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쌀집과 동화서적은 벽이 하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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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쌀집과 동화서적은 벽이 하나래!
  • 강영희
  • 승인 2017.09.07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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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통신 8] 오래된 마을의 풍경 2


@ 할머니 등에 엎혀 환하게 웃는 이 아기는 벌써 초등학교에 다닌다. 사진_2010년 6월 26일 


이모네 주먹밥이 이사간 곳, 작은 분식집이 있었고, 선물가게가 있었고, 사각공간이라는 헌책방이 있다가 이제는 이모네 주먹밥이 이사 들어간 집의 주인할머니는 마을 텃밭을 바지런히 가꾸며 '다행'앞을 오간다. 1년에 대여섯번 작물이 바뀔 정도로 열심히시다.

할아버지는 폐지를 주으며 지내셨는데 지난해 초 계단에서 굴러 요양원에 들어가셨고, 초여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거의 웃는 얼글을 뵌 적 없다. 언제나 굳어있던 할머니 얼굴은 더욱더 굳어진채 호미며 물통, 거름을 가지고 '다행' 앞을 오가신다. 



@여름이면 그늘이 지는 강화쌀집 앞에는 복술가집 골목 어르신들이 나와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시곤 한다. 골목안 터프 할머니라 불리셨지만 잔잔한 정이 많으셨던 어르신은 봄이 시작될 즈음 뇌졸증으로 쓰러지셔서 따님댁으로 가셨다.  사진_ 2013년 8월 31일


9월 5일 화요일 아침, 다행(‘마을사진관 다행’)쪽 작업실에서 주말에 어질러놓은 탁자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한점(‘갤러리카페 한.점으로부터’)쪽 문 앞에서 우신양복점 어머님이 “강화쌀집 할머니 요양원 들어가셨어...” 누군가에게 전하는 말소리를 들었다. 탁자를 정리하다가 ‘아!’ 하는 낮은 탄성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지난밤 아들이 와서 하룻밤 자고 오늘 아침에 모셔갔어. 2층 아줌마(다행 주인집)랑 내가 아들 올 때까지 같이 있었어.” 하며 양복점 어머님이 말씀을 전해주셨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식사고 물이고 잘 챙겨 드시지 못하셨고, 기력이 많이 쇠한데 보살필 사람이 없어 자녀들이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했다고 하셨단다.


 ‘아, 살아서 다시 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지난밤에 아들 기다리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할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  당신 때문에 서운한 거, 속상한 거 있으면 마음 풀라고 미안하다고 해주라고 말씀하시더라고, 이제 (요양병원에)들어가면 죽어서나 나올 텐데... 하셨어요 ..” 라며 말씀 전해주는 양복점 어머니 앞에서 또르르 속절없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겨울엔 한점 앞에서 해바라기를 하신다. 왼쪽부터 그린기획 할머니랑 강화쌀집 할머니. 사진_2013년 3월








 







강화쌀집 할머니는 막내아들을 창영동에 와서 낳았다고 하셨으니 아드님은 얼추 50세가  넘었고, 당신은 올해로 57년을 사신셈이라고 한다. 지난 봄 할아버지가 운신을 못하실 때만 해도 할아버지 삼시 세끼 때문에 꼼짝도 못한다며 힘들어 하셨다. 당신 돌아가신 후 좀 홀가분해 하시던 차였고, 그렇게 슬프다 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러던 할머니가 두어 주 전부터 창영복지관에 점심식사를 하러 가시곤 했고,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는 일이 많아지셨다.

원래 할머니는 시끄러운 사람 오는 것도, 그런 자리에서 지내는 것도 싫어하시던 분이셨는데 어찌된 일인가 '다행' 집주인 할머니께 여쭈었더니 얼마 전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이곳저곳 다니라는 의사의 말에 나름은 노력 중이셨던 것. 종종 마을 곳곳으로 쌀 배달을 다니시던 할머니가 쌓아놓은 쌀을 마저 팔고 쌀가게를 그만두셨다는 말씀도 전해 들었다.
 

지난주 화요일엔 며칠 병원에 계셨다가 나오시기도 했다. 혼자 계시니 잘 챙겨 드시지 않아서 기력이 많이 쇠하셨다고 한다. 퇴원 후 가게 문을 열어놓고 이웃들과 담소 나누는 모습을 종종 보았고, 뵐 때마다 일부러라도 눈을 맞추고, 아침 저녁 출퇴근 인사도 드리곤 했고, 그때 만해도 ‘괜찮아지셨구나!’ 했었는데 자꾸 울컥한다.

40여 년 부평에서 식당을 해오시던 필자의 엄마가 지난 봄 식당을 정리하신 후 여러 상황- 우울증은 아녀도 퇴임 후 맞는 심리적, 물리적, 경제적, 시간적 변화를 맞닥뜨리며 많이 힘들어하시는데 그 모습이 느껴지던 차였다. 혼자 계시면서 식사도 제대로 안하셔서 쓰러지시곤 해서 아들 내외와 손주들의 애를 태우던 이모 모습도 강화쌀집 할머니와 겹쳐졌다.



@화랑공예사는 간판을 땟고, 동화서적은 구조변경을 했고, 주인이 바뀌었다.성대공예사도 리모델링을 했다. 사진_2015년 1월



강화쌀집 옆 동화서적 건물은 40여년이 넘은 오래된 집인데 주인이 2층에 들어와 살려고 지난 봄 단단하게 구조 변경을 했는데, 다른 곳에 벌인 일로 급전이 필요해 처분했다. 다행히도 배다리를 좋아하게 된 한 시인이자 구연동화와 연극 활동을 하는 조은숙씨가 우연히 그 상황을 알게 되고 산곡동 집을 처분하고 지난 5월 이 집으로 들어와 자리 잡았다.

