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식 건물들, 흔적조차 희미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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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식 건물들, 흔적조차 희미한데…
  • 이병기
  • 승인 2010.09.2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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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개항장 역사 도보여행] ④ 옛 '인천인'들의 삶


파울 바우만 주택 터. 현 자유공원 내에 있었던 바우만 주택 터는 1906년께 건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일부가 파괴되고 1955년 송월초등학교를 신축하면서 철거됐다.

취재: 이병기 기자

개항장 도보여행 네 번째는 도시인의 일상이 담긴 주거공간을 둘러보는 시간이다. 미국과 영국, 일본, 청국 등에서 온 외국인들은 자국의 특색에 맞는 주택을 지어 생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 전쟁 이후 소실된 곳이 많아 다른 도보여행에 비해 남아 있는 데가 적은 편이다.

국방부와 인천시는 14일부터 16일까지 인천시내 곳곳에서 9.15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 인천시는 기념행사의 취지로 전쟁 당시 실상을 이해하고 참전용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참전국과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앞서 언급한 부분에도 의미가 있겠지만, 전쟁의 한 가운데서 포탄세례를 맞아 사람이 죽고 건물이 폐허로 변한 인천에서 인천상륙작전이 과연 '기념해야 할 역사'인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당시 세계 각국의 '주택전시장'과도 같은 이곳에서 그들의 삶을 상상해 보자.


존스톤 별장 터인 현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

1~6, 존스톤 별장에서 데쉴러 주택 터

출발지인 인천역에서 첫 번째 목적지인 존스톤 별장 터까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어쩌면 거리보다도 차이나타운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때문에 더 멀게 느껴질 수도 있을 터이다. 

자유공원 정점에 있는 존스톤 별장 터에는 현재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존스톤 별장은 영국인 사업가 제임스 존스톤의 여름 별장으로 1903년 착공해 1905년 완공됐다.

1919년까지는 존스톤의 소유였으나, 그가 죽은 후 칼 발트 등에게 넘어갔다. 1936년 인천부청이 매입해 서공원회관으로 명명했다. 이듬해에는 고급 여관 겸 요정인 인천각으로 개칭됐다. 광복 후에는 미군 고급장교 기숙사로도 사용됐으나, 아쉽게도 6.25 전쟁으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업가 제임스 존스톤은 중국 상하이에서 항만시설 공사를 담당했다. 인천 응봉산 정상에 여름별장을 지어 해마다 가족과 친구와 함께 별장에 들렀다. 한 때 기선 한 척을 전세 내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고 한다.


세창양행 숙사 터. 현재 맥아더장군 동상이 서 있다.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들어봤을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다. 그러나 이곳은 1883년 건립된 세창양행 숙사 건물이이었다. 아마 처음 들어보는 이들이 대다수일 게다.

세창양행 숙사 건물은 독일에서 온 3명의 사원을 위한 기숙사로 인천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주택이다. 1922년에는 인천부립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이 이곳에서 개관했다. 하지만 이 건물 역시 6.25 전쟁 중 소실됐다.

맥아더 장군 동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우측에 작은 샛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코노 다케노스케 별장 터가 나온다. 일본인 사업가인 다케노스케의 별장은 1900년경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옛 코노 다케노스케 별장 터다.

광복 후에는 송학장이라는 댄스홀로 사용됐으나 인천시에서 매입해 한옥으로 개축했다. 1966년부터 2001년까지는 인천시장 공관으로 쓰다가 지금은 인천시 역사자료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가다 보면 헨켈 주택 터가 나온다. 세창양행 사원인 독일 출신 뤼르스가 신혼 살림집을 차리기 위해 1895년 신축한 것으로, 뤼르스 이후 헨켈이 거주해 '헨켈 주택'이라고 불렸다. 이 역시 6.25 전쟁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중소업체의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다.


헨켈 주택 터.

언덕을 내려오다 보면 인성초등학교가 나오는데, 이곳과 맞은 편 두 곳이 모두 옛 외국인들의 거주지였다. 현재 동국빌라가 있는 장소는 중국인 우리탕 주택 터였다. 1883년 인천해관의 방판으로 들어온 우리탕이 1909년 건축했다.

1930년에는 상공회의소 대표 요시다 히데지로가 사용하다가 광복 후에는 미군 독신장교 숙소로 이용됐다. 그 뒤로 육군방첩대로 쓰이던 중 1968년 화재로 소실됐다. 중국 장쑤성 출신인 우리탕은 1883년 인천에 들어와 청국 총영사관 서기관을 역임하고 1899년 은퇴까지 인천해관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진다.


