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공업의 자취를 찾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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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공업의 자취를 찾아 …
  • 이병기
  • 승인 2010.08.26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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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개항장 역사 도보여행] ③ 근대 상공업의 중심지


옛 조선신보사 모습

취재: 이병기 기자

인천 중구에는 개항과 함께 은행, 상사, 전기·담배회사, 공장 등 다양한 상공업시설이 생겨났다. 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근대식 건축물도 곳곳에 들어섰으며, 아직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들도 꽤 존재한다.

'인천 개항장 역사 도보여행' 세 번째는 경제분야인 '근대 상공업의 도입'이다. 개항기 활기에 찬 상공업 현장을 찾아 떠나보자. 이번 여행은 상공업 역사의 흔적들이 상당히 가까운 곳에 위치해 다른 코스에 비해 쉽고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1. 제물포연초회사 ~  8. 세창양행 사옥


'파라다이스호텔 인천' 입구에 위치한 제물포연초회사 터

개항장 도보여행 첫 편에서 영국영사관 터를 찾아 둘러봤던 '파라다이스호텔 인천'이 3코스의 첫 순서다. 현 파라다이스호텔 인천 입구 부근은 제물포연초회사 터다. 1901년 그리스인 밴들러스가 중구 사동에 동양연초회사를 설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회사는 1903년 수입 담배에 밀려 문을 닫지만, 지배인이었던 미국인 해밀턴이 맥을 이어 다시 이 자리에 제물포연초회사를 세웠다. 제물포연초회사는 '홍도패'를 비롯해 '산호'와 '뽀삐' 상표의 궐련을 생산하면서 1921년 조선총독부가 연초전매법을 실시할 때까지 영업했다.

이곳에서 중부경찰서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어가다 보면 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과 군회조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우선회사


아트플랫폼 교육관으로 사용되는 군회조점

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은 등록문화재 제248호이다. 현재 아트플랫폼 아카이브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우선회사는 도쿄에 본점을 두고 여객과 화물을 수송했던 해운회사. 1883년 4월 인천지점을 설치했다. 이 건물은 1888년에 건축됐다.

아트플랫폼 교육감으로 활용되는 군회조점은 코오리 킨자부로라는 해운업자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회사다. 무역업과 해운업을 담당했다. 1900년대 초기 사무소 건물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지만, 아트플랫폼이 들어서면서 안쪽으로 들어간 부분을 증축해 경비실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군회조점에서 중구청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왼편에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이 나온다. 이곳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금융기관은 1878년 설립된 일본 제1은행 부산지점으로, 인천지점은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로 개설(1883)됐다가 1888년 지점으로 승격됐다. 초기에는 한국에서 생산되는 금괴와 사금의 매입 업무를 대행했으며, 점차 예금과 대출 등 은행 고유의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이후 한국은행 인천지점(1909), 조선은행 인천지점(1911)으로 불리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은행 인천지점이 됐다. 지금은 그 자리에 한국근대최초사박물관이 조성 중이다.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이었던 현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뒷편으로 돌아 한 블럭 지나면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이 나란히 있다. 뒤에는 가와바타 창고가 있다.

1890년 10월, 일본 제18은행이 인천에 지점을 설립하면서 지어진 이 건물은 현재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인천지점 설립은 영국 면직물 중개무역을 하던 나가사키 상인들의 수출업무 증가로 이뤄졌다.

이후에는 조선식산은행(1936)에 업무를 인계했고, 1954년 상공은행과 신탁은행의 합병으로 발족한 한국흥업은행 지점으로 사용됐다. 출입구의 석주는 정교하게 시공돼 있다. 지붕은 목조 트러스 위에 일식기와로 모임지붕 형태를 하고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 현재 인천시음식업조합이 사용하고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도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19호. 일본 제58은행은 1892년 인천에 지점을 설치했다. 이곳은 인천전환국에서 주조된 신·구 화폐의 교환과 한국의 주화를 오사카 본점에 보내고, 새로운 주화를 들여오는 업무를 담당했다.

1946년부터는 조흥은행 인천지점으로, 이후 대한적십자 경기도지사 사옥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인천시음식업조합이 들어서 있다. 프랑스풍 벽돌조 2층 건축물로 1층은 석조 기단으로 돼 있다. 2층에는 발코니와 방을 밝게 하기 위해 설치한 돌출창이 특징이다. 내부 일부는 개보수되기도 했으나, 오르내림식 창문과 벽체·기둥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옛 가와바타 창고

가와바타 창고는 가와바타 에자부로라는 일본인이 1942년 아와야 철물점 창고로 지은 벽조건물이다. 한때 종합설계사무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아침바다'라는 카페가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창고 바로 건너편이 옛 세창양행 사옥 터였던 중앙프라자 건물이다. 독일계 상사 세창양행은 1884년 인천 중앙동에 단층으로 사옥을 세우고 중개무역으로 큰 수익을 냈다.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세창양행은 당시 상해와 일본 고베에도 지점을 가진 대무역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옛 세창양행 사옥 터인 중앙프라자 건물