 

비가 좋게 내리던 지난 주 수요일, 엘살바도르 유학생인 쥴리가 그녀를 찾아 한점에 들렀다. 지난 2월 엘살바도르의 날 ‘뿌뿌사’라는 전통음식을 만들던 친구가 귀국했다가 대학원 공부를 마치기 위해 다시 들어왔고 정많은 이웃 은숙씨가 어려운 유학생 살림을 도우려고 불렀다고 한다. 이사온 집도 찾아줄 겸 그녀와 함께 동화서적 옥상을 처음으로 올라가 둘러봤다.

 


@동화서적 옥상에서 강화쌀집 옥상은 같은 마당처럼 이어져 훤히 들여다 보인다. 그렇게 다 드러내도 괜찮은 이웃이 있다. _2017년 8월 24일



강화쌀집 옥상에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나들기가 너무도 쉬워보였다. “이 집 둘러볼 때 강화쌀집이랑 벽이 하나인거 같다고 했잖아? 정말 벽이 하나야!” 이유인즉슨 강화쌀집과 동화서적 주인집은 사이가 좋았고 아이들도 서로 친해서 집을 지을 때 벽을 따로 쌓지 않았다고 했단다. 70센티 높이의 형식적인 외벽 하나...

 

@너무 가물어서 따먹으라는 오이는 다 말랐지만 고추는 튼튼히 자랐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말리던 고추는 다 빻으셨는지 이것저것 걱정되고 궁금해진다.


할머니가 떠나고 셔터가 내려진 강화쌀집 옥상의 무성한 작물들을 자꾸 올려다보게 된다.

 

 @강화쌀집&동화서적 옥상에서 내려다본 다행과 한점, 우신양복점, 우각로










강화쌀집 할머니와 종종 함께 계신 이웃할머니는 그린기획 할머니다. 충청도에서 올라오신지 7-8년 되었다고 하신다. 처음엔 '다행' 앞에 화분에 난 강아지풀, 까마중, 나팔꽃 같은 들풀과 들꽃을 죄다 속아내셨는데 "할머니 도시에서는 이런 것도 귀해요, 그래서 그냥 키우는 거니까 힘들이시지 말고 그냥 두어주세요~" 몇 번을 말씀드리니 소녀처럼 웃으시며 그러마 하셨다.

충청도에서 들일 밭일 작은 농사를 지으시며 홀로 계셨는데 따님인 그린기획 사모님이 손녀인 지수를 돌봐달라는 핑게로 모시고 올라온 것. 지수는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에 갔고, 딸내미 내외는 연수구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아파트는 답답해서 못살겠다며 배다리 집에서 홀로 지내신다.

그나마 마을텃밭 한뙤기를 바지런히 가꾸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풀 투성이에 토종딸기와 약쑥을 키우는 다행텃밭의 이웃텃밭이라 불만이 많으시다. 비가 왔으니 나도 풀을 좀 잘라내야겠다 마음먹지만 손에 붙은 일도 아니고 해서 까먹기 일수다.



@어른들은 거저 드시는 걸 불편해 하셨다. 빈 테이블과 의자를 늘어놓고 언제든 앉으시라고 말씀 드려도 왠만하면 않지 않으신다. 지난 해 여름 얼음 동동 띄운 오미자 차를 대접했는데 다 드시고는 기어이 몇 천원을 내밀고 가신다. 그냥 두라 해도 성을 내시며 그러면 안된다고 하신다. 사진_ 2016년 8월 29일


여름이 오지 않길래 이번 여름은 짧네 기네 할때 갑작스레 찾아와 유래없이 마른 여름이다 싶었을때 엄청난 비를 뿌렸다. 휴가가 끝나고 오는 8월 초면 도원역부터 창영동 골목골목은 붉은 고추말리기로 장관이었는데, 가뭄끝에 긴 비 때문에 할머니들의 고추말리기는 "몇 박스를 샀는데 다 녹았네, 썩었네" 하는 소리로 들려왔다.

도시 한 가운데 많이 작아진 오래된 마을, 배다리의 사람사는 풍경이다. 장사도 거의 되지 않고, 사람도 거의 없어 6시면 문을 닫는 카페를 운영하고, 한 달에 한 두번의 손님이 고작인 사진관을 운영하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얼까 생각해본다. 

삐까번쩍 네온사인보다는 일상의 소박함이 주는 따스함, 부평 한 가운데 집에서 누릴 수 없는 시골길의 여유와 편안함이 아직은 남아있어 인천이라는 거대 도시를 떠나지 않게 해주는 힘이 여기에 있다. 

인천시나 동구에서는 관광지 개발을 이야기 하고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길가에 여유롭게 앉아 이웃들과 옥수수에 감자 쩌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둘러앉으면 마실이 되는 창영동, 배다리의 이 기운이 더없이 좋다.

이렇게 글 쓰고 사진 찍는 것으로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어 이곳을 떠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한다. 관광지가 되어 사람들이 많이 오고가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강화쌀집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떠나신 날 배다리 사랑방에서는 마을 텃밭 위로 지나가겠다는 도로를 막기위한 주민모임이 있었다. 이 작은 마을의 힘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나랏일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어른들 속에서 10년이나 마을을 지켜낸 힘 말이다.



@복술가집 골목 끝에서 보면 영 문구 옥상의 단칸방도 보이고, 멀리 아파트도 보인다. 이 사진속 집 4채가 헐리고 빌라가 들어서고 있다. 인천지방문화재인 창영초 앞에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사진_2014년 12월



@문화재 코 앞에 빌라가 세워지고 있다. 건물이 높아질 수록 그늘도 깊고, 마을은 어두워진다. 사진_2017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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