데쉴러 주택 터인 현 인성초등학교.

인성초등학교 운동장 부지는 데쉴러 주택 터로,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의 사택이자 동양합동광업회사의 본사로 사용됐다. 1905년 데쉴러가 중국으로 떠난 후 우로코라는 일본식 요정으로 쓰이다가 광복 후 영화제작자 최철(배우 최불암의 부친)의 가옥과 다비다 모자원으로도 이용됐다.

 7~12, 모스 주택 터~인천부윤 관사


모스 주택 터. 현 인성여자중학교.

모스 주택 터는 지금의 인성여자중학교 자리에 있었다.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제임스 모스가 1896년 신축했다. 6.25 전쟁으로 훼손됐으나 1954년 국회부의장을 지낸 곽상훈이 복원해 살았다.

우리나라 최초로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제임스 모스는 뉴욕과 요코하마에 있었던 미국무역상사의 대표였다. 1897년 3월 인천 우각현에서 기공식을 열었지만, 자금난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경인철도조합과의 의견충돌로 이듬해 12월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넘겼다.


맥코넬 주택 터.

현 인천중부교회 제2교육관 자리에는 인천 해관장을 지낸 영국인 맥코넬의 주택이 있었다. 이후 이당기념관으로 사용됐으나 재건축으로 인해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1905년 인천의 8대 해관장을 맡은 마지막 서양인 해관장이었던 윌리엄 맥코넬은 25세에 인천으로 들어와 강제 송환될 때(1943)까지 타운센드 상회대리인, 홍콩상하이은행(HSBC) 지점장 등을 지냈다.

고(故) 신태범 박사는 '인천 한세기'에서 맥코넬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는 날씨만 좋으면 매일 단장을 휘두르며 개를 데리고 꼭 한국촌을 골라 산책했다. 테리아종의 조그만 개는, 서양 사람은 개까지도 매일 비누로 목욕을 시킨다고 이상히 여기고 있던대로 깨끗한 순백색이어서 누런 토종개밖에 모르던 우리들에게 무척 신기하게 비쳤다."


유항렬 주택 터.

자유공원 방향으로 올라가 내리교회 옆 언덕으로 내려오면 아직 형태가 남아 있는 유항렬 주택이 나온다. 1930년대 초 건축된 것으로 알련진 이곳은 벽돌조 2층 건물로 출입구 위에 발코니를 설치해 2층에서도 별도로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주택 내부의 방은 다다미를 깔아 일본식으로 구성했다.

충남 공주 출신인 유항렬은 일본 도쿄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우선주식회사에 취업해 승선 경력을 쌓았다. 이후 1928년 선장을 맡은 후 1937년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가 됐다. 1947년 인천항으로 상륙하는 미국의 리퍼블릭 선단을 입항시켰으며, 1961년까지 25년간 인천항에서 도선사 생활을 하다 퇴직했다. 1984년에는 후배 도선사들이 인천항 갑문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고유섭 생가 터인 현 동인천길병원 주차장.

다음 목적지인 우현 고유섭 생가 터까지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신포동 번화가를 거쳐 동인천 길병원에 도착하면 바로 옆 주차장이 고유섭 선생의 생가 터다. 인천시는 이 부근 대로를 고유섭 선생의 호를 따 우현로라 개명했다. 

인천 출신의 미술사학자이자 미학자인 우현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최초로 미술작품과 문헌기록의 고증적 연구를 했으며, 한국미술의 근대적 학문체계를 이룩했다.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우리나라 전역을 답사하며 연구했다. 석탑에 최초로 양식 개념을 준 '조선탑파의 연구', 회화사 연구의 길을 닦은 '조선화론집성' 등 8권의 책과 150여편에 달하는 논문을 저술했다.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인 구 인천시립도서관 구관. 리키다케 별장 터다.

언덕을 따라 올라 구(舊) 인천시립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옆에 리키다케 별장 터가 나온다. 현재는 리모델링 중인 도서관 별관(구관) 건물과 당시 사용했던 일본식 석등, 석조, 정원석 등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형태와 위치가 변해 옛 모습을 가늠하기 어렵다. 광복 후 미군 숙소가 되기도 했으나 1946년 시립도서관으로 개관했다.


인천부윤 관사.

마지막으로 찾아갈 곳은 신흥동에 남아 있는 일본식 주택인 인천부윤 관사다. 기존에는 중구청 부지 안에 있었으나 신흥동으로 관사를 신축해 이전했다. 1966년 새로운 시장공관(현 인천시 역사자료관)이 세워지기 전까지 인천시장 관사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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