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배영수 기자
신포동 재즈 클럽 ‘버텀 라인’에서 공연이 열리는 모습. ⓒ배영수
오는 30일(일) 인천 신포동의 재즈 클럽 ‘버텀 라인’에서 ‘사단법인 인천재즈협회(영어명 Incheon Jazz Association-IJA)’가 창립준비 모임을 결성한다. 이날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재즈의 날’이기도 하다.
지난 2011년 11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선언된 이후로 이듬해부터 프랑스 파리, 독일 쾰른 등 여러 도시에서 세계 재즈의 날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들이 열렸으며, 한국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재즈 페스타(Jazz Festa)’가 지난 2013년부터 시작된 것을 기념으로 현재까지 4월 30일을 전후로 국내 유수의 재즈 클럽과 공연장 등지에서 세계 재즈의 날을 기념하는 공연들이 진행되어 정착돼 오고 있다.
오랜 역사를 ‘항구도시’라는 정체성을 갖고 발전해온 인천은 사실 일찍부터 재즈가 정착됐어야 할 곳이었다. 이는 실제 재즈가 태동한 미국 남부의 항구도시 뉴올리언스만 봐도 증명이 된다. 미국의 군사적 요충지인 동시에 유럽 및 아프리카의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오간 뉴올리언스는 재즈가 태동할 조건으로 충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많은 흑인들이 뉴올리언스에 소재했던 해군기지를 통해 입대를 했고, 전쟁 후 전역한 흑인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봤자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뉴올리언스의 홍등가인 스토리빌(Storyville) 지구 주변 등지에서 연주를 하면서 먹고 살 길을 찾았던 것이 재즈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북유럽권에서 재즈 신이 크게 발전해 있는 노르웨이의 경우, 정기적으로 재즈 축제가 열리는 오슬로와 몰데 등이 항구도시다.
그렇다면 왜 인천은 오랜 역사를 항구도시로 발달해 왔으면서도, 왜 재즈가 한 번도 성행했던 도시가 될 수 없었을까? 결정적으로는 수도 서울이 가까이 있고 문화 중심이 서울로 집중됐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겠지만, 인천항과 가장 가까운 국가인 중국의 문호개방이 늦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나올 수 있다. 1949년 모택동에 의해 공산화된 중국이 등소평 등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를 전후해서였다. 또 중국이 한국과의 수교로 인천항이 중국과의 무역 요충지로 급부상하게 된 것도 199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인천 재즈 클럽 ‘버텀 라인’이 34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정작 클럽에서의 공연은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고 몇 년 후인 1997년(피아니스트 신관웅의 13인조 빅 밴드였음)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인천은 ‘항구도시’라는 좋은 조건을 갖췄음에도 재즈가 제대로 커가지 못한 이유들이 분명히 있었던 셈이다.
물론 그 이전에 재즈 문화의 정착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현 버텀 라인의 허정선 대표는 1994년 버텀 라인을 인수 후 임대료가 폭등하는 가운데서도 우직하게 자리를 지켜 왔고, 인천기계공고 밴드부와 해군군악대 등을 거친 김휘동씨 등은 지난 1998년 ‘인천 재즈 모임’을 결성하는 등 노력했지만, 당시 이들의 노력은 저변화로 확대되진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인천이 재즈의 저변화가 가능한 도시라고 굳게 믿고 있다.
당시 모임을 주도했던 김휘동씨는 “저변화의 가능성은 분명히 봤었고 이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이번에 준비위가 가동될 인천재즈협회 역시 그를 비롯해 최근 인천에 정착한 타악기 주자 정정배, 인천 출신의 남성 재즈 보컬리스트 최용민 등을 중심으로 태동한다고 한다.
버텀 라인의 허정선 대표는 “1997년 첫 공연 때 무려 100여 분의 시민들께서 찾아 주시는 바람에 인근 동사무소에서 급히 의자를 빌려오는 등 난리도 아니었던 걸 생각하면 분명히 재즈문화에 대해 일종의 배고픔 같은 것을 느끼는 시민들은 계시다고 본다”고 말했다.
특이한 것은 한국의 재즈 시장이 지난 2000년대 초중반부터 급격히 발전해 왔다는 점이다. 언더그라운드 신에서 오랜 기간 정식 유통 앨범 한 장 없이 활동해 왔던 말로, 웅산 등의 보컬리스트가 앨범을 내기 시작한 2003년은 국내에서 재즈 앨범의 제작 수가 급격히 증가한 원년이기도 했다. 이듬해 첫 개최된 경기도 가평의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은 현재 매년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모으는 국내 최대 음악 축제로 완전히 정착했다. 재즈 팬들의 수 역시 증가하면서 미국 시장 위주로 수입됐던 해외의 재즈 앨범들도 그 범위가 유럽 등지까지 퍼지며 [오딘]과 [컬링 렉스], [인투이션], [에제아] 그리고 [빈터 앤 빈터] 등 유럽의 재즈 전문 음반사들이 발매한 앨범들이 현재 국내에 꾸준히 수입 소개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민간에 의해 인천에 재즈협회가 발족되고 활동을 하겠다는 소식은, 지역문화계는 물론 지역사회 전체를 통틀어 분명 환영받을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많은 예술관련 인사들과 재즈 애호가들이 준비단계부터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분명 희망이 있어 보이는 건 분명하다.
다만 지속 가능한 방안에 대해서는 적잖은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인천시는 예술회관에서 지난 2006년부터 ‘인천 재즈 페스티벌’을 개최해 이를 통해 커트 로젠윙클, 곤잘로 루발카바, 니콜라스 페이튼 등 세계적인 뮤지션의 무대를 유치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처참한’ 수준의 프로그램(무대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과 인프라의 부족, 시의 재정난 및 시의 지원을 받았던 주최 측의 비위 논란 등으로 2010년 이후 문을 닫고 말았던 아픈 역사가 있다. 더 앞으로 가면 1998년 시작된 인천 재즈 모임이 그 역사를 지속하지 못한 아픔도 함께 있다.
분명 인천재즈협회도 이런 부분들을 감안할 것이다. 세계 재즈의 날을 기념하면서 대외적으로 준비를 천명하는 것은 좋은 기회가 될 테지만, 지속 가능성에 대해 적잖이 고민해야 한다. 협회 스스로를 위해서도, ‘지속 가능성’은 가장 절실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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