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한 희망'이 싹 트던 '쇠뿔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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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대한 희망'이 싹 트던 '쇠뿔고개'
  • 이병기
  • 승인 2010.08.1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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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⑪ 동구 금창동


동구 금창동 지도

취재: 이병기 기자

인천시 동구(東區)는 구한 말 우리나라가 서양에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중구와 함께 근대화의 역사적 현장으로 꼽힌다.

수도의 관문에 위치한 인천의 특성상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다. 인천 최초의 '신식교육' 발상지이자, 일제치하에서는 경인공업지대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은 잦은 외세의 침략으로 1879년(고종 16년) 현재 화수동 일대에 화도진을 설치하고, 묘도(괭이부리)와 북변포대 등 7개 포대를 관할하기도 했다. 1882년에는 조선과 미국의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역사적 장소다.

또한 1894년 인천에서 처음으로 신식교육을 한 영화학교(인천영화초등학교)가 설립됐고, 1907년에는 인천 최초의 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가 문을 연 교육의 중심지였다.

1917년에는 연간 7만 상자, 국내 성냥 소비량의 2/3 가량을 보급하는 조선인촌 주식회사 성냥공장이 설립됐다. 현 동일방직(주)의 전신인 동양방적(주)이 1934년 운영을 시작했고, 이어 현 대우중공업의 전신인 조선기계제작소가 1937년, 현 인천제철(주)의 전신인 조선이연금속(주)가 1940년 각각 설립돼 가히 경인공업지대의 중심지로 불리기도 했다.

6.25 전쟁 이후 특히 피난민들이 많이 자리잡았던 동구에는 1962년 부천군 영종면 운남리 작약도가 인천시 만석동에 편입되고, 이듬해 북부출장소와 동부출장소가 병합됐다.

1973년에는 동구 관할의 월미도가 중구로 편입되고, 1981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인천직할시 동구로, 1994년 인천광역시 동구로  명칭을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

동구에는 인천시 전체의 2.79%인 약 3만91세대, 7만5300명이 거주(2009년 9월 기준)하고 있다. 면적은 7.19㎢로 시 전체의 0.71%를 차지한다. 전체 인구 중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2천여세대 3200여명, 의료급여 대상자 2300여세대 3700여명, 장애인이 4600여명(동구 전체 인구대비 6.1%) 살고 있다.

행정구역은 만석동과 화수1·화평동, 화수2동, 송현1·2동, 송현3동, 송림1동, 송림2동, 송림3·5동, 송림4동, 송림6동, 금창동 등 11개 행정동에 198통으로 나뉘어 있다.

창영초교와 영화학당 등 교육기관 많은 곳


창영초등학교

동구 내에서도 금창동(金昌洞)은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금창동'이란 지명보다 법정동인 금곡동(金谷洞)과 창영동(昌榮洞)으로 더욱 알려진 이곳은 본디 인천부 부내면 금곡리와 우각동이었던 장소다. 광복 후 금곡리는 금곡동으로, 우각리는 창영동으로 변경됐다.

금곡이란 이름은 예전 금잔디 고을, 또는 골짜기라는 말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일제시대 성냥공장에서 누른 유황을 금으로 비유한데서 유래됐다고도 한다.

우각리로 불렸던 창영동은 그 지형이 소뿔처럼 생겼다고 해 '쇠뿔고', '솔뿌리 고개 또는 우각동, 우각현, 송근현' 등으로 불렀다. 광복 후에는 새롭게 번창하고 기원한다는 뜻에서 창영동이 됐다. 

2010년 1월 기준으로 1828세대 4245명이 살고 있다. 1985년 금곡동과 창영동을 통합해 첫 글자를 따서 금창동이라고 불린다.

이곳은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 학교가 많았던 지역이다. 


1910년 인천공립보통학교 졸업사진
1907년 인천 최초의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개교 후
1910년 3월 26일 제1회 졸업생 18명(당시 4년제)을 배출했다.

