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0년째 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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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0년째 교장이다"
  • 이재은
  • 승인 2016.09.12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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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못하는사람들] (첫회)‘인향야학’ 김형중 교장을 만나다

한 가지 일을 고집하며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자의든 타의든, 수십년간 붙박이로 삶의 터전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벌이는 시원찮지만 일이 좋아서 견디고, '나 아니면 안된다'는 자그마한 소명의식으로 버틴다. 집 나간 식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서글픈 가족사 때문에 자리를 지키는 등 갖은 사연을 안고 사는 터잡이들이다.
“그저 오래 내 일을 했을 뿐이에요.” 관점을 달리하면 그들은 장인이다. “하다 보니 반평생을 보냈어요.” 깊이 있는 나이테의 주인이다. 몇 년 후를 말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그들은 오랜 기억과 추억을 붙잡고 있다.
요즘 '인천가치 재창조'란 말이 부쩍 회자되고 있다. 잊혀진 인천의 가치를 다시 찾아 보겠다는 이야기다. 과연 인천의 가치는 무엇인가. 오랫동안 한 곳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 온 주인공들이 바로 인천의 가치를 간직한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천in>이 한 달에 두 차례, (떠나야 하는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한다.




사람, 첫 번째-‘인향야학(인향초중고야간학교)’ 김형중 교장

그놈은 만날 나한테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하지. 입으로 먹고 사는 놈이니까, 말로만. 나는 태생이 정치 쪽이 아니야. 이제 인천에 야학이 거의 없어. 내가 시작할 때부터 치면 지난해까지 인천에 야학이 45개 없어졌어.(인향야학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됐다) 가르칠 데가 없을 때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한 달 반 동안 체육만 하기도 했어. 도와달라고 인천시에 가서 꽹과리 치고, 그런 거 난 못해.

초등학교 과정은 인천에서 우리밖에 안 하거든. 초등학교가 힘들어. 중학교 이상의 실력은 있는데 졸업장이 없어서 온 사람, 복지관 등에서 한글 배우다 온 사람, 소위 말하는 ‘까막눈’, 세 가지 부류를 어울리게 해야 돼. 딴 데서는 못해. 중고등학교를 없애더라도 초등학교는 유지하고 싶어. 야학은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지.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초심을 지켜야한단 말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첫 테이프를 김형중 교장선생님이 끊어줬으면 하는 게 ‘인천in’ 내부의 바람이었다. 기자가 전화했을 때 선생은 “이제 언론 인터뷰는 안 하고 싶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오래 전부터 그와 친분이 있었던 김규원 상임이사가 다시 전화를 드렸고, 인터뷰 자리에는 송정로 대표도 함께 했다.

민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습관이 됐어. 깡술 먹는 버릇이 있어 가지고. 아까 보니까 이거 너무 비싸잖아. 서민은 못 먹겠어. 여기서 만나는 게 아니었다. 싼 데도 많은데. 이 비싼 걸 왜 먹어 우리가.
그는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로 술잔만 비웠다. 준비해간 질문지는 없었다. 그는 이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그동안의 생활을 들려주고, 술자리에서나 토로할 법한 사람에 대한 서운함, 운영의 어려움 등을 이야기했다.





관공서는 야학을 좋아하지 않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 타 시도는 시나 교육청에서 최소 3천은 지원 받아. 인천만 시에서 지원을 안 해. 지금은 교육청에서 야학에 똑같이 500만원을 줘. 그걸로 스무 명 되는 대학생들에게 교통카드를 주는 거야. 그거라도 주고 싶은 거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하지 않았을까.
나는 누가 얘기하는 것처럼 상록수도 아니고, 누가 얘기하는 것처럼 고명한 교육자도 아니고, 남들한테 듣고 싶은 말은 사회봉사하는 사람이란 거야. ‘사회봉사하는 쪽에서의 나’이기 때문에 가진 건 없어도 나의 정신, 순수한 정신, 그런 걸 시종일관 유지했기 때문에, 어려움은 각오한 거야. 입신양명을 위해서 한 게 아니어서 나 자신 때문에 그만두고 싶고 그런 건 없었어.

