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돋친, 학익1동
상태바
날개 돋친, 학익1동
  • 유광식
  • 승인 2016.11.04 08:27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소요] (5)유광식 / 사진작가
2012_학익1동_ⓒ유광식
2012_학익1동_ⓒ유광식

지도 속의 인천 남구는 인천의 중앙쯤에 위치하는데 왜 그런걸까? 남구가 남쪽이 아닌 중앙에 위치한 사실에 대해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매립이 문제다.) 그런 「중구 같은 남구」의 문학산 서쪽 끝자락 북쪽 아래 위태로워 보이는 작은 마을을 처음 보았을 적에, 해가 잘 비치지 않아 생기는 검은 산 그림자의 느낌이 춥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마주한 학익1동이다. 이 마을을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는 아파트 벨트구역인지 모를 현 OCI공장 터만 빼고는 갑갑한 돌탑(APT,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들이 병풍을 이룬다.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노쇠하고 조용하다. 마을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던 것일까?

여느 가난한 동네답게 덕지덕지 덧대어진 외벽을 세워 삶을 버텨온 내력이 힘겹게만 비춰진다. 사방의 고층아파트는 그나마 한시적인 볕조차 앗아 가는 온실처럼 보여지고 말이다. 좁은 골목을 살금살금 다니다 보면 허리 굽은 어르신의 출입과 성질 급한 개의 큰소리, 버려진 신세의 가재도구, 곪아 터진 젖은 감 등이 돌출한다. 옆 공장에서의 하얀 연기, 자동차학원의 곡선의 궤도, 개울 같은 하수도, 산 너머 먼 바다 그리고 늘 싸늘한 바람 한 줄기가 등을 밀치고 줄행랑을 친다. 이 공간의 역사를 거들 떠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냥 봐도 파헤쳐진, 굴복을 당한, 해체 된 정황이 곳곳에 숨어져 있기 때문이다.

 
2012_학익1동_ⓒ유광식2012_학익1동_ⓒ유광식
 
2012_학익1동_ⓒ유광식
 
2013_학익1동_ⓒ유광식
 
2013_학익1동_ⓒ유광식 


얼마 전 인천시는 세금문제로 골머리를 썩히던 현 OCI공장 터 일부(용현·학익구역 1블록)에 문화성시사업의 일환으로 「인천뮤지엄파크」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남겨진 공장 터와 기존 건물을 활용해 문화의 굴뚝을 불쑥 세운다는 것에 당황도 되지만 환영은 한다. 예부터 인천은 바다매립으로 인해 많은 땅이 생겼고 이 곳에 많은 공장을 세워 국가산업을 성장시켜 왔다. 그 터는 학익동에도 많이 남아 있다. 번쩍번쩍한 아파트는 마치 기념비와도 같아서 섬유, 철강, 화학공장들의 역사를 대신한다. 그 어떤 옛날 군수물자와 내수공급을 위한 여공들의 강도 높은 노동, 환경오염, 사회적 불안 등을 견디어 왔던 사람들. 군소리 없이 말이다. 학익동 집장촌도 이젠 시대의 단어가 되어 아파트(학익엑슬루타워) 무게에 짓눌려 있다. 이 아파트는 그 옆 오랜 아파트 이름인 장미의 뉘앙스와 무언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2015_학익1동(장미아파트와 엑슬루타워)_ⓒ유광식