 

인천시지정 유형문화재 제16호인 창영초등학교는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라는 명칭으로 설립됐다. 인천 최초로 조선 어린이들을 교육하고자 세워진 공립 보통학교다. 1910년 3월 18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1912년에는 학생수가 348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후 1922년 신축된 교사는 당시 교육을 열망하는 조선인들이 정성껏 모금한 2만원을 밑거름으로 완공됐다고 전해진다. 일제 전반기 건물로서 일자형 단순배치에 벽체 상단은 화강석으로 만든 아치형을 이룬다. 현관은 홍예석으로 만든 초기 근세풍 양식 건물. 이곳은 아직도 보존상태가 양호해 초기 근대 건축양식의 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구식 신식교육의 선구지로 꼽히는 영화여학당은 1892년 존스부인이 설립했다. 1897년 미북감리교 한국여선교회 직영학교가 된 영화여학당은 당시 산수와 영어, 성경, 자구약론, 바느질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그러나 학생수가 10명이 채 되지 않았던 이곳은 1902년 미국의 한 목재상이 학교건축기금으로 1천달러를 기부해 싸리재에 26평의 벽돌교사를 신축했다. 1903년에는 이화학당 부속 여학교로 승격돼 체계적인 초등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당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지역에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를 만든 곳이다.

1909년에는 학생이 늘어 교사가 비좁게 되자 쇠뿔고개(창영동)에 학교 부지를 구입하고, 이듬해 지상 3층 지하 1층의 교사를 신축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맞으며 '식민지 교육' 실시 등 일제정책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1930년대에 관립학교에 밀리면서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영화학원 존스기념관은 현재 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돼 있다.


현 도원역 철길 옆인 옛 '꿀꿀이죽' 골목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인명의숙과 의성사숙도 금창동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1903년 정재홍 자강회 인천지회장이 우각리에 설립한 인명의숙은 당초 천기의숙으로 출발했다. 인천신상협회와 미상협회 등 인천지역 사업가들의 의연금으로 운영됐다. 1912년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로 통합된 이후 교사가 해체됐다.

의성사숙은 인천의 마지막 선비로 불린 김병훈이 1908년 창영동에 설립한 학교. 조선시대에 있었던 서당과 비슷한 곳이었다. 김병훈은 근대교육이 도입되기 전 의성사숙이라는 마지막 글방을 운영하면서 새벽에는 글을 해석하고 암기시켰으며, 글씨 내기를 권장했다고 한다.

고일의 <인천석금>에서는 김병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머리에 관을 쓰고 단정히 앉아 등나무로 만든 긴 회초리로 학동들을 다스렸다. 중국의 유교철학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쳤는가 하면, 매란국죽과 산수풍경을 그리는 동양화도 지도했다."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로 흡수된 제녕학교도 순수 민간 사립학교로 처음 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제녕학교는 1899년 독정리 유지들이 인천 최초의 사립 일신학교를 세운데 영향을 받아 1904년경 서상빈 인천신상협회 사장이 설립했다.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 출신 수재들이 인천세관 관리로 근무하면서 야학 형태로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교에 대한 더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그 명맥도 계승되지 못한 것은 인천 학교사의 아쉬운 공백으로 남아 있다.

미국 북감리교회가 보낸 여 선교사들이 합숙소로 이용하던 창영사회복지관도 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8호다. 이곳은 1905년 미국 사업가 겜블 여사의 기부금으로 지어졌다. 건축 당시엔 초호화 건물로 유명했다고 한다.

1층은 도서지방 교회의 전도부인을 교육하는 공간으로, 2층은 여선교사들의 숙식공간으로 사용됐다. 해방 후 1949년 인천기독교사회관으로 다시 창설됐고, 1956년부터는 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쓰고 있다.

창영사회복지관의 경우 간소한 상자형으로 지붕구조가 독특하며 벽체는 당시 북유럽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건물이 조선시대 서원이나 사찰의 승방에서 사용했던 용자살 창호를 원용하고 가장자리는 교살 등의 문양으로 된 점이 눈길을 끈다.

'꿀꿀이죽' 골목, 성냥공장 등 '추억'이 있는 동네


우각로

이곳에 특히 외국인 학교를 많이 지은 이유에 대해 이상민 금창동주민센터 주사는 "인천항에서 서울로 지나가는 유일한 거리였던 '우각로'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당시 서울로 가려던 유명한 모든 외국인들은 인천항에서 내려 우각로를 따라 지나갔다"며 "길을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아는 곳에 학교를 세우다 보니 금창동 주변에 여러 곳이 세워지지 않았나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이곳은 최헌섭씨풍수지리설에 의해 형국이 쇠뿔같다고 해서 쇠뿔마을로 불렸다. 개항장 제물포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쇠뿔고개 길이 가로지르고 있어 구한말까지만 해도 교통의 요지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인천세무서에서부터 한국예루살램교회 건물까지의 언덕이 쇠뿔고개라 불렸다.