사장의 이름을 따서 '마이어상회'라고도 불렸던 이곳은 조선의 외교통상업무를 장악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후원 아래 물감과 화약, 금계랍(키니네) 등의 화학제품과 면도칼, 바늘 등의 정밀한 강철제품을 수입해 판매했다. 또 광산업과 해운업, 은행보험대리점업 등 다양하게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당시 <한성주보> 1886년 2월22일자 광고에 중국식 표현인 '고백(告白)'을 게재하면서 한국 최초로 신문광고를 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세창양행은 기민한 상술과 질 좋은 상품으로 인기가 높았지만,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 패하면서 일본에 모든 재산이 동결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9. 후루다 양품점 ~ 15. 타운센트 상회


후루다 양품점이었던 현 '바텀라인' 재즈클럽

신포동 방면으로 걸어가면 우측에 재즈클럽인 '바텀라인'이 있다. 예전에 후루다 양품점으로 사용됐던 곳으로 모자, 넥타이, 양산 등을 팔던 1910년대 상점이었다.


조선식산은행 1차 터였던 중화루

바텀라인 맞은편의 중화루(1차)와 아랫쪽의 신포동 공영주차장 터(2차)가 옛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이 있던 곳이다. 일본은 1916년 데라우치 내각 출범 이후 조선과 만주의 금융 블럭화를 추진했다. 이후 동양척식회사의 만주 진출이 결정되자 조선식산은행을 설립했으며 인천에도 지점을 개설했다.

조선식산은행은 일반 은행업무 이외에도 채권발행과 농·공업, 군수공업의 자금을 공급하는 기능을 담당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강화하고자 했다.


인천미두취인소

"'미두장'은 학교처럼 일요일만 빼고 매일 장이 선다. …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은 마치 싸우는 듯 주먹과 손가락을 꼬부렸다 폈다 하며 '판다!', '샀다!'를 고래고래 소리 질러 시세를 불렀다. 입회인이 딱딱이를 '딱딱' 치면 매매가 성립되고, 시세가 결정된다. … 미두로 패가망신했다는 사람은 많았어도 치부(재물을 모아 부자가 됨)를 했다는 소식은 별로 없었다." - 고일 <인천석금>

현재 국민은행 신포동지점으로 사용되는 곳이 인천미두취인소 터다. 취인소는 쌀이 부족했던 일본이 조선 미곡시장 장악과 일본 조달을 목적으로 설립한 거래소였다. 인천미두취인소는 1896년 5월5일 우리나라 최초로 개설했으며 1937년까지 운영됐다.

취인소 운영은 증권시장의 선물거래와 같은 방식으로 이뤄졌으나, 고일의 <인천석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투기와 가격 조작 등의 폐해를 낳기도 했다.


광창양행 터인 신포동 공영주차장 부지

광창양행이 있었던 자리는 신포동 공영주차장 터로 변했다. 1902년 영국인 월터 베네트가 일본인과 합자해 일영무역상회를 설립하고, 몇 년 뒤 베네트가 독자적으로 경영하면서 광창양행으로 개칭했다. 이곳은 상해로부터 영국제 면직물을 재수입해 판매했다.


일선해운주식회사 인천지점으로 사용됐던 현 선광문화재단

주차장 바로 건너편 현 선광문화재단이 들어선 건물은 일선해운주식회사 인천지점이 사용했던 곳이다. 1932년 세워진 이곳은 1930년대 초기 사무소 건축물로, 인천에 세워진 근대건축물 중 4층 규모로는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


타운센드 상회 터

마지막 장소는 청춘을 동인천과 신포동에서 보냈던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크라운 볼링장'이다. 타운센드 상회가 있었던 이곳은 1884년 일본 요코하마에 설립된 미국무역상사의 인천지점이었다.

미곡무역과 함께 미국의 스탠다드 석유회사와 계약을 맺어 조선에서 석유를 독점으로 판매했으며, 폭약창고를 건설하기도 했다. 1888년 이후에는 무기와 왕실관련 사치품, 전기 관련 용품 등을 판매했다. 1892년에는 증기력을 이용한 정미공장의 효시인 타운센드 정미소를 설립·운영했다.

이 외에도 중·동구 곳곳에서 근대 상공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송월동 2가 2-5에는 인천전기회사 터가 있다. 인천전기주식회사는 1905년 각국 외국인 39인의 공동출자로 시작해 직류발전기 2대, 100kw 규모의 화력발전 시설이었다. 그러나 취약한 자본력으로 1912년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에 매각됐다.


조일 양조회사

조일양조장은 중구 선화동 8-2에 위치해 있다. 1919년 10월 설립된 조일양조장은 타쿠합명 회사가 인천양조장을 인수한 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소주를 대량생산한 곳이다. 소주공장 인수전에는 요시킨 주조장을 인수해 청주공장도 운영했다. 현재는 공장 일부가 선화동에 남아 있다.

조선매일신문사와 조선신보사 터도 개항장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매일신문사는 1921년 일본인 고토 렌페이가 <인천신보>의 발행허가를 얻어 그해 창간호를 냈다. 1922년에는 <조선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해 신문을 간행했다.

조선신보사는 1890년 2월 일본어판으로 창간된 인천 최초의 신문 <인천경성격주상보>의 후신으로 1892년 4월 <조선신보>를 주간으로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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