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주어야 사랑을 받아먹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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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주어야 사랑을 받아먹는 아이
  • 최종규
  • 승인 2010.10.14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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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다] 앤서니 브라운, 《돼지책》(웅진주니어,2001)

  며칠 앞서, 우리 집 어린 딸아이는 늦도록 더 놀고픈 나머지, 잠자리에 들 깊은 밤에 잠자리에 들지 않으려고 자꾸 “아빠, 쉬.”나 “아빠, 응가.” 하며 보채었습니다. 쉬를 누거나 응가를 할 마음이 없는 아이입니다. 불을 켭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킵니다. 아이한테 스스로 쉬를 하든 응가를 하든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바지를 내리고 똥걸상에 앉습니다. 아주 마땅히 아무것도 안 눕니다. 아이는 씨익 웃습니다. 아빠는 아침부터 고단하고 지쳐서 마주 웃어 주지 못합니다. “이제 그만 자야지.” 하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이러기를 몇 차례 되풀이하며 아이 아빠는 이내 골을 부리며 아이한테 툭탁거립니다. 아이랑 신나게 놀아 주었다든지, 아이가 스스로 곯아떨어질 만큼 산을 오르내렸더라면 아이가 잠을 안 자겠다며 떼를 쓸 일이 없을 텐데요.

 겨우겨우 아이를 재우기까지 두어 시간 걸립니다. 아이 아빠는 몸이 고단하지만 잠이 달아나 힘들게 깨어 있다가 어찌어찌 가까스로 잠듭니다. 이튿날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 《돼지책》을 펼칩니다. 아이가 퍽 어릴 무렵부터 아이를 부를 때에 “돼지야∼.” 하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더 어려 혀가 훨씬 짧았을 때에는 아빠가 “돼지!” 할 때에 “디지!” 하고 따라했는데, 이제는 거의 “돼지!” 소리에 가깝게 말을 합니다. 아이를 보며 “예쁜 돼지!”라 말할 때가 있으나 으레 “요 말괄돼지 같으니!”라 말하기 일쑤입니다.

 이튿날까지 골이 말끔히 안 풀린 미련스러운 아빠는 《돼지책》을 넘기며 곳곳에 깃든 예쁘장하고 짓궂은 ‘돼지 무늬’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돼지다! 돼지네. 여기에 또 돼지야.” 하고 말하다가는,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며 엄마 아빠 힘들게 하는 벼리(아이 이름)도 돼지야. 벼리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며 신나게 뛰어놀면 얼마나 좋겠니.” 하는 말을 덧붙입니다.


.. 피곳 씨와 아이들이 떠나고 나면, 피곳 부인은 설거지를 모두 하고, 침대를 모두 정리하고, 바닥을 모두 청소하고, 그러고 나서 일을 하러 갔습니다 ..  (8∼9쪽)


 “이 그림 좀 봐. 여기에서는 아줌마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러네. 우리 집에서는 아빠가 날마다 밥하고 빨래하고 치우고 벼리 씻어 주고 옷 입히고 그러지? 그림책 아줌마도 참 힘들 텐데, 아빠도 힘이 많이 드는구나.” 하는 말을 아빠가 조잘조잘합니다. 그림책 《돼지책》 여기저기를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함께 짚으며 웃고 떠들던 아이가 조용합니다. 아이는 아빠 말을 알아들었을까요. 아이는 아빠가 골부리며 푸념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을까요.

 아이는 틀림없이 아빠 푸념을 ‘이야기’로든 ‘느낌’으로든 알아채리라 봅니다. 그런데 살짝 뾰로통하듯 풀이 죽던 아이는 조금 지나서 다시 웃고 떠들며 노래를 부릅니다. 슬픔을 느꼈어도 슬픔을 금세 잊으며 웃는 아이입니다. 아빠나 엄마가 이맛살을 찡그리며 나무랄지라도 한때를 지나면 어느덧 깔깔거리는 아이입니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책을 읽을 때에 곁에서 함께 책을 펼칩니다. 엄마는 엄마 책을 읽고 아빠는 아빠 책을 읽으며 아이는 아이 책을 읽습니다. 아빠가 빨래를 하면 곁에서 빨래하기를 가만히 지켜보다가는 따라서 빨래놀이를 합니다. 엄마이든 아빠이든 호미를 들고 텃밭에서 깨작거리면 아이도 호미를 찾아 들고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밭에 호미를 폭폭 찍습니다. 아직 불이 뜨거우니 가까이 있지 못하도록 막지만, 아이가 제법 커서 너덧 살쯤 된다면 아이한테 쌀씻기를 맡긴다든지 가스불을 켤 때에 켜도록 시킬 수 있겠지요. 아이는 아빠가 도서관 책을 갈무리하고 있을 때에 옆에서 “무거워. 무거워.” 하면서도 책을 들고 옵니다. 아빠 일을 거든다며 책을 날라 줍니다.

 어른들은 아이가 가위나 칼을 들면 다치니 안 된다 하지만, 아빠와 엄마가 칼과 가위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찬찬히 보여주며 차분히 말을 들려주면 아이는 잘 알아듣습니다. 그냥저냥 마구 내어주어서는 다칠 테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며 어버이 스스로 아이 앞에서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면 다칠 일이 없습니다. 작은 가위를 아이한테 쥐어 주면서 신문 종이나 못 쓰는 종이를 자르도록 해 주면 돼요. 어른들도 바느질을 할 때에 바늘에 찔리면서 익숙해지고, 밥하기를 하며 칼로 손을 베는 가운데 배웁니다. 넘어지거나 부딪치며 자전거를 잘 탈 수 있습니다. 애써 쓴 글이 푸대접을 받는다든지 사진 공모전에 내놓았는데 사진이 떨어진다든지 하면서 내 글과 사진을 새삼스레 돌아보거나 다잡을 수 있어요.