동구 주민자치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최헌섭(71)씨는 영화유치원과 창영초등학교를 나온 지역 토박이다. 최씨는 예전 금창동을 회상하면 '꿀꿀이죽 골목'이 인상에 남았다고 말한다.

전쟁 직후 굶주렸던 서민들이 즐겨찾던 창영동 26~27번지 일대를 '꿀꿀이죽 골목(현 도원역 철도변 옆길'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해방 직전 일본인들에 의해 철도변 강제 철거지에 조성된 골목길. 몇몇 사람들이 한국전쟁 직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에게 월미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잔반을 모아 죽을 만들어 끓여 팔았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피난민들에게는 싼 값으로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음식이었다고 전해진다.

최씨는 "나는 먹어보진 못했지만, 얘기 듣기로는 사람들이 드럼통에 미군이 먹다 버린 소세지 등을 담아와 중국집에서 쓰는 시커먼 솥에 죽을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며 "특히 항만 노무자들이 많이 와서 먹었던 걸로 들었다"고 말했다.

'꿀꿀이' 골목에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철도 건널목길을 따라 죽을 파는 가게가 성업을 했다. 이후 1970년대 경제사정이 호전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현재 골목은 공영주차장과 근린공원, 소방도로가 들어서 그 자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길 이름도 '명랑골목'으로 변경돼 배고픔에 발버둥쳤던 시대의 아픔 대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성냥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

현 두손빌딩 자리에 위치했던 성냥공장도 금창동을 얘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1917년 인천부 금곡리(현 금곡동) 2천여평 대지 위에 '조선인촌 (성냥) 주식회사'가 들어선다. '우록표'와 '쌍원표' 등의 제품을 생산했던 이 회사는 남녀 직공 500여명이 연간 7만 상자의 성냥을 생산한 국내 최대의 성냥공장이었다.

금곡리 성냥공장은 우리나라 성냥 소비량의 2/3 가량을 보급할 정도로 규모가 대단해 지방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다녀갈 정도였다고 한다. 주로 10대 소녀들이 돈을 모아 공부하겠다는 일념에 유황냄새에 찌든 공장 안에서 성냥개피와 씨름하며 청춘을 보냈던 곳. 6.25 이후에는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유행어가 생기기도 했다.


두손빌딩

이곳에는 이후 1958년 문화극장이 개관했으며 1990년대 피카디리 극장으로 변경됐다. 문화극장 거리로 불렸던 이 길은 배다리삼거리를 지나 헌책방거리까지 사람들이 문화를 즐겼던 '추억의 장소'로 여겨진다.

금창동은 현재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5층이 넘는 아파트가 한 곳도 없지만 3곳이 재개발·재건축 지구로 지정돼 일정을 앞두고 있다.

최헌섭씨는 "다음 세대를 위한다면 개발을 해야 하지만, 우리동네가 노인들이 많아 이들이 정착해 살 수 있는 개발로 진행했으면 한다"면서 "역사적으로 지방문화재도 많고, 인천의 옛 중심지였던 만큼 주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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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2010-09-03 11:42:07
기사 내용의 오류에 대한 의견입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맞으며 '식민지 교육' 실시 등 일제정책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1930년대에 관립학교에 밀리면서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기사내용은 잘못된 것입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먼서 재정적 어려움과 분란으로 어려움을 겪은 학교는 영화남학교입니다. 1903년대에 들어서면서 관랍학교에 밀리면서 서서히 사양길에 들어섰다는 근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영화학교 역사를 보면서 1930년대에는 학생수가 계속 증가되었고 인천지역의 명문학교로 성장합니다. 동아일보 기사를 검색하면 금방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학생의 경우는 영화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여고보, 배화여고보, 경기여자실업학교(현서울여상),진명여고보 등 서울 명문 여자학교를 진학할 수 있는 통로였습니다. 이것은 1930년~40년 생활기록부에 나오는 진학학교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1939년 학생수가 400명에 달해 현재 시문화재인 존스기념관이 증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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