인향야학은 54년이나 됐다. 옛 송도에 가장 오래 있었고 2001년부터는 송월동에 터를 잡고 있다. 몇 년 전 인근에 동화마을이 생기면서 학교 주변에 색색의 벽화가 가득하다. 동화를 따라가다 보면 골목 끝 담벼락에 작게 학교 이름이 붙어있다.
주변머리 없어서 그렇게 된 건데, 우리 어머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어. 집사람도 그렇고. 돈 버는 기술을 못 배우다 보니 어머니와 집사람이 총대를 짊어지고 나는 그냥 정신만 가지고 배짱 편하게 야학만 한 거야. 3대 독자에 외아들이었어. 군대를 안 갔지. 갔으면 이걸 못 했을 거야. 그때 군대를 갔어야 했어. 이거, 아주 힘든 거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야. 술 한 잔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야학교사이기도 한 대학생들과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술을 마신다. 아직도 주량은 여전하시단다(?). 맞은편에 앉은 김 이사와 송 대표가 술을 꺾어 마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소리 한다.
나는 술을 저렇게 못 먹어 봤어. 빨리 후딱 먹고 말지 뭘 경로당처럼 먹냐, 젊은 놈들이.


방송은 안 탄다. 학생들이 싫어하니까.
요즘도 케이블 티비 등등에서 많이 오는데 학생들이 원하지 않으면 안 한다 이거야. 제자 중에서 미얀마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애가 있어. 김한석이라고 지금 나이가 쉰넷인데, 내 가르침에 의해서 미얀마에 간 거야. 13년 동안 미얀마 양곤에서 이런 학교를 하는 거야. 2012년에 가봤는데 눈물 나더라고. 내가 처음 야학 시작할 때보다 더 어렵게 하는 거야. 미안하더라고. 학교를 문 닫게 되면 학교에 있는 시스템을 다 거기 주려고. 있는 거 다 주고 싶어. 전에 지하실에 있던 거 1차로 줬고, 여기 그만두면 다 주려고. 

한곳에서 그렇게 오래 가르쳤는데 아직도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엄청 많아.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해서 그렇지. 다들 멋쟁이들이야. 아들 딸이 목사도 있고 선생도 있고 그래. 모 고등학교 선생이 엄마를 모시고 온 거야. 연세가 일흔여섯인데 애들 키우느라고 공부를 못한 거지. 학교 나오는 걸 너무 좋아하는 거야. 우리는 검정고시 학원이 아니다. 여기 와서 배우세요, 합격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 영종에서 오는 사람도 있어.


야학에서 시작한 학교 재벌도 있다.
과거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잖아. 시작할 때 마음만큼은 끝끝내 가져가자, 끝끝내 초심을 잃지 말자, 그렇게 해야 그게 야학의 존재이유가 아니냐, 주접스러우면 문 닫자, 학생들한테도 그렇게 말해. 뭘 질질 끌고 있어. 교회도 원래 예배당이어야 하는 거야. 옛날 카드 보면 산 중턱에 조그만 예배당 있잖아. 야학도 그렇게 끝나야 하는 거야. 야학을 빗대서 성장한 곳을 안 좋아하지. 그들도 나를 무서워하지. 나는 그들 안 만나지. 

그가 소주를 더 달라고 한다. 단골 식당 아주머니는 더우니까 그만 마시라고 한다. 그는 더우면 에어컨을 세게 틀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자, 인터뷰 시작!’ 그런 건 싫다고 했다. 그런 게 아니어서 대화가 밝았다. 많았다. 그래서 좋았다. “뭐 하고 살았어?”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저는 소설을, 소설을 썼습니다” 했더니 “소설 쓰는 놈 중에 이상한 사람 많지.” 하신다. ‘흐음.’ 인터뷰를 끝내야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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