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도 111년, 그 영욕의 역사
상태바
한국철도 111년, 그 영욕의 역사
  • master
  • 승인 2010.09.20 20:0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철도의 날]최초의 경인선(인천~노량진)…일제의 국내 침탈 '교두보'


"… 화륜거 구르는 소리가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 - 독립신문

9월 18일은 '철도의 날'이다.
1899년 국내 최초의 경인철도(인천 우각리~노량진)가 개통된 날을 기념해 정한 것이다.
한국 철도 111년.
그러나 그 역사에는 영욕(榮辱)의 세월이 있다.
일제는 근대화를 빌미로 경인선을 비롯해 경부선과 경의선 등 철도를 놓으면서 한국침탈을 가속화했다.
오늘날 전철과 KTX 등의 열차를 타고 전국을 일주하는 세상으로 변했지만, 국내에 처음으로 경인철도를 놓을 당시만 해도 그런 일제의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 경인철도 … 영욕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처음 철도의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던 사람은 1889년 미국에서 귀국한 한국 대리 공사 이하영(李夏榮)이었다. 이후 1894년 조선 정부는 드디어 철도업무를 관장할 철도국을 정부에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일본은 철도 부설권을 얻으려 획책하였으나, 고종 황제는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에게 부설권을 주었다. 그리고 1897년 건양 2년 3월 22일 인천부 우각리(仁川部 牛角里, 도원역 근처)에서 첫 공사를 시작했다.

1825년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철도가 개통된 지 72년 만의 일이었다. 말이나 가마를 이용했던 당시 교통사정에 비추어 보면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모스는 기공식 후 곧 자금난을 겪게 되자 부설권을 일본의 경인철도인수조합에 넘겼고, 이 조합은 다시 이를 경인철도합자회사에게 되넘겼다.
 
부설권을 최종적으로 인수한 경인철도합자회사는 남은 공사를 모두 마치고, 1899년 9월 18일 인천역과 노량진역에서 각각 개통식을 가졌다. 인천역과 노량진역 사이 33.2km에 달하는 경인선에 마침내 '개화'의 상징으로 여기던 '철마'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경인선 개통은 우리 교통사에서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한국철도가 발전해 나가는 모태로 작용했다.

하지만 일제는 경인선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경부선과 경의선 등을 부설하면서 국내는 물론 대륙 침탈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빠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사람과 물자를 실어나르며 여기저기서 제국주의 야욕을 채우며 나라의 곳간을 앗아갔다.

◇ 경인선 개통 … 인천의 변화
 
19세기에 기차가 발명돼 철도여행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은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1825년 영국의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 철도가 부설된 것을 시작으로 4년 후 리버풀~맨체스터간 철도 영업이 시작됐다. 아시아에선 1853년 인도에 처음 철도가 놓였고, 이어 일본에선 1872년에 철도가 도입됐다.

 
경인철도 기공식 모습(출처 : 인천시사) 
 
경인선 개통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모스가 1897년 3월 22일 인천에서 350여명의 일꾼들을 모아 철도공사를 시작했으나, 워낙 많은 자본이 들어가는 공사인 데다가 기술 문제 등으로 더 이상 진척이 어려웠다. 결국 100만 달러에 철도를 대륙 침탈의 도구로 사용하려던 일본인 손에 넘겼다. 그후 1899년 9월 18일에 인천~노량진간(33.2km)에 철길이 생겨나 우리나라 최초의 증기 기관차가 달리게 된 것이다.

처음 노선 계획은 지금과 약간 차이를 보인다. 경인철도 부설 당시 숭의동 옛 전도관(현 예루살렘교회) 자리에 주한 미국 공사였던 알렌 박사의 별장이 있었던 관계로 우각역을 개설했고, 거기서 독각다리(숭의로터리 서쪽부근)를 거쳐 지금의 사동(인천여상 남쪽)에 종착역인 인천역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곳 철도부지에 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지주들의 방해로 노선을 확정하지 못하고 경인선 노선은 우각역을 거쳐 채미전 거리(옛 청과물 시장)에 있던 축현역을 지나 응봉산을 휘어감고 인천역으로 향했다.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준공되고, 같은 해 7월 8일 노량진~서울(당시 서울역은 서대문 근처) 사이를 개통해 인천~서울이 완전히 연결됐다.

  
경인선을 달리던 철마(출처 : 인천시사) 
 
개통 당시 경인선은 증기기관차 4대와 객차 6량, 화차 28량으로 운영됐다. 인천역-축현역-우각역-부평역-소사역-오류역-노량진역 등 7개역에 119명의 직원이 종사했다고 한다. 33.2㎞ 구간을 1시간 30분에 달렸으며 오전과 오후 하루 2차례씩 왕복했다.

인천의 변화는 경인선 개통과 더불어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천항을 통해 통해 들고나는 사람과 물자는 당일 서울로, 인천으로 향할 수 있었으니 가히 '천지진동'할 일이었다. 이렇듯 경인선 개통으로 인천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바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수도권 전철요금은 비교적 저렴한 편이지만, 경인선 개통 당시 열차요금은 일반 서민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비싼 가격이었다. 그래서 인천에서 꽤 사는 집이 아니면 학생들은 서울로 통학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객실은 3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1등 객실 요금은 1원50전으로 외국인과 귀족들만 이용할 수 있었고, 2등실은 80전으로 형편이 그래도 나은 내국인이, 그리고 3등실 요금은 40전으로 여성과 서민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를 당시 물가 시세로 환산하여 보면 면포 한필 값이 1원 정도 했으니 1등실 요금보다 더 쌌고, 2등실 객실 요금은 계란 100개와 3등실 요금은 닭 두 마리 값어치와 같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일제가 경인선을 포함한 경부선과 경의선을 부설하기 위해 발버둥친 속뜻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본은 틈만 나면 우리나라 침략을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길이었다고 떠들어댔지만, 조선의 철도는 대륙침탈과 식민지 경영을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사죄와 피해자들에 대한 납득할 만한 보상 등도 없이 역사를 왜곡하고 망언을 일삼는 일본의 태도를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당시 근대 문화는 경인선 철도에서 보이듯 인천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의 왜곡된 근대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근대 문화는 새로운 '문명세계'로의 진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제국주의의 착취와 수탈을 위한 지배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에게는 또 하나의 비극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경인철도 최초기공지비(도원역 부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야 씨발 내가꺼져이다 2015-05-20 06:13:26
야 씨발 내가꺼져이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