냐 아니냐 논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논쟁은 부질없는 소모전일 뿐이다. 범인이 정신이상자이든 아니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엄마를 위시한 모든 ‘여성’들은 자신을 돌봐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그 남성의 문제이지, 그것으로 엉뚱한 여성들이 살해당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자기보다 약한 자를 골라서 범행대상으로 삼겠다는 의식은 이주 또렷하고 명민하게 굴러간다. 역시 결론적으로 폭력은 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는, 또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여성 살해 사건을 정신이상자의 행위로 규정지으면서 특수한, 일탈적인 개인의 행위라는 면죄부를 어서 얻어내고 싶어한다. 어찌하여 여성 살해가 여성의 존재를 비하하고 무시하는 의식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강력범죄에서 여성피해자가 83.8%에 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대한민국이 살인사건에서 피해자 여성비율이 51%를 넘어 세계 1위를 달리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성을 혐오 한다는 것은 여성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다. 여성혐오의 맥락은 소수자들을 포함한 여성을 ‘비인간화’한다는 뜻이다.

 
  <2015년 아내폭력/데이트폭력으로 인한 살인범죄의 피해자 유형_한국여성의전화>
 
피해자
범죄유형
배우자관계 데이트관계 기타 소 계 주변인 총계
살인 50 37 4 91 23 114
살인미수 등 43 49 3 95 27 122
누계(명) 93 86 7 186 50 236
 

한국사회가 여성혐오의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군사문화의 일상성에 있다. 휴전상태로 무려 63년여를 지내오는 동안 한반도 문화생태는 늘 전쟁에 대비하는 군사문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알다시피 남성들의 일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는 군대생활이다. 전 인생을 놓고 볼 때 길어야 2년 남짓한 군대생활의 경험이 가장 할 말이 많은 기억이며 남성들의 전 생애 의식을 지배한다.
 
남성권력의 정점에 있는 전쟁은 공격, 정복, 소유, 통제라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가부장적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동일한 단계라는 점에서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땅덩어리든, 자본이든 대상으로서 동일선상에 여성을 대치해서 넣어도 어색하기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비인간화’된 대상으로서 여성이 인식되고 회자되어 왔기 때문이다.

여성학자들은 군대의 전통은 진짜 남자로 재 사회화하는 강력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즉 자신이 ‘여자’나 ‘게이’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기 위한 선택들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들을 부정하고 증오하며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서 군인으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남성들끼리의 연대감이 형성되는 것이다. 전우애, 그것은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진짜 남자’들의 숭고한 관계를 뜻한다. 그리고 그런 ‘진짜 남자’들은 국가의 수호자이자 여성과 약자의 ‘보호자’라는 신화를 만들어내며 결국 사회 속에서 성별 불평등과 분업을 정당화하고 고착화 시키는 기재로 활용된다. 그 보호자는 피 보호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배하고 통제할 권력을 사회로부터 위임 받는다. 이것이 가부장적 권력관계의 본 모습이다.
 
보호자와 피보호자, 이 관계는 전쟁이라는 극단적 폭력상황에서는 더욱더 강력하게 존재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적국의 여성은 그래서 강간의 대상이 된다. 제네바 협정에서는 전시 강간에 대해 “남성과 공동체에 대한 명예를 침범하는 범죄”로 간주했다. 즉 여성의 성적 자존감 침해문제,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의 명예를 침해한 범죄로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시절이나,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이나 일본군이든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여성에게 대해서는 다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흥분하고,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나 한국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러한 군사주의적 가부장 의식들은 여성의 몸을 공격하고, 정복하고, 소유하며, 통제하는 것에 대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로 자리 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래퍼 제리케이는 자신의 트위터에 ‘그 사건은 분노를 일으키게 하지만 남자인 자신에게 공포로 전이되진 않았다’며 남자라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덜 조심해도, 덜 겁내도 되는 삶은 특권이다”라며 남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리고 살았는지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바로 성찰적 공감이다. 이 지점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이며 같은 경험이라 하더라고 달리 구성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그 특권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문제가 되어선 안된다. 오히려 그러한 남성으로서의 특권을 해체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억압과 폭력에 적극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모두가 남자로 태어나는 세상을 원하는가?
 
‘분노는 일어나지만 공포가 되지는 않는’그러한 차이점을 깨닫고 알게 된다는 것, 이것이 지금, 이 시간들을 함께 공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성찰적 공감인 것이다. 여성인 나는 이번 사건을 통해 내 딸이, 내가, 내 어머니가,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겪었을 수많은 폭력과 살해의 공포 속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여자”라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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