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도로전쟁 10년 , 그녀가 있다 - 하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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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도로전쟁 10년 , 그녀가 있다 - 하유자
  • 강영희
  • 승인 2017.07.27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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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통신 5] 고향같은 이곳

지난 봄 동구청에서 생태공원을 들쑤시며 주민들 속을 긁어 놓을 때 구청에 가서 기자회견을 하고 둘러앉은 자리였다. 1년 전 즈음 배다리로 이사 온 한 주민이 이런 말을 했다. " '배다리는 세 명의 여인이 지켰다!'는 소리를 송림동에서 살 때 많이 들었어요. 세 명의 여인이 산업도로를 막아냈다고 ... "


 
@배다리를 지킨 세명의 여인 _ 좌로부터 곽현숙, 하유자, 박태순

 
종종 산업도로 부지 인근에서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치는 동네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또 어느 놈이 쓰레기 버리다 걸렸나? 꽃나무를 뽑아갔나?' 생각한다.
 
도로 개설은 멈췄지만 마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도로부지는 여러모로 골칫거리였다. 철재 울타리(펜스)로 둘러놓았는데 그 안에 몰래 버린 쓰레기들이 쌓여 악취가 났다.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요청해 가림막으로 쓰인 펜스를 걷어내고, 쓰레기를 치웠다. 그래도 주차된 차량에서 슬그머니 버리고 가는 쓰레기도 적지 않았고, 개를 끌고 와 똥을 누이고 사라지는 이웃 동네 주민들도 있었고, 음식쓰레기를 이 땅에 아무렇게나 버리는 주민들도 있어서 골칫거리였다.
 
도로를 낸다고 할 때 집에 금이 가고, 그 집 일부가 잘려나가는 고충을 격은 하유자(65)님은 잘린 집을 수리해 살았는데, 도로가 멈춘 후에도 그런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어떻게 지킨 땅인데 그럴 수 있느냐며 호통을 치면 다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리를 피하곤 했다.

 
 
@폐허를 방불케 했던 펜스 안의 모습 


그렇게 도로부지는 쓰레기장에서 공터가 되어 풀과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코스모스가 자라기 시작할 즈음 구청에서 평평한 자리를 포클레인으로 밀어버리고 주차장을 만들려고 해서 한바탕 난리를 격은 후 주민들의 요청으로 2012년 텃밭도 만들어졌고, 텃밭 뒤로 자연스럽게 코스모스가 피고 허브 군락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야생화와 풀, 나무, 그리고 곤충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2007년 펜스 안 모습-그곳도 사람들이 살다 나간 곳이라 건축 폐기물이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돌투성이 도로 부지는 나무와 풀, 꽃들이 스스로 자라는 생태공원이 되고, 도시 속 작은 캠핑장이 되고, 주민들이 어우러져 불꽃놀이도 하고 국수도 나눠먹는 야외 파티장이 되었다. 배다리뿐 아니라 이곳을 오고가는 사람들 - 정보산업고를 오가는 학생들, 버스를 타러 참외전로나 송림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산책로가 되고, 쉼터가 되고, 놀이터가 되었다.
 
그렇게 이 도로 부지가 푸른 녹지공간으로 자리 잡기까지 시끄럽고 막돼먹은 동네 아줌마 역할을 자처하며 애써온 분이 바로 하유자씨다.
 
배다리 10년의 소회를 여쭸더니 "다 걸고 싸웠어, 회한이 남지 않을만큼..." 하신다.  더운날 정자 아래서 여름바람속에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인터뷰 뒤의 풍경에 연신 미소를 잃지 않으신다. 인터뷰 내내 뿌듯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악랄했지 그때, 지독했어! 나…"
 
하유자씨는 배다리로 오기 전 중앙시장에서 국수집을 하셨다. 2003-4년 즈음 중앙시장 일부와 양키시장이 있던 공간이 헐릴 때 그곳에서 밀려나 배다리로 오게 되었다고 하신다. 이사 갈 집을 구하며 돌아다니는데 배다리를 살필 때 지금의 집이 눈에 쏙 들어오더란다. 당신의 고향 - 경남 거창의 시골마을로 돌아간 듯이, 어린 시절 순수했던 자신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서 살게 된 배다리였단다.
 