.. 피곳 씨와 아이들이 저녁을 먹자마자, 피곳 부인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그러고 나서 먹을 것을 조금 더 만들었습니다 ..  (13쪽)


 앤서니 브라운 님이 일군 그림책 《돼지책》에는 “피곳 씨네 아줌마”하고 피곳 씨하고 피곳 씨네 두 아들이 나옵니다. 피곳 씨하고 두 아들 사이먼과 패트릭은 ‘크고 대단한 사람’입니다. ‘크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인 ‘엄마’한테는 아무런 이름이 없이 “피곳 부인”입니다. 집일은 한 가지조차 안 하면서 돈을 벌거나 이름을 얻거나 힘을 누리는 남자들 삶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거나 더 높은 이름을 얻거나 더 큰 힘을 거머쥐는 데에 눈길을 맞춥니다. 학교를 다니거나 일터를 다니거나 더 많고 높고 큰 쪽으로만 기울어집니다. 사람을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돕는 마음결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착하게 살아가거나 참되게 살아가거나 곱게 살아가는 쪽으로는 눈썹 한 번 찡긋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피곳 씨네 아줌마가 비로소 웃음을 찾습니다만, 아줌마가 웃음을 찾더라도 아줌마 이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웃음을 찾기란 한때로 그칠 수 있으며, 오래오래 웃음을 찾는달지라도 미국이든 한국이든 온누리 삶터에서 ‘여자가 보내야 하는 억눌린 삶결’은 나아지지 못한다는 대목을 넌지시 빗대는구나 싶어요.

 그림책 끝자락에 “피곳 씨와 아이들은 요리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요리는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30쪽)!”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남자들은 ‘엄마가 빈 자리’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기쁘게 집일을 돕는 셈’일까요. 이 남자들은 왜 웃으면서 “요리는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 하고 외치는가요.

 언뜻 보자면 남자들이 제 마음을 차리면서 기쁘게 집일을 거든다는 줄거리를 보여준다 할 테지만, 《돼지책》을 내놓은 앤서니 브라운 님은 ‘집살림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일구는 길’임을 슬며시 보여주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버는 사람이더라도 잠을 자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하며 옷을 입어야 합니다. 씻어야 하고 식구들하고 말을 나누어야 하며 아이와 놀아 주며 사랑어린 손길과 눈길과 마음길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온누리에 널리 알려진 사람은 밥을 안 먹어도 되나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총리나 법관이나 시장이나 군수쯤 되면 빨래를 안 하고 한 가지 옷만 입고 지내도 되는가요?

 나 스스로 살림을 맡든 누군가 살림을 맡아 주든 살림을 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나 나 스스로 내 살림을 내 힘으로 꾸리며 내 삶을 가꿀 때에 가장 아름답습니다. 내 땅에서 내가 농사지어 곡식을 거둔 다음 밥상을 차릴 수 있을 때하고 돈으로 바깥밥을 사 먹을 때하고 밥맛과 밥느낌이 같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이한테 차려 주는 밥이 전화 걸어 시켜 먹는 밥하고 비슷할 수조차 있겠습니까.

 “피곳 씨네 아줌마”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을 맡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곳 씨네 아줌마는 당신 스스로 당신 살림살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당신 이름조차 사라지며 당신 삶이 무엇인지 더듬는다거나 나눌 길이 꽁꽁 막혀 있거든요. 이와 마찬가지로 피곳 씨네 아저씨와 아이들도 당신들이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스스로 틀어막고 거들먹거렸습니다. 종이조각뿐인 돈과 허울뿐인 이름에 사로잡혀 ‘어머니 자리를 얕보는 권력’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피곳 씨네 아저씨는 아버지다운 길을 버렸고, 피곳 씨네 아이들은 아이다운 길을 놓쳤어요.

 함께 밥하고 함께 설거지하며 함께 빨래하여 함께 빨랫줄에 넌 다음 다 마른 빨래를 함께 개어 함께 옷장에 가지런히 놓는 즐거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함께 텃밭이나 들판에서 땀흘려 일하고 함께 씻으며 웃고 떠드는 보람이란 아주 큽니다. 함께 드러누워 쉬며 수다를 떠는 저녁나절은 기쁨으로 마무리짓는 하루입니다. 기쁜 하루가 모여 삶이 되고, 기쁜 삶을 오래오래 이으며 내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고 제금날 때에 또다른 테두리에서 새삼스러운 삶빛을 길어올립니다.

 그림책 《돼지책》을 내놓은 앤서니 브라운 님은 남자입니다. 남자 목소리와 눈길로 ‘살림하는 보람과 뜻과 기쁨과 아름다움’을 깨달으며 그림책에 고스란히 담아냈기에 참 놀랍습니다. 아마 앤서니 브라운 님 스스로 ‘손수 밥을 해서 살붙이랑 즐겁게 먹는 아름다운 삶’을 알기에 이러한 그림책을 빚지 않느냐 싶습니다. 당신 스스로 빨래를 북북 비벼 빨아 햇살 좋은 마당가 빨랫줄에 빨래를 탁탁 펼쳐 널어 놓는 시원하고 싱그러운 삶을 누리기에 이처럼 그림책을 엮지 않느냐 싶어요.

 사랑해 주어야 사랑을 받아먹는 아이입니다. 내 삶을 사랑할 때에 내 아이와 이웃과 동무 삶을 다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좋은 삶 좋은 넋을 일구며 좋은 말이 샘솟고, 좋은 내 삶은 좋은 네 삶으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 돼지책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허은미 옮김,웅진주니어,2001.10.15./8500원)

겉그림. 미국사람이 일군 '미국 삶터에서 여자가 푸대접받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우리 나라에서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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