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네에~짱 곤니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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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에~짱 곤니찌와
  • 은옥주
  • 승인 2016.09.20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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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은옥주 / 공감심리상담연구소 소장

대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부터 있는 수업 때문에 허둥지둥 전철역으로 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갑자기 어마어마한 크기의 알궁둥이 3쌍이 기저귀를 차고 걸어가고 있었다. 좁은 주택가 골목을 꽉 채우고 “엄마야.” 나는 혼비백산하여 양옆을 돌아보았다. 불쑥 나온 배가 내 양옆에서 ‘출렁 출렁’ 옆에 있던 빵빵한 양빰에 쏙들어가 파뭍힌 눈과 딱 마주쳤다.

“오네에~짱 곤니찌와.”(언니 안녕) 그 사람은 왼손을 들고 씨익 웃으며 인사를 하였다.
“어머.. 어머.” 뒤로 물러서려고 뒤편을 돌아보니 “우와~~.” 바로 눈높이에 보이는 커다란 젖가슴을 가진 왕 돼지부대가 좁은 골목을 꽉 채우고 있었다.?
‘어머나 우째..’ 돌아본 순간 뒤편 돼지와 딱 눈이 마주쳤다.
사방에서 돼지들이 합창을 했다. “오네에~짱 곤니찌와 오겡끼데스까.”

나는 너무 놀라서 다리가 후들후들 등에 식은땀이 났다. ‘이걸 어떻게 빠져나가지?’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일단 돼지우리를 빠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자 정신을 차리자.’ 나는 오른손을 앞으로 쫙 펼치고 “스미마셍 스미마셍 스미마셍.” 큰소리로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뭔 소린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무사히 알몸뚱이 돼지소굴을 빠져나와 전철을 향해 냅다 달렸다. 그것이 일본 스모선수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막 동경에서 첫 유학생활을 시작하던 때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있던 이모네집 뒤편에 큰 스모도장이 그날은 시합이 있어서 40여명의 스모선수들이 대거 출동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일본에 있는 동안 TV에서 스모시합이 종종 있었지만 나는 그때의 무섭고 당황스럽던 기억 때문에 절대로 스모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엄청 싼 후쿠오카행 티켓을 발견하고 여름 끝자락에 훌쩍 아들하고 같이 떠난 선물같은 여행길이었다.? 비가 축축히 오는 날 우리는 다자이후 텐만궁에 가서 구름다리를 건너 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을 발견했다. 무슨일인가 가까이 가니 마침 후쿠오카지역 스모학교끼리 스모대회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30명가량의 스모선수들 중에는 아주 귀여운 10세가 될까 말까한 양빰이 복숭아 같은 앳된 선수들도 있었다. 그 아이들은 뒤편에 줄서서 있다가 서로 킬킬거리며 엉덩이를 때리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20세~30세 까지의 선수들로 동경에서 본 어마어마한 몸뚱이는 아니더라도 꽤 풍만한 젖가슴과 터질 듯한 배, 튼실한 다리를 하고 흰 훈도시를 차고 일렬로 서있었다. 아들이 만화나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보게되어 흥미를 느끼며 시합을 보고 싶어해서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 시합을 이끌어가는 분들은 전통 기모노를 단정히 입은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들이었다.

4중창단처럼 남2, 여2명 단정한 차림으로 앞에 나란히 서서 일본식 창으로 선수들도 군중들도 같이 선창에 따라 합창을 하며 그들은 진지하게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그 진지한 몰입에 끌려 나는 나도 모르게 스모대회에 마음을 모아 동참하면서 천천히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선서도 하고 창도 하고 하는데 잡아땡겨 위로 틀어 올린 상투머리가 참 앳되고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옛날 동경에서 이른 아침 딱 마주쳤던 스모선수들과의 첫 만남이 그때 그 두근거렸던 느낌과 함께 생생하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각이 나며 피~식 웃음이 났다. 그때의 나는 긴 머리를 찰랑 거리며 꿈 많고 웃음 많은 앳된 아가씨 였었지.

노인 한사람이 돌아가시는 건 도서관 한채가 없어지는 것과 똑같다고 했던가. 어떤 일을 볼때마다 끌어올려지는 옛 기억이나 추억들은 참 사연도 많고 이야깃거리도 많다. 아들은 연신 신기해하며 셔터를 누르고 동영상을 찍고 하는데 나는 옛날 내 무의식에 저장된 것들을 꺼내어 조용히 음미하며 그 시간을 보냈다.

연고가 많고 가까워 가족여행지로 자주 일본을 갔던 우리는 항상 내가 안내를 하고 통역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여행은 완전히 아들이 코스를 짜고 호텔예약을 하고 길을 찾아갈 때도 핸드폰 앱을 보며 안내를 했다. 내 배낭까지 빼앗아서 메고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들의 등이 참 미더웠다. ‘아들아 고마워 이젠 내가 너를 좀 의지 할란다. 참 편하데이.’

여행 마지막 날 저녁 일본 전국 라면을 다 맛볼 수 있는 라면 촌에 갔다. 삿뽀로 라면이 먹고픈데 너무 많은 라면종류에 질려 막상 고르기가 어려워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넌 뭐 먹고 싶어?” 나는 내 혼란을 아들을 통해 해소하려고 얼른 존중하는 척 물었다. 아들은 내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엄마. 엄마가 좋아하는 것 선택하세요. 엄마는 뭐 드시고 싶으세요?” 하였다.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망설이다가 겨우 골랐다.

‘왜 여긴 짬짜면 같은 섞어 라면은 없는거지!’
손님이 많은 어느 라면집에 앉아 아들은 진지하게 나에게 말했다.
“엄마 이제는 엄마가 자기 자신을 사랑 하는걸 연습해야 될 것 같아요. 우리들 생각 하지말고 엄마가 좋은대로 하세요 뭐든지요.” 나는 좀 마음이 찡해왔다.

‘그래 아들아 나는 나보다 너희들이 가장 소중했고 가장 귀했고 그랬었지. 그래서 뭐든 너희들이 좋으면 나도 좋다고 생각하고 살았지.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도 까마득히 까먹고 있었네. 이제는 나도 나를 사랑하는 걸 연습 좀 해야겠구나. 고맙다 잘 커주고 이렇게 내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사랑하는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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