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인천, 그리고 평화
상태바
전쟁과 인천, 그리고 평화
  • 학오름
  • 승인 2017.11.15 15: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진오 경인일보 인천본사 정치부장
1950년 9월 17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호주의 종군기자 알렌 램버트가 포착한 장면이다.<정진오 소장자료>

한반도 전쟁 위기설이 요즘처럼 줄기차게 나돌았던 적이 많지 않다. 자고 일어나면 트럼프와 김정은의 입을 찾을 정도로 미국과 북한이 주고받는 말 폭탄이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한반도 전쟁과 관련해서 할 말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디일까. 인천이다. 인천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전쟁과 관련해 가장 독특한 경험을 안고 있다. 한 도시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쟁의 상처를 입어 온 곳이며, 또한 그 전쟁들은 인접 국가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가 얽혔다. 인천에서 벌어진 전쟁의 직접 당사국만 8개국이나 된다. 몽골, 중국, 일본, 프랑스, 미국, 러시아, 남과 북한이다. 800년 세월을 이어가면서 이렇게 많은 나라가 전쟁을 벌인 도시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오직 인천뿐이다.

인천이 경험한 전쟁을 이제는 평화의 외침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현재도 역시 인천 앞바다에서 교전 중인 남북한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나서서 인천의 전쟁을 되돌아보고 평화의 소중함을 말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 인천에서 벌어진 전쟁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소개한다.
 
◆660년 나당연합군 인천상륙
당나라군의 덕적도 상륙은 인천에 외국 군대가 상륙한 첫 케이스라고 할 수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태종 춘추공’편에 그 장면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소정방이 당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왔고, 신라에서는 김유신이 5만의 정예병으로 맞아 공동 작전회의를 가졌다는 내용이다. 덕적군도의 소야도(蘇爺島)는 소정방의 섬이라는 뜻이다. 
◆1231 여몽전쟁(1232 강화천도/1270 개경 환도)
강화도는 38년 동안 전시 수도였다. 1259년 항복하면서 강화도에 축조한 내외성 등 방어시설물을 모두 헐어버렸다. 남한 땅에서는 고려와 관련한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1592 임진왜란
임진왜란과 인천은 왠지 낯선 느낌을 준다. 일반적으로 인천이 임진왜란의 피해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1598 11월까지 장장 7년여나 계속되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으로 침략했고, 5월 2~3일 서울에 입성했다. 20여 일 만이었다. 일본군 인천 도착은 5월 19일이다. 선봉대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부평으로 밀고 들어왔다. 부평부사 남유는 그 즉시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튿날 문학산을 근거지로 하던 부대가 간석역 부근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문학산성에서도 승전했다. 부평일대의 피해는 극심했다. 임진왜란 당시 강화도는 항전의 기지 역할을 했다. 강화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장 김천일과 세자 광해군이 항전의 선봉에 섰다.
◆1627 정묘호란
1627년 1월 후금이 조선을 침입했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3월에 강화도 연미정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4월에 환도했다.
◆1636 병자호란
1636년 12월 청 태종이 조선에 침입했다. 강화도로 피하려던 인조는 청군에 길을 차단당해 남한산성으로 피란해야 했다. 1637년 1월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됐다. 왕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이 인질로 붙잡히자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1866 병인양요
1866년 8월 프랑스군이 한강을 따라 침공했다. 9월에 강화를 침략해 약탈했다. 10월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이 철수했다.
◆1871 신미양요
1871년 4월 미국 해병대가 강화도 광성보를 점령했다. 5월 미군이 자진철수했다. 이때의 강화도 피해 역시 상당했다.
◆1894 청일전쟁
1875년 8월 운요호 사건부터 따져야 한다.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체결했다. 1894년 5월 청군은 아산에 진주했고,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했다. 둘 다 동학농민혁명군 진압이 목적이었다. 인천을 차지한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2004년, 제물포해전 100주년을 맞아 인천시 중구 항동 연안부두 해양광장에 세워진 바랴크호와 카레예츠호 추모비와 조형물.<경인일보 제공>
 
◆1904 러일전쟁
1904년 2월 8일 제물포해전이 러일전쟁의 시작점이다. 1905년 5월 일본군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일본의 한반도 우선권을 인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50 한국전쟁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국군과 UN군에 불리하던 전세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일거에 뒤집었다. 그러나 상륙작전 뒤에 숨은 인천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또한 인천은 맥아더 동상 문제로 보혁 갈등의 상징도시화 하고 있기도 하다.
◆2010 연평도포격
2010년 11월 23일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은, 인천은 여전히 전쟁의 현재적 장소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서해5도를 둘러싼 NLL 역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화약고로 세계 각국에 인식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인천에 얽힌 전쟁들은 몇 가지 점을 말해준다. 첫째, 한반도에서 벌어진 대다수 전쟁의 장소가 인천이라는 점을 극명히 드러낸다. 둘째, 전쟁에는 일종의 패턴이 있다는 점을 행간에서 읽을 수가 있다. 전쟁이 벌어진 시기의 국가 지도자와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셋째, ‘전쟁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란 문제를 인천에서 얘기하는 게 설득력 갖게 한다.

인천은 수많은 전쟁의 아픔을 다양한 장소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그것을 몇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강화도, 월미도와 그 주변, 문학산, 부평, 인천대교, 서해5도 등 6곳이 된다.
 
전쟁의 기억이 남다르게 박혀 있는 인천은 이들 전쟁을 잊으려고만 할 게 아니라 더욱 철저히 연구하고 분석해서 앞으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평화 도시’로 거듭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