1995년 협궤열차가 운행을 중단한지 20년여가 지난 올해, 오이도~송도~인천 구간이 전면개통되면서 옛 삶의 실타래가 풀리기를 바라는 분들이 많다. 이곳 학익동도 그러한 영향권의 지역인지라 「인천뮤지엄파크」 가 조성되고 학익역이 개통되면 분위기가 달라질 것을 기대하지만 그 옛날 북적였을 마을의 주변은 현재 적막하기 그지없다. 좁게좁게 밭을 일구는 모습이 이채로울 정도로 불안불안하단 얘기다. 어느 담벼락에 돌고래가 그려져 있고 별모양, 가족·꿈이라는 글자라도 보이면 금세 사라짐을 예고라도 하듯 초조해진다. 위성지도를 통해 본 학익동 작은 옛 촌마을을(최근 호미마을이라 칭하고 마을활동을 전개) 보고 있자니 맘 한 구석이 젖어 든다. 산중턱부터 아래에까지 아파트가 세워지면 나는 그런 생각이 들 것 같다. 일제 강점시 국가의 맥을 끊겠다며 쇠말뚝을 능선에 박았듯 콘크리트 말뚝을 박는 게 아닌 지 말이다. 도시는 자꾸 높이만 재고 있다. 가로, 곡선, 넓이로서의 관계망을 좀 더 확장하고 지원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최근 인천 남구에서는 도시마을생활사를 연구·출판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용현동(토지금고)과 도화동(쑥골)의 마을박물관이 생활사를 잘 연계시키고 있어 상당히 관심이 간다. 있는 자, 권세의 역사가 아닌 삶의 부분부분을 담당하는 서민이 삶의 증언, 기록, 발표가 이제는 대세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빈번해진 터전 파괴의 반증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그렇게 되짚어 본다. 「도시의 변천」은 기본 성질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 모습을 만들고 수정하며 처분을 결정하는 주체다. 아무런 정서적 보상(보전의 미학) 없이 해체 수순을 밟는다는 건 위험해 보일뿐더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물욕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정서적 욕구도 강한 걸로 안다. 지난 역사의 이해, 교육, 보존의 방법을 머리 맞대어 고민해 보고 형태에 흡수시켜야 한다. 확 헐고 헉 세우는 물리적 작업이 아닌 공간의 역사를 고려한 시간성과 공간성을 파괴하지 않는 재생작업의 의미를 담아야 할 것이다. 조개를 캐는 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거나 거주자로서 내면의 역사가 깊다. 집이 곧 개인의 역사라고도 하니 마을의 개개인은 하나의 도서관과 대등하다.

 
2013_학익1동(밭)_ⓒ유광식
 
2014_학익1동(공장)_ⓒ유광식
 
2015_학익1동_ⓒ유광식

학익동 공장의 굴뚝은 거의 사라졌다. 얼마 남지 않은 영세업체들도 자리를 옮겨야 하거나 접어야 할 분위기다. 바다를 메워 만든 땅은 이제 오염되었고 생산의 시대는 가고 재고의 처리로 대체된 현실이다. 이 근처 용현동 옛 미군유류저장고(POL) 자리는 엄청난 세대수의 아파트단지(SK뷰)로 탈바꿈하고 현재 입주가 한창이다. 평평한 곳은 100% 아파트 자리다. 「인천뮤지엄파크」 로 인한 문화단지 조성이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모르나 새로 짓는 시립미술관, 이전되는 시립박물관이 학익동의 지명처럼 삶의 날개를 펴는 문화시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굴뚝의 역사는 의미를 아로새겨 후대로 전해야 할 중요한 인천의 문화자산이다. 더불어 낯선 이방인이 걷다가 노트에 적어 넣는 풍경이 얼마나 중요한 기록인지도 고려가 필요하다.  

이미 용현·학익구역 도시재생사업이 계획된 사업이라고는 하나, 재개발 지역이라는 땅으로서 이 '터'가 포괄한 것과, 어떻게 존재해 왔고, 존재하며, 존재해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알다시피 거주의 문제가 무너지면 매우 힘이 든다. 평생 빈민운동에 앞장 선 프랑스의 피에르 신부(Abbe Pierre/ 1912.8.5-2007.1.22)는 주거권이 위협받을수록 그 사회의 정의 의식은 악화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피력했다.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긍정적 방향으로 날개 돋친, 학익동을 기대한다.

 
2012_학익1동(폐업)_ⓒ유광식
 
2012_학익1동(일)_ⓒ유광식
 
2015_학익1동(철거)_ⓒ유광식
 
2012_학익1동(집)_ⓒ유광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승호 2016-12-08 20:53:36
유광식작가, 오랫만입니다. 한참만에 인천인을 되짚어 읽다보니 유작가의 글이 눈에 들어오는군요.그리고 제 고향에 관한 글이기도 하구요. 유작가 의견대로 이젠 높이보단 수평을 둘러봐야 할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승호 2016-12-08 20:53:28
유광식작가, 오랫만입니다. 한참만에 인천인을 되짚어 읽다보니 유작가의 글이 눈에 들어오는군요.그리고 제 고향에 관한 글이기도 하구요. 유작가 의견대로 이젠 높이보단 수평을 둘러봐야 할때라고 생각합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