2003년 중앙시장에서 그렇게 쫓겨나고, 겨우 살게 된 고향 같은 마을 배다리는 산업도로 개설로 그 서정을 잃어버릴 상황이었고, 야트막한 언덕 위의 작은 집조차 도로 때문에 금이 가고 잘려지게 되자 악만 남더란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그땐 정말 악랄하고 지독했다고 회상하셨다.

 
 

"이젠 싸움을 해도 여유로와…"
 
10년의 도로전쟁에 대한 소외를 여쭈었다. 힘들고 고됐지만 마음을 다해 힘껏, 양심껏 싸웠기에 회한이 남지 않는다고 하신다. 이 땅 건드리는 관과 이웃들과도 참 많이 싸우며 보냈지만 그래도 덕분에 쓰레기와 돌 밖에 없던 땅이 “이렇게 멋지게 변했으면 됐잖아.” 하신다. 온갖 사람들, 온갖 문제들을 맞닥뜨리며 보낸 10여년, 당신은 늙어졌지만 강하고 부드러워졌다.
 
지난 봄부터 ‘텃밭경작 금지’를 시작으로 새싹이 나기 시작한 땅을 뒤엎고 놀이기구까지 몰래 가져가며 주민들을 들쑤시는 구청과 또 한 판 했지만 예전처럼 힘들지 않더란다. 관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고, 해야 할 것이 뭔지 알고, 악다구니를 써야할 것이 뭔지 알고,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뭔지 알게 되니 어떻게 싸워야 할지 알거 같다고 하신다.
 
 
“그게 유일한 아쉬움이야 …”
 
싸움이 끝나고 공터를 조금 더 가꾸며 살았어야 했다며 아쉬움을 표하셨다. 그 고생을 해서 주민들의 땅을 만들어놨는데 구청에서 아무것도 안하다가 제멋대로 숟가락을 얹으려는 태도를 보니 화가 나지만 싸움이 끝났다고 손을 놓을 게 아니라 그때부터 더 열심히 가꿨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며 반문하신다.
 
10년 전 시작한 싸움은 5년 전에야 지하화라는 어정쩡한 결정이 나고서야 손을 놓을 수 있었다. 길고 고된 싸움 뒤에 지치고 힘든 몸을 추슬러야 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유자님은 그때부터 더 열심히 가꾸고 다듬어 왔으면 지금 와서 아무것도 결정된 적이 없다며 발뺌하지 않았을 텐데, 다시 도로를 내니 어쩌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거라며 그게 유일한 아쉬움이라 하셨다.

 

@하유자님

 
“동구 주민들이, 노인들이 자존심을 세웠으면 좋겠어!”
 
동구에 있던 경찰서며 고속버스터미널은 다른 곳으로 갔고, 배다리에는 은행 하나 우체국 하나 노인정 하나 없다. 주민들이 적다고 나이 먹었다고 무시하는 행위라며 역정을 내셨다. 그렇게 뺏기면서도 아무 소리 안하는 이웃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다.
 
노인, 어린이, 여성을 위한 도시라면서 그들을 위한 기본적인 편의시설도 하나 제대로 못 갖추면서 큰 돈 들여서 헛짓꺼리만 하니 속이 터지신다며 주민 이야기만 잘 듣고 함께 하면 어느 구청장이 와도 상관이 없을텐데… 하신다.
 
긴 싸움 속에 상처받고 상처주었던 스스로를 반성하시며, 악다구니 아래 숨겨진 여린 마음은 큰소리를 치면서도 농을 섞으며 다독일 줄도 아는 지혜와 여유가 자리잡았다. 몸도 힘들어 안 싸우고 싶다고 하시면서도 여전히 “싸울라고 하면 싸워!” 하는 기개가 흘렀다.



@하유자님이 키운 화분과 집 옆에 공터는 어떤 곳보다 정성스럽게 가꿔져있다.


송도와 청라를 잇기 위해 그 가운데 오래된 마을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마구 뚫어버린 길, 그 길 대부분이 이 동구에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던 이곳은 그때와 다름없이 무시당하고 배제되고 소외되는데도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다는 하유자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생태공원은 이웃과 이웃을 이